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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은총 피정 <13 > 용서와 회개 - 강길웅 요한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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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7-09-06 조회수1,523 추천수21 반대(0) 신고


 용서와 회개


 

   제가 1993년경에 미국 로스엔젤레스에 들렀을 때의 일입니다. 그때 한인

신문에 이런 놀라운 기사가 있었습니다.


   어떤 미국인 목사님에게 아들이 여섯 있었는데 다섯 명의 아들이 똑같이

강간죄로 교도소에 복역 중이었으며, 나머지 아들도 체포되지만 않았지 그

도 역시 강간죄로 경찰에 수배중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여섯 명의 아들이 상대한 여자는 다 다릅니다. 그때 미국 사회에 큰 파문이 있었습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들은 모두 경건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기도하며 성장했을 것이고, 평안하고 거룩한 환경 속에서 좋은 것만 듣고 보고 배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끔찍한 가문의 불상사가 일어날 수 있는가? 이것은 아들 여섯 형제만 가지고는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불행의 씨는 대를 건너뛰어서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에 당대의 부모 탓만도 아닙니다. 그럼 누구 탓인가? 분명히 조상 누군가의, 용서받니 못한 범죄행위의 탓입니다. 이처럼 내 죄만 나를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라 조상들의 죄도 나를 따라다닙니다. 이게 큰일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우리 당대에 이 저주와 불행의 씨를 소멸시켜야 합니다. 무서운 악의 굴레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래서 오셨으며 예수님은 저주를 축복으로 바꿔 주셨습니다. 그 축복으로 바꾸는 비결이 뭐냐? 그 비결과 비법은 회개입니다. 회개는 저주를 복으로 바꾸는 기묘한 약입니다.


   그래서 회개한 죄인이 더 열정적으로 사는 경우는 많이 있습니다. 또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알코올 의존자는 아무도 못 고칩니다. 의사도 못 고치고 신부도 못 고칩니다. 또 자기 신앙으로도 안 되고 자기 이성이나 의지로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치유된 알코올 의존자는 다른 알코올 의존자를 고칠 수 있게 도와줍니다. 마약 중독자도 마찬가집니다. 아무도 도울 수 없는데 치유된 마약 중독자들은 다른 중독자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참회를 한 부모는 인간의 나약함을 알기 때문에 잘못한 자녀를 더 이해하게 되며, 본인 자신이 상처를 받았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아픔을 더 쉽게 위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과부 사정은 과부가 안다는 말도 있습니다. 슬픔은 먼저 경험한 사람이 슬픔을 나주에 겪는 사람을 더 이해사고 더 도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회라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잘 안 됩니다. 왜 안 되느냐? 사실은 내가 나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무엇이 숨겨져 있고 또 무엇이 감춰져 있는지 내가 나를 잘 모릅니다. 이를테면 무의식의 저 밑바닥에 무엇이 고통스럽게 숨겨져 있고 감춰져 있는지 모릅니다. 알면서도 모릅니다.


   '알면서도 모른다.' 는 말이 모순이 있지만, 내 인생에 있어서 어릴 때의 사건부터 지금까지의 사건을 모두 기억하며 알고는 있어도, 그것들이 어떻게 서로 연결이 되었는지를 모릅니다. 그러니까 알면서도 모릅니다.


   영화 얘기 좀 하겠습니다.


   바브라 스트라이젠드가 주연하고, 그가 직접 감독 연출까지 한 '사랑과 추억'이란 영화입니다. 1992년도 아카데미 7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고 남자 주인공 닉 놀테는 골든 글로브 최우수 남우주연상을 수상했습니다. 여러분도 모두 보셨을 것입니다.


   어떤 쌍둥이 남매가 있는데, 시를 쓰는 시인이며 미혼인 여동생이 자꾸만 자살을 기도하고, 결혼한 오빠는 성격 장애가 아주 심해서 그 가정이 파탄 직전입니다. 그들 부모도 이혼했고, 온 가족이 갈기갈기 찢긴 채, 살아도 산다고 말할 수 없는 지옥 같은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여동생이 또다시 자살 미수로 정신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그때 담당 의사의 요청을 받고 남캐롤라이나에서 살고 있는 오빠가 뉴욕으로 달려가 동생의 치료에 대한 여러 가지 상담에 응하게 됩니다. 여기서 정신과 여자 의사가 바브라스트라이젠드고, 오빠 역으로 상담에 협조하고 있는 남자가 닉 놀테 입니다.


   닉 놀테는 의사를 만나는 순간부터 빈정대며 야유를 합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불안하고 초조해하며 뭔가를 은밀히 숨기고 있습니다. 반면에 의사는 인내심 있게 해결의 실마리를 찾으려고 애를 쓰는데, 사실은 의사 자신도 남편과 자기 아들과의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벽이 생겨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남편은 바이올리니스트인데 연주 여행이 잦은 탓으로 피아노 반주자와 놀아나게 되고, 아들과도 사이가 단절된 채, 한집에서 마치 남남처럼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의사 자신이 문제가 있으니까 닉 놀테의 가정의 어둡고도 음산한 문제에 깊은 애정을 갖는 것입니다.


   늘  빈정거리며 비협조적인 태도로 일관하던 닉 놀테가 드디어 마음을 조금씩 열더니 끝내는 은밀하게 숨겨 두었던 어린 시절의 뼈아픔 사건을 모두 고백하게 됩니다.


   열세 살 뗍니다.


   비바람이 몹시 치는 밤이었습니다. 난폭한 아버지가 새우를 잡으러 바다

에 나가셨을 때 어머니와 남매가 함께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탈옥수들의 침입을 받고, 엄마도 누이동생도 그들에게 겁탈을 당했을 뿐 아니라 남자 아이인 자기마저도 탈옥수에게 겁탈을 당하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때, 밖에 나갔다가 화를 면했던 열다섯 살 형이 이 모습을 보고는 탈옥수 두 명을 사냥총으로 쏴서 죽이고, 이때를 틈타 어머니도 나머지 한 명을 칼로 찔러 죽입니다. 그리고 어머니와 세 자녀들이 합세해서 탈옥수들을 모두 매장하는데, 어머니는 자녀들에게 이 사건을 평생 비밀로 지키자고 굳게 약속을 합니다.


   이런 사건은 실제로 누구에게 말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 비밀은 잘 지켜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비밀을 지키는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자신들의 삶이 철저하게 파괴됩니다. 가정 파탄, 난폭한 성격, 자살 충동 등등, 실로 무서운 세월이었습니다. 결국 닉 놀테가 그런 고백을 합니다. "겁탈보다 더 두려운 것은 침묵이었다."


   그가 의사에게 모든 것을 다 털어놨을 때, 그때 비로소 자신을 짓누르고 있던 무거운 짐을 깨끗이 벗게 됩니다. 그래서 포악하고 거친 성격이 치유를 받으며, 나중에는 자살을 기도하던 여동생도 깨끗하게 완치가 됩니다. 더 이상 과거의 아픔 기억으로 상처를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주 훌륭한 영화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에게도 모양은 다르지만, 그 비슷한 상처 몇 개씩은 가슴에 간직한 채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상처에서 나오는 아픔 때문에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자신의 삶을 계속해서 병들게 합니다.


   정서적으로 불안한 사람, 과격한 사람, 화를 잘 내는 사람, 유난히 시기 질투가 많은 사람, 낭비벽이 심한 사람, 술만 마시면 주벽이 있는 사람, 엉뚱한 거짓말로 자신을 위장하며 불안해하는 사람, 늘 도전적인 사람, 6계명에 자주 시달리는 사람, 남에게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 등등, 이루 셀 수 없는 부적절한 요소들이 우리 인생을 우리도 모르게 짓누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자신의 성격과 생활 태도에 대해서 단 한 번이라도 고 치려고 시도해 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런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본인이 모릅니다. 상처받은 것보다 더 불행한 것은 상처를 그대로 간직하며 사는 것이고, 그보다 더 불행한 것은 치유받을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우리 자신을 깊이 있게 성찰해 봐야 합니다. 단순히 미사 몇 번 빠졌다. 기도 몇 번 못 했다 라는 식의 성찰과 고백이 아니라 무엇이 근본적으로 나를 어둡게 하고, 내 인생을 힘들게 하는지, 근원부터 따져 봐야 합니다. 이것이 해결 안 되면, 잘 먹어도 불행하고 기도하고 봉사해도 불행합니다.


   성경 세미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안수받기 전에 봉사자와 면담하는 시


간입니다. 이때 속에 감춰진 것을 다 토해 내지 않으면 성령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합니다. 실제로 우리가 감추며 살기에는, 인생은 너무 무겁고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어떤 여대생이 있는데 어렸을 때부터 얼굴에 이상한 것이 많이 돋아나서

약을 먹고 음식을 조심했지만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성령 세미나에 참석했을 때의 일입니다.


   면담을 하면서 이 얘기 저 얘기할 때 갑자기 큰어머니를 오랫동안 미워했던 생각이 났습니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큰집에서 자랐는데 그때 큰어머니한테 구박을 많이 받았습니다. 지금은 큰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안 계신데 갑자기 그게 생각이 나서, 엉엉 소리 내며 울었습니다.


   결국 이 자매가 큰어머니를 용서했고 그리고 자기도 용서받았는데, 나중

에 얼굴에 있던 이상한 것들이 다 없어졌습니다. 병이라는 게 묘합니다. 그래서 병은 마음에서 온다는 말도 합니다.


   영화 얘기 하나만 더 하겠습니다.


   알파치노가 주연한 '여인의 향기'라는 영화입니다. 알파치노가 이 영화로 65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습니다.


   미 육군 퇴역 장교인 알파치노는 시각 장애인이 되었는데 성격이 아주 포악하고 자기중심적이며, 그리고 술 담배로 잔뜩 찌 들린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조카 가족이 그를 돌보고 있지만 조카 가족들과도 사이가 원만하지 못하여 항상 으르렁거립니다.


   어느 날 조카 가족이 휴가를 떠나면서 휴가 동안에 알파치노를 돌볼 아르바이트생을 구합니다. 아주 얌전하고 공부 잘하는 고등학생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알파치노도 은밀하게 자살 여행을 떠납니다. 그리고 죽기

전에 뉴욕의 최고급 호텔에서 잠자고 먹고 마시면서 인생의 마지막 잔치를 벌이는데, 이때 멋모르고 뉴욕까지 따라온 아르바이트 학생도 사실은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학교에서 친구들의 잘못을 우연히 목격했는데, 그 사실을 학교 당국에 알리지 않으면 퇴학당할 위기에 있는 것입니다.


   사고를 친 놈들이 스스로 사실을 고백해야 하는데 끝까지 감추고 숨기려는 상황에서 아르바이트생은 애매한 위치가 됩니다. 그런데 아파치노가 아르바이트생의 고민을 예민하게 감지하는데, 함께 차를 타고 가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차가 왜 이렇게 무거우냐?" 학생에게 큰 걱정거리가 있다는 걸 알고는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호텔에서의 일입니다. 알파치노가 자살하려는 것을 우연히 목격한 아르바이트생이 깜짝 놀라 권총을 뺏으면서 기를 쓰고 말리는데, 이때 알파치노가 "나는 악한 사람이다." 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자신이 포악하고 못돼먹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때 학생이 말합니다. "아저씨는 악하지 않습니다. 다만 고통 받고 있습니다."


   저는 아르바이트생의 그 말이 참 좋았습니다. "아저씨는 악하지 않습니다. 다만 고통 받고 있습니다."


   그때부터 두 사람은 자신의 문제보다도 상대방의 문제에 깊이 빠져, 아르바이트생은 결국 알파치노를 자살 위기에서 완전히 구해 내며, 알파치노 역시 학교까지 찾아가 전체 학생과 교직원 앞에서 이 아르바이트생을 멋지게 구해 냅니다.


   이제 그 후입니다. 알파치노는 더 이상 자신을 학대하면서 포악하게 살지 않고 아주 온화하고 다정한 사람이 되며, 가난한 아르바이트 학생 역시 절박한 인생의 전환점에서 위기를 극복하여 모든 선생님들과 학생들의 칭송을 받게 됩니다. 아름다운 영화입니다.


   여기서 알파치노가, 아무도 바꿀 수없는 자신의 잘못된 성격을 어떻게 고쳤을까? 그리고 아르바이트 학생 역시 피할 수 없는 퇴학의 위기에서 어떻게 빠져나왔는가?


   내 문제는 내가 스스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꼭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애정을 가지고 상대방을 도와줘야 합니다. 사람은 다 문제가 있는데 중요한 것은, 그 문제를 풀고 해결하려는 의지를 갖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내 문제도 이웃에게 솔직하게 나눠야 합니다.


   우리 속담에 '병은 자랑해야 낫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 병을 선전해야 여러 가지 처방이 나올 수 있으며 고칠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그러나 병을 감추면 고칠 수 있는 길이 막힙니다.


   죄도 마찬가집니다. 자기 죄를 인정하고 주님 앞에 갖고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용서받을 수 있고 그래야 치유될 수 있습니다.


   만일에 알면서도, 죄를 감추고 숨긴다면 그는 용서받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 죄를 자녀와 후손들에게 그대로 물려주게 됩니다.


   오래된 얘깁니다. 저희 본당 옆 마을에 전직 경찰관이 살고 있었는데 동네 사람들에게 악질로 굴었습니다. 그때는 토지가 등기되었는지, 안 되었는지도 모르고 부모님 때부터 사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나중에 이것을 이 친구가 알고는 여러 사람의 토지를 자기 앞으로 이전하여 빼앗았습니다. 그러곤 한술 더 떠서 법으로 공갈도 쳤습니다.


   사람들이 억울하게 당했으면서도 아무 말 못하고, 그 사람 위세에 눌려 꼼짝 못하고 지냈는데, 어느 날입니다. 그 친구 집에 무슨 복잡한 문제가 터지더니, 아들이 자기 아버지에게 칼부림한 사건이 생겼습니다. 그때 그가 죽지는 않았지만 많이 고생했습니다.


   부모가 그 모양인데 자식인들 오죽하겠습니까? 사람들이 그걸 보고 하늘이 벌줬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친구가 무슨 맘을 먹었는지 성당에 다니겠다면 나왔습니다. 우리는 그때 은근히 기대했습니다. 그동안의 잘못을 동네 사람들에게 고백하고 용서를 청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안 합니다. 이러 이런 일이 있었는데 사람들에게 사과를 해야 한다고 하자 오히려 욕을 퍼붓더니 그 후로는 성당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안 되는 것은 안 되는가 봅니다. 될 것 같은데 안 됩니다.


   어떤 자매가 매일 미사에도 나오고 성당 활동도 열심히 하지만 자기 잘못을 모르니 옆에서 힘들 때가 많습니다. 우선 말이 많기 때문에 거짓말도 잘하고 남에게 상처도 많이 줍니다. 어느 땐 입에서 독이 튀어나오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여자만 보면 피합니다.  그러나 본인은 자기 자신을 잘 모릅니다. 모르니까 고치지를 못합니다.


   본당 신부가 불러다가 주의를 줘도 자기만 옳다고 주장하며, 꾸짖어도 듣지를 않습니다. 강론 때는 그 자매가 들으라고 말할 때도 있는데, 사람들은 다 알아들어도 본인만은 못 알아듣습니다. 그러니까 평생 고치지 못합니다. 그 자매의 아들도 폭행죄로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습니다.


   '목욕탕과 때' 에 대해 말씀을 드렸는데, 한번 생각해 보세요. 왜 남아 있는 때가 따끔거리며 사람을 불편하게 하죠? 그게 이를테면, 때를 밀어 달라고 때가 데모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습니다.


   사람들이 말로 상처를 뿌리며 공동체 물을 흐리게 하는 것은, 자기를 위해 '기도해 달라.' ' 상처를 치유 받게 도와 달라.' 는 공동체에 대한 호소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상처 뿌리는 자를 그냥 미워만 할 것이 아니라 다른 한편 사랑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받은 상처나 저주가 치유되고 악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또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놈이 내 돈을 100만 원 떼어먹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놈이 돈이 있으면서도 갚지 않고,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도 없습니다. 돈을 돌려 달라고 하면 법으로 하랍니다. 차용증을 써 준 것도 아닌데, 날강도 같은 놈입니다. 그렇다면 그 인간 같지도 않은 놈을 미워하고 욕하느라고 내 인생이 병들어서야 되겠는가? 그래서는 안 됩니다.


   법으로 해결할 수 없고 이성으로도 해결이 안 된다면, 억울하고 속상하긴 하지만, 그때는 하느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손해보고 상처받은 것이 오히려 나에게 복이 되어야지, 그것 때문에 내가 저주를 받아서는 안 됩니다. 인간 같지도 않는 놈 때문에 고통 받는 것도 억울한데 그놈 때문에 우리가 벌을 받고 있다면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용서는 그래서 위대한 것입니다. 물론,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 그놈은 용서받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지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로부터 오는 저주의 굴레에서는 벗어나야 합니다. 저주는 잘못을 저지른 조상으로부터도 오지만 그러나 잘못된 이웃들로부터도 옵니다.


   그래서 속상할 때, "주님, 저 사람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손해 본 것이 주님 뜻이라면 주님 뜻대로 하십시오." 하고 기도하면, 내 죄도 용서받고, 그 사람도 언젠가는 용서받아서 나에게 큰 복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저주에서 복을 꺼내 주시는 분입니다.


   용서에는 누군가가 대신 얻어맞는 아픔이 필요합니다. 마치 예수님이 우

리가 얻어맞을 벌을 당신 혼자 짊어지셨듯이 우리도 누군가가 맞을 벌을 대

신 짊어질 때 예수님과 같은 중재자가 됩니다. 애매하게 얻어맞는 사람, 그래서 화해를 이루는 자는 하느님이 내신 특별한 분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망할 때 아브라함이 그랬고, 나중에 모세도 그랬습니다.


   이걸 좀 설명하면, 아기가 문지방을 넘어가다가 넘어져서 웁니다. 아프기도 하지만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에 속상해서 웁니다. 빨래를 하던 엄마가 달래 보려 하지만 잘 안 됩니다. 아기는 달랠수록 더 기를 쓰고 웁니다. 이때 엄마가 회초리를 들고 와서는 문지방을 때립니다.


   "이놈, 왜 우리 아기 넘어지게 했느냐? 맞아 보거라." 하며 엄마가 문지방을 땔 때 아기가 비로소 울음을 그칩니다. 왜냐하면 얻어맞는 문지방을 통해서 아픔이 해소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억울하게 얻어맞는 문지방을 이를테면 '중재자' 라고 합니다. 중재자란, 기도와 희생을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 그리고 하느님과 사람 사이를 화해시켜 주는 자를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용서받은 이들이며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가 필요한 이들입니다. 주님의 기도에도 나와 있습니다.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 ‥ ‥." 따라서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면 우리도 용서받지 못하며, 어떤 때는 이미 용서받은 것까지 무효가 될 수 있습니다.


   피정의 궁극 목적은 회개를 통해 하느님을 만나는 데 있습니다. 만일에 회개를 해야 하는데, 회개를 하지 않고 있다면 그도 역시 불우 이웃입니다. 그런데 회개는 살인이나 도둑질, 간음이나 거짓말만이 그 대상이 아닙니다. 죄는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게 아니고, 또 누구나 쉽게 그런 죄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를 건성으로 한다든지, 일상적인 기도를 너무 쉽게 빼먹는다든지, 텔레비전에 너무 시간을 뺏긴다든지, 잔소리가 많다든지, 남의 허물을 잘 들춘다든지, 옆 사람에게 무관심하다든지, 낭비가 심하다든지, 게을러서 가족들을 피곤하게 한다든지 등등, 작은 것을 못 고치면, 큰 죄를 진 사람보다 더 불행합니다.


   왜 작은 죄를 진 사람이 큰 죄를 진 사람보다 더 불행할까요?


   신학생 때 묵상 시간에 볼펜을 똑딱거리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조용한 묵상 시간에 누군가가 볼펜으로 잡음을 내면 옆에 있는 사람이 보통 성가신 게 아닙니다. 한번은 그 친구에게, 묵상할 때 볼펜 장난 좀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자 이놈이 그럽니다. "아따, 형님이 묵상 잘하면 그 소리가 들리겠습니까?"


   그 말은 맞는 말입니다. 남이 무슨 소리를 내거나 말거나 내 묵상 내가 잘하면 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놈은 자기 때문에 여러 사람이 불편하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게 문젭니다. 그래서 이렇습니다.


 큰 죄는 자기가 늘 보고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뉘우쳐서 용서받을 수 있지

만, 작은 죄는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에 뉘우칠 수가 없고, 뉘우치지 못하니까 용서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파티마에서 발현하신 성모님이 아이들에게 말씀하실 때, 소죄 때문에 공심판 때까지 연옥에 있어야 하는 영혼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특히 고해성사를 잘 보셔야합니다. 가톨릭에는 아름다운 보화가 많이 있는데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바로 고해성사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은 어떻게 사람의 죄를 사람에게 고백하느냐고 시비를 걸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개신교에서 천주교로 개종한 장로님이 계신데 그분이 처음에는 천주교의고해성사에 대해 많은 오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비판도 많이 했고 고해성사에 대해 욕도 많이 했답니다. 그러나 본인이 막상 개종해서 첫 고해를 하고 나서는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고해성사는 천주교만이 가지고 있는 보배라는 것입니다.


   개신교 신자였을 때는, 네 죄는 하느님께 직접 고백해서 용서를 받는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나 그때 용서받았다고 느꼈던 은혜와, 직접 고해실에 들어가서 용서받았던 은혜는 비교가 안 된다면서 눈물을 철철 흘렸습니다. 고해성사는 아름다운 성사입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부끄러운 모습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나에게 말 못할

사연들도 감춰져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세상 어디 가서 우리 죄를 고백하겠습니까? 고해 실에 있는 신부는 하느님의 도구일 뿐입니다. 참된 용서는 하느님께서 해 주시는 것입니다.


   특히 자신의 죄를 깊이 성찰하여 잘못된 습관을 고치고 악습을 뿌리 뽑아 저주와 벌에서 해방되도록 합시다. 이것이 나와 내 자녀 그리고 내 후손들에게 줄 소중한 선물입니다. 아멘

             ♣ 은총 피정 中에서 / 소록도 성당 강길웅 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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