애드몬튼에 온 이후 나는 산책을 즐기게 되었다. 원래 산을 좋아했었지만 이곳은 그냥 넓은 평지뿐이다. 가장 가까운 록키산(Canadian Rocky)은 차로 장장 서너 시간이상 가야 만날 수 있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산책이나 마라톤, 자전거 타기와 인라인스케이팅을 즐긴다. 때문에 이를 위한 인도나 자전거로가 잘 정비되어있다.
나의 산책 시간은 주로 가사일과 아이들 뒷바라지가 대충 끝난 저녁 7시 무렵이다. 여름에는 해가 저녁 8-9시나 되어야 지는 지라, 석양을 보며 생각에 잠길 수 있는 귀한 특권을 누릴 수 있다. 손에 잡힐 듯 낮게 떠다니는 뭉글뭉글 은회색 구름과, 우뚝 솟은 도심 빌딩 세련된 유리벽 사이로 그 붉음 고운 석양이 반사되면, 매일매일이라도 가던 걸음을 멈추어야 할 만큼 정말 무척이나 아름답다.
저녁 산책 이야기를 하면 많은 사람들이 철학자 칸트를 떠올릴 것이다.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동프러시아의 수도 쾨니히스베르크(Konigsberg)에서 태어나, 죽을 때까지 거기서 살았다. 특히 그는 평생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변함 없이 석양을 즐기는 긴 저녁산책을 했고(그 지역상황에서는 오후 3시 30분부터 시작), 그것을 보고 마을사람들이 시계를 맞추었다는 일화는 너무도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때로는 널리 알려진 덕분에 제대로 알려지지 못한 것도 많은 법이다. 우리는 흔히 칸트 산책의 핵심을 ’시계를 맞출 만큼 매일 같았던’ 그 시간적 측면에만 두어버리기 쉽다. 그것은 칸트를 그저 산책을 좋아하는 한 이웃집 아저씨로 머무르게 만든다.
우리의 철학자 칸트는 비록 159센티의 키에 왜소한 체격, 더구나 머리가 커서 가분수처럼 보였던, 외면상으로는 볼품 없는 한 작은 사람에 불과했지만, 그 내면으로는 인간 이성과 우주 근본의 대 질서를 품은 ’철학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거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
칸트 산책의 핵심은 단순한 시간차원 그 한가지 이상이다. 트라이앵글 구조이다. 칸트는 매일 같은 시간에(동일한 시간), 매일 같은 코스를(동일한 공간), 그것도 매일 같은 속도로(동일한 신체행동) 걸었다. 자신의 뇌를 둘러싼 외부환경을 자신의 의지대로 가장 규칙적으로 제한시켜 놓은 다음, 그 유한한 단순성 속에서 그의 뇌는 그야말로 무한한 자유를 얻었다.
또한 더욱 중요한 것은 칸트는 이러한 매일 매일의 일상성을 스스로 즐겼다는 것이다. 칸트의 일상성을 그저 의무로 생각하고 보조할 수밖에 없었던 하인 람페는 결국 알코올 중독자로 전락해버렸다. 스스로 즐긴다면 누구나 주인이 될 수 있다. 반대로 스스로 즐길 수 없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는 종일 뿐이다.
나는 오늘도 저녁산책을 간다. 칸트를 흉내내어 보지만 물론 똑같지는 못한다. 더러는 시간이 늦어지고, 더러는 곁길로 새며, 더러는 걷기가 지겨워 달리기도 한다. 나는 젊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나의 산책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한다. 저녁 산책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처럼 또 다른 나의 일상에 대해서도 그래야 하는 건 아닌지..하고 말이다. 매일 일어남, 매일 밥을 먹음, 매일 하는 설거지, 매일 하는 아이들과의 입씨름, 매일 읽는 책들... 이런 일상성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무한한 규칙성, 가능성을 끌어낼 수 있지 않을까-하고 말이다.
만약 우리들 중 누군가가 매일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세끼의 밥을 정해진 시간에 먹는다면, 10년쯤 지난 후 어떻게 될까? 만약 매일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정해진 시간에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면, 그의 남은 인생은 아마 무엇이 되어도 되어 있을 것이다. 그만큼 매일매일 무엇을 한다는 것은 한 사람의 일생을 바꿀 수 있을 만큼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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