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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활 제6주일 나해, 생명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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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24-05-05 조회수126 추천수6 반대(0) 신고

[부활 제6주일 나해, 생명주일] 요한 15,9-17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입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관계 안에서 자기 삶의 의미와 기쁨을 찾는 존재입니다. 특히 내가 사랑하는 이, 나를 잘 아는 이로부터 인정받고 존중받으며 사랑받을 때 비로소 자신이 잘 살고 있음을, 자신이 누군가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 소중하고 귀한 존재임을 느끼게 되지요. 이처럼 참된 사랑을 통해 자기 존재와 삶의 의미를 찾는 과정을 김춘수 시인은 이름을 부르고 그 부름에 응답하는 행위로 묘사하고 있는 겁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 삶에 의미와 기쁨을 가져다주는 참된 사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참된 사랑이 누구에게서 온 것인지, 그 사랑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지, 당신께서는 그 사랑을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전해주셨으며 우리는 당신께 받은 그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전해주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먼저 참된 사랑의 ‘기원’에 대한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존재와 삶에 의미와 기쁨을 주는 그 참된 사랑이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온다고 하십니다. 당신께서 하느님 아버지의 그 사랑을 우리보다 먼저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사랑받으신다는 분명한 확신 속에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사랑 자체’시라고, 그분은 사람을 죽이거나 벌주는 무서운 심판자가 아니라 조건 없이 용서하고 한 없이 자비를 베풀며 가장 좋은 길로 이끄시는 구원자라고 믿으셨습니다. 그래서 극심한 고통과 시련을 당하는 순간에도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죽으시는 순간까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바라셨지요. 그렇게 끝까지 아버지의 사랑 안에 깊이 머무르셨고 그 사랑의 힘으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도 당신처럼 믿음과 순명으로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무르라고 초대하십니다. 그 사랑이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 것인지 먼저 체험해보셨기에 자신있게 우리에게도 권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는 예수님께 사랑의 초대를 받기 전부터 이미 하느님 사랑 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과거의 안좋은 기억에 자꾸 얽매여서, 좋은 것보다는 안좋은게 먼저 보이는 우리의 편향된 시선 때문에 미처 의식하지 못했을 뿐, 우리 삶의 구비구비마다 심겨진 하느님 사랑의 보물들이 우리를 지탱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 보물들은 하느님께서 오직 나만을 위해 특별히 준비하시고 섭리하신 것들이지요. 그런데 그런 하느님 사랑은 그저 무의식적으로 어렴풋이 짐작해 보아서는 그 참된 맛과 기쁨을 제대로 느낄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이 나를 얼마나, 어떻게, 어디까지 사랑하시는지를 제대로 알아야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사랑의 하느님’을 흔들림 없이 믿을 수 있고, 그 믿음이 굳건하고 깊어야 ‘나는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한 사랑을 받는 귀한 사람’이라는 단단한 자존감 속에서 삶의 모든 순간마다 나를 감싸고 이끄시는 하느님 사랑의 손길을 느끼며 기쁘게 살 수 있지요. 그 기쁨은 세상이 주는 물질적이고 현상적인 기쁨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우리를 충만하게 채우고 성장시켜 완성에 이르게 하는 참되고 완전한 기쁨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완전한 기쁨을 주시기 위해 우리를 ‘먼저’ ‘너무나’ 사랑하셨음을, 즉 하느님 사랑의 이유를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알려주고 계시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그런 하느님 사랑 안에 깊이 머무를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살펴봄으로써 그 방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사랑은 인정하고 존중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유다인들 앞에서 이방인인 백인대장의 참된 믿음을 인정하시고 칭찬하셨습니다. 심판과 단죄의 도끼눈을 하고 쳐다보는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 세리 자캐오를 칭찬하시며 그가 여전히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그의 잘못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느님께 사랑받는 그분의 자녀라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사랑은 함께 어울리는 사랑입니다. 당신의 뒤를 따라오던 안드레아와 요한에게 ‘와서 보아라’라며 당신과 함께 하는 삶으로 초대하셨습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알려달라는 제자들에게 ‘나’가 아니라 ‘우리’를 먼저 생각하며 기도해야 한다며 사랑의 공동체성을 알려주셨습니다. 셋째, 예수님의 사랑은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며 봉사하는 사랑입니다. 그분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사랑할 힘을 주시기 위해 그들의 더러운 발을 몸소 씻어 주셨습니다. 넷째, 예수님의 사랑은 선물처럼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그분은 항상 제자들에게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하셨습니다. 친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는 당신 말씀을 십자가 희생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다섯째, 예수님의 사랑은 몸으로 하는 생동감 넘치는 사랑입니다. 귀먹고 말더듬는 이의 귀와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향해 마음을 열라고 하셨습니다. 당신 앞에 바짝 엎드려 처분만 바라던 나병환자의 등을 어루만지시며 그가 병에서 나아 깨끗해지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당신의 진심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군중들 한가운데서 그들과 부대끼며 함께 어우러져 사셨습니다. 이런 것들이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식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예수님께 받은 그 사랑을 이웃에게 제대로 전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신 ‘서로 사랑하라’는 권고를 아주 중요한 ‘계명’으로, 하느님께서 알려주신 그분의 뜻으로 여기며 실천하라고 하십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지녀야 할 중요한 마음자세가 하나 있는데 바로 ‘자발성’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종처럼’ 사랑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저 하느님이 그렇게 하라고 시키셨으니까 아무 생각 없이, 그대로 따르지 않으면 벌을 받을까봐 두려워서 마지못해 실천하는건 참된 사랑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이 나에게 원하고 바라시는 뜻이 무엇인지 그분 마음을 헤아리면서, 예수님이 성경 말씀 안에서 알려주신 원칙과 방법에 따라, 스스로의 의지로 기쁘게 실천해야만, 그 과정에서 고통과 시련 심지어 죽음까지 기꺼이 감당해야만 비로소 참된 사랑을 했다고 볼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런 참된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을 당신의 진정한 ‘친구’로 여기며 그들을 위해 당신 목숨을 몇 번이고, 얼마든지 내어주겠다고 하십니다. 구세주이신 분께서 나의 ‘찐친’이 되어주신다니 그보다 더 기쁘고 든든한 일이 어디 있을까요? 그러니 오늘부터라도 있는 힘껏, 제대로 사랑해봐야겠습니다. 그 사랑이 종말의 순간을 맞는 우리의 마음 자세를 두려움에서 기쁨으로 바꿔줄 겁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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