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휘파람은 불 줄 알지?
이전글 이전 글이 없습니다.
다음글 5월 15일 / 카톡 신부 |1|  
작성자양승국 쪽지 캡슐 작성일2005-05-20 조회수1,153 추천수21 반대(0) 신고
5월 21일 연중 제7주간 토요일-마르코 10장 13-16절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



<휘파람은 불 줄 알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보기 드물게 화를 내십니다. 공관복음을 통틀어 예수님께서 화를 내셨다는 표현은 이곳 밖에 없습니다.


유대 관습 안에 보통 덕망 높은 스승이나 랍비에게 자녀들의 축복을 청하는 일이 보편화되어 있었습니다.


몇몇 사람들이 자녀들을 축복해주시라고 아이들을 줄줄이 데리고 예수님께 몰려왔습니다.  안 그래도 몰려드는 사람들로 인해 바빠 죽겠는데, 아이들까지 몰려와서 난리니 제자들은 짜증이 났겠지요.


“스승님께서 지금 쉴 틈도 없이 바쁘신데, 왜 아이들까지 몰고 와서 난리냐? 애들은 가!”라고 나무란 것입니다.


이런 제자들의 모습에 예수님께서는 화를 내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 하느님의 나라는 이런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그리고는 어린이들을 하나하나 당신 품에 안으시고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축복해주십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어린이들은 인간 취급을 제대로 못 받았습니다. 영유아 사망률이 높던 시대였습니다. 어느 정도 성장을 해도 각종 질병에 무방비상태였던 아이들은 셀 수도 없이 죽어갔습니다. 그래서 일단 어른이 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당연히 어른이 덜 된 어린이들은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아직 인간으로 존엄성이나 가치도 없는 그런 존재가 어린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어린이들조차 한 고귀한 인격체로 인정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시대를 앞서간 철저한 인본주의자가 예수님이셨습니다. 한 인간을 외모나 나이, 학식이나 재산여부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생명이 있는 한 누구나 다 존중받아야 할 하느님의 소중한 피조물로 바라본 선구자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오늘 어린이들을 축복하는 예수님을 묵상하면서 바로 이 모습을 삶의 모토로 선택한 저희 사부, 돈보스코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1841년 12월 8일 아침 돈보스코는 원죄 없으신 마리아 잉태 대축일 미사를 드리기 위해 제의방에서 제의를 입고 있었습니다. 제의방지기 요셉 고모띠는 한 소년이 근처에 있는 것을 보고 미사 복사를 하도록 했습니다. 소년은 풀이 죽은 듯 대답했습니다.

    

“난 할 줄 몰라요.”

“이리 와 복사를 하란 말이야.”

“할 줄 몰라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걸요.”

“이런 바보 같으니! 복사도 못하면서 제의방엔 왜 들어와?”


제의방지기는 화가 나서 먼지떨이를 집어 소년의 어깨와 머리를 때렸습니다. 소년은 피해 달아나려 했습니다. 돈보스코는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이봐요, 그게 무슨 짓이오? 왜 애를 때린단 말이오?”

“미사 복사도 못하면서 제의방에 들어왔거든요.”

“당신이 잘못했어요.”

“신부님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 아이는 내 친구요. 즉시 그 아이를 불러주시오. 그 아이와 할 말이 있으니.”

 

소년은 어정쩡한 표정을 지으며 제의방으로 돌아왔습니다. 돈보스코는 다정하게 물었습니다.


“벌써 미사는 드렸니?”

“아뇨.”

“착한 친구, 이름이 뭐지?”

“발도로메오 가렐리예요.”

“어디서 왔지?”

“아스띠에서요.”

“그래. 무슨 일을 하고 있는데?”

“벽돌 일을 해요.”

“아버지는 살아계시니?”

“아뇨, 돌아가셨어요.”

“어머니는?”

“어머니도 돌아가셨어요.”

“나이는 몇 살이지?”

“열여섯 살이요.”

“글을 일고 쓸 줄 아니?”

“몰라요.”

“노래는 할 줄 알지?”

“몰라요.”

“휘파람은 불 줄 알지?”


드디어 발도로메오는 웃기 시작했습니다. 돈보스코가 원했던 것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어느새 돈보스코와 발도로메오는 친구가 되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 청소년들, 정말 측은하기 그지없는 아이들, 짠하기만 한 아이들입니다. 우리 기성세대들의 이기심으로 인해, 천박한 자본주의의 극단적 이기주의와 피를 말리는 경쟁논리에 바탕을 둔 그릇된 정책으로 인해 활짝 피어나지 못한 채 시들어가는 불쌍한 우리 청소년들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셨듯이, 또 돈보스코 성인이 그러셨듯이 오늘 하루 모든 어른들이 고생하는 우리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을 진심으로 위로하고 축복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