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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산책 (베트남의 성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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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3-11-24 조회수1,778 추천수16 반대(0) 신고

◎ 2003년 11월 24일 (월)

-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 기념일

 

▣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 (1625-1888)

 

  오늘 전세계 가톨릭교회의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그의 동료 순교자 성인들과 함께 베트남의 130,000명 순교자들의 용감한 신앙증거를 경축한다. 베트남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된 것은 우리나라보다 250여년 앞선 1533년 예수회 회원들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100년이 지난 1625년부터 1888년까지 53번의 박해령으로 130,000명의 신자들이 순교하였다. 이들 순교자들 중에서 117명은 지난 1988년 6월 19일 교황 요한바오로 2세에 의해 베드로 대성전에서 시성되었다.

 

  안드레아 둥락 성인은 1785년경 베트남 북쪽 박닌 지방에서 아주 가난한 이교도 부모의 아들로 태어났다. 성인의 원래 이름은 둥안트란이었고, 12살 때 가족 모두가 하노이로 옮겨가 살았다. 둥안트란은 하노이에서 가톨릭선교사를 만난 것을 계기로 새로운 삶을 맞이한다. 안드레아로 세례를 받고 처음에는 교리교사로 일하다가, 신학을 공부하고 1823년 사제로 서품된다. 케담의 본당신부가 된 성인은 열심히 선교하고 사목하였으나, 1835년 박해령에 구속된다. 얼마 후 본당신자들이 암암리에 마련한 보석금으로 풀려나지만 이전처럼 공공연히 사목할 수가 없어, 이름을 둥락으로 개명(改名)하고 숨어 다니면서 선교한다. 성인은 1839년 다른 동료들과 함께 재차 구속되어 심한 고문을 받고, 하노이로 압송되어 12월 21일 참수되었다. 1900년 시복된 안드레아 둥락은 1988년 다른 116명의 순교자들과 함께 시성되었다.

 

[오늘의 복음]  루가 21,1-4

<예수께서는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작은 동전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셨다.>

 

  1) 어느 날 예수께서 부자들이 와서 헌금 궤에 돈을 넣은 것을 보고 계셨는데 2) 마침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작은 동전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시고 3)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가난한 과부는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더 많은 돈을 넣었다. 4) 저 사람들은 모두 넉넉한 데서 얼마씩을 예물로 바쳤지만 이 과부는 구차하면서도 가진 것을 전부 바친 것이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복음산책]  헌금의 가치를 결정하는 마음

 

  오늘 복음은 가난한 과부가 자신의 가진 모든 것을 헌금으로 바친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성전에서 사두가이파 사람들과 부활에 관한 토론으로 그들의 입을 막아버리고(20,27-40),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경계하라(20,45-47)고 가르치신 예수께서 그곳을 나오셔서 성전 밖에 설치된 헌금 궤를 보고 계셨다. 예루살렘 성전 밖 ’여인의 뜰’에는 각각 다른 명목의 헌금 궤가 13개나 있었다.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넉넉함에서 얼마씩을 헌금하였지만, 어떤 가난한 과부는 작은 동전 두 닢을 헌금하였다. 그 두 닢이 곧 과부가 가진 모든 것이었다. 액수로 따지자면 보잘것없는 돈이지만 예수께서는 어느 누구보다 과부의 헌금이 컸다고 하셨다.

 

  가진 것을 몽땅 바쳐버린 과부는 앞으로 어떻게 살까 하는 생각이 우리의 머리를 스친다. 실제로 그랬을까? 아니면 다른 의미가 숨겨져 있는 것일까? 오늘 과부의 헌금이 어떤 헌금보다 큰 헌금이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과부헌금의 사실유무를 떠나서 헌금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액수의 많고 적음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 헌금이나 헌물에서 그 진정한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바치는 사람의 마음자세이다. 헌금의 액수에 관계없이 헌금에는 내는 사람의 마음이 담겨있다. 그 마음은 제각기 다르다. 헌금의 가치를 깎아 내리는 마음이 담겨있는 경우가 있으니, 달갑지 않고 억지로 내는 마음, 자기의 위신이나 남의 이목 때문에 내는 마음, 넉넉하면서도 인색한 마음, 자기를 선전하고 광고하려는 마음, 마음조차 담지 않고 그냥 내는 마음 등이 그런 것이다.

 

  액수의 많고 적음을 떠나 자신이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을 바친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그렇다고 헌금이 가진 모든 것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하느님께 예물을 바친다면 정성껏 바쳐야 하고, 가진 것 중에 제일 좋은 것을 골라 바쳐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가진 것 중 가장 귀하고 좋은 것은 바로 우리의 생명이다. 이 생명을 차마 바칠 수 없기에 우리는 생명을 대신할만한 것을 바치게 되는 것이다. 생명을 바친다면 그것은 가진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 복음은 자신의 생명을 세상을 위해 내어놓을 예수님의 마지막 죽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사도 바울로는 말한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은혜로우신 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부요하셨지만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분이 가난해지심으로써 여러분은 오히려 부요하게 되었습니다."(2고린 8,9)

 

  예수께서는 인간이 되심으로 가난하게 되셨다. 십자가 위에서 그분은 더욱 가난하게 되셨으며, 죽으심으로써 가진 모든 것을 내어놓으셨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하느님의 참다운 사랑이 그분 안에서 밝히 드러났다.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이토록 크신 사랑이 드러났다면, 오늘날 예수님의 그 큰 사랑은 어떻게 드러나야 하는가? 확실한 것은 부자들의 "가벼운" 헌금보다는 과부의 "온전한" 헌금 속에 그 모습이 담겨있다는 것이다.◆[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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