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병자성사] 병자성사, 준성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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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호식 [ jpatrick ] | 작성일2009-07-02 | |||
병자성사, 준성사
병자성사
사람은 누구든지 병에 걸리게 마련이고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게 된다. 특별한 질병이나 사고를 당하지 않고 장수를 누린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나이가 많아짐에 따라서 닥치는 노쇠 현상과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이러한 질병과 고통 또는 노쇠 현상이나 죽음에 대한 공포는 인간에게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육체적인 영향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영향까지 말하며 결국 인격 전체에 해당하는 말이다. 흔히 병자들은 용기를 잃고 생활이 위축되며 삶에 대한 고뇌와 의심을 품게 된다. “왜 내가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내 생명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죽음 이후에는 무엇이 있는가?” 또한 병자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짐이 되고 있다고 느끼며 자기가 사회에서 소외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렇게 위험하고 어려운 순간에 하느님께서는 당신 구원에 대한 확실한 표시를 주시지 않고 우리를 질병과 고통 속에 죽어 가도록 버려 두었을까? 병자의 성사는 이러한 우리의 불행을 구원하고 치유하는 은총의 표시이다. “여러분 가운데 앓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교회의 원로들을 청하십시오. 원로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고 그를 위하여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믿고 구하는 기도는 앓는 사람을 낫게 할 것이며 주님께서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그가 지은 죄가 있으면 그 죄도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야고 5,14-15). 이 성경 귀절은 어떻게 처음부터 교회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앓는 사람을 고쳐 주라.”(마태 10,8)고 하신 말씀을 이해하고 실천했는지 보여준다.
원로들의 기도와 기름 바름은 병자성사의 기본 형태를 보여 준다. 여기에는 교회의 신앙과 병자의 신앙이 영혼과 육신의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서로 결합된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께서는 죽어 가는 사람에게 당신의 사랑을 표시해 준다. 예수께서 그를 구원하고 모든 것을 다 이루어 준다. 앓는 사람이 하느님과 화해하고 자기 병과 화해한 결과에서 나오는 깊은 평화는 의사가 시도하는 치료 효과를 얻게 하는 데에도 가장 훌륭한 자세를 갖도록 해준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병자성사를 통하여 당신이 받으셨던 고난과 죽음에 병자도 참여하게 하여 위로와 용기를 주심으로 고통과 외로움을 이겨내고 구원에 이르게 한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니 오히려 기뻐하십시오”(1베드 4,13).
과거에 “종부성사”라고 불리던 이 성사는 물론 죽음에 이를 수 있는 질병에 걸린 그리스도교인에게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성사를 받기 위하여 죽음의 문턱에 이르기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다. 나이가 너무 많아 기력을 잃었을 때나 심각할 위험이 따르는 수술을 받기 전 또는 위로와 용기를 필요로 하는 중환자의 경우에도 받을 수 있다. 또한 같은 병의 상태가 계속되는 경우는 이 성사를 다시 청하지 않지만 회복되었다가 또 다른 병이나 사고로 죽음의 위험이 있을 때는 몇 번이고 다시 병자의 성사를 받을 수 있다. 반드시 죽음에 이르는 중병 앞에서 마지막으로 받는 성사라는 오해를 초래하지 않도록 “마지막 기름 바름”(종부성사)이라는 말을 피하고 환자에게 위로와 힘을 주며 구원과 치유의 은총을 베푸는 측면을 강조하여 폭넓게 “병자의 성사”라고 한다.
이 성사를 주려 함에 있어서 사제는 흔히 세례성사의 물을 상기시키는 성수를 뿌림으로써 시작한다. 만약 병자가 원한다면 곧 이어서 고백성사를 준다. 그렇지 않으면 그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과 함께 고백의 기도를 외우며 하느님과 이웃과 화해하는 참회의 마음을 환기시킨 다음 성서 봉독과 기도를 한다. 가족들과 친지들 그리고 치료나 간호를 하는 사람들도 이 예식에 참석하는 것이 좋다. 그들의 친근한 모습, 그들의 정성어린 기도, 그들의 현존은 하느님께서 병자에게 기울이고 있는 관심의 볼 수 있는 표시가 되며 또한 고통당하고 있는 모든 남녀 교우들과 더불어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연대성에 대한 볼 수 있는 표시가 된다. “내가 병 들었을 때 너희가 나를 돌보아 주었다”(마태 25,36). 사제는 침묵 중에 병자의 머리에 안수한다. 이 안수는 하느님께서 병자와 함께 계시고 하느님의 성령이 병자를 보호하고 격려하며 그에게 생명을 주시도록 하느님께 간절히 청하는 기도의 행위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을 하며 성목요일에 주교가 축성한 병자성사의 성유를 바른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자비로우신 사랑과 기름 바르는 이 거룩한 예식으로 성신의 은총을 베푸시어 이 병자를 도와주소서, 또한 이 병자를 죄에서 해방시키시고 구원해 주시며 자비로이 그 병고도 가볍게 해주소서.”
따라서 병자성사의 은총은 종말에 가까운 인간의 삶에 빛을 던져 준다. 그것은 공동체에게 병자에 대한 책임감을 일깨워 주고 또한 공동체 안에서 병자의 역할을 깨닫게 해준다. 사실 가장 위대한 기도자들은 질병과 고통 중에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 주는 사람이라 할 것이다. 병자성사를 받고 사실상 마지막 성사라 할 수 있는 것은 “노자성제”이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 아버지께로 가도록 준비시키는 영적 양식으로 받아 모시는 영성체인데 그 말 자체가 “김을 떠나는 사람의 양식”이란 뜻이다.
죽음의 문턱에서 믿는 사람은 자기가 세례받던 날 시작한 빠스카 여정에서 거의 목적지에 이르는 것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몸과 피를 받아 모심으로써 자신의 전생애를 통하여 여러 가지 성사들을 끊임없이 베풀어 삶의 완성으로 이끌어 왔던 하느님의 자비를 맞아들일 준비를 하는 것이다.
준성사
우리는 볼 수 있는 물질적 표시를 통하여 볼 수 없는 하느님의 은총을 베풀어 주는 성사들, 특히 인생의 여러 가지 중요한 계기에 베풀어지는 칠성사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이러한 성사들에 사용되는 물질적 표시들은 대개 그리스도께서 직접 사용하셨던 사물들이며 그와 관련된 내용을 대개는 성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교회는 이러한 핵심적인 성사의 표징들뿐만 아니라 성사를 받는 사람들에게 보다 효과적인 의미 전달을 하고 하느님께로 향하는 마음의 준비를 잘 갖추도록 하기 위하여 그 성사에 부속된 여러 가지 예식을 행하기도 한다. 이러한 예식들은 그 성사를 받는 사람에게 성사의 거룩한 가치와 귀중한 의미를 구체적으로 전해 주며 그에 합당한 믿음과 사랑과 희망을 심어 준다. 이렇게 성사 자체는 아니라도 성사에 준해서 우리를 거룩함에로 인도하는 것을 준성사라고 한다.
이렇게 준성사는 성사 예절과 관련된 것도 있지만 성사와 관련되지 않고 넓은 의미에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일깨워 주며 그분의 거룩함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들도 있다. 그중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것이 구마와 축성 및 강복이다.
사실 신구약의 하느님 백성들 안에서는 옛부터 사람이나 사물들에 대하여 축복을 베풀어 왔다. 하느님께 기도를 드려 행복과 은총을 간청하는 것을 축복이라 한다. 이것은 개인이 자기 나름으로 드리는 기도가 아니라 공동체를 대표할 권리를 가지고 드리는 기도이다. 구약에 아브라함이나 이사악, 야곱, 모세 같은 성조들이 가장으로서 또는 족장으로서 이러한 축복을 베풀었으며 신약에서도 예수님과 사도들이 축복하는 사례들이 있다. 온 교회의 이름으로 행하는 축복은 흔히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형식이 있고 사제만이 이를 행할 수 있다. 과거 중세 교회에서는 거의 모든 사물과 일에 축복을 빌어 왔으나(심지어 전쟁과 대포에 대해서까지도) 오늘날 현대인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축복이 많이 간소화되었지만 아직도 축복을 통한 하느님의 은혜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개정 공포된 “축복 예식서”의 한국어판(1986년 발행)은 제1부에 사람들의 축복으로 가정과 그 구성원들, 병자, 선교사, 교리 교사, 공익 단체, 순례자, 여행자들에 대한 축복 예식을 담고 있다. 제2부에는 건물과 신자들의 각종 활동에 대한 축복으로 새집, 신학교, 수도원, 학교, 도서관, 병원, 공장, 사무실, 상점, 체육관, 운동장, 각종 교통 수단, 과학 기재, 생업 기기, 동물, 전답과 목장 등을 축복하는 예식이 있다. 제3부와 제4부는 전례와 신심을 위한 성당의 성물이나 개인의 성물을 축복하는 예식으로 성세대, 독서대, 감실, 고백소, 십자가, 성상, 종, 풍금, 성수, 14처, 묘지, 묵주, 성의 등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5부에서 기타의 축복으로 여러 가지 기도와 감사의 기회에 바치는 축복 예식이 있다.
이렇게 대단히 간소화되었다고 하는 데도 온갖 사물과 활동에 축복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축복 예식에서는 대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며 축복의 기도와 찬미가, 신자들의 기도 등으로 이루어진다. 특히 성당에서 사용하는 성물의 축복은 축성 또는 성별이라고도 하는데, 이때에 하는 기도는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축복을 전해 주는 것이 되고 하느님과 만나는 장소가 되기를 간청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축성된 대상들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추구하기도 한다. 또한 사람에 대한 축복으로 악의 세력 즉 마귀나 악령을 사람으로부터 쫓아내는 것을 구마라고 한다. 악의 세력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나라에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비인간적으로 구마 기도나 예식을 행하는 것은 옳지 못하고 준성사라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사실 예수께서 세우신 성사들은 이 세상 사물이 하느님 나라와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만큼 우리 주변의 사물과 일들을 통하여 거룩하신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계기로 삼는 것도 당연하다 할 것이다.
준성사의 영적 효과는 성사처럼 의미 심장하고 확실한 것은 아니고 또 영구적인 것도 아니다. 그 지방의 문화에 따라서 상당히 많은 영향을 받는다고도 할 수 있다. 준성사는 사용자의 신앙과 신심에 따라서 그 의미나 효과가 다르다.
또한 오늘날 우리는 축성된 성물이나 성소가 아니라도, 축복받은 행위나 일이 아니라도 어디서든지 발견되는 하느님의 거룩한 표징에 좀더 민감해질 수 있을 것이다. 높은 산에 올라가 바라보는 대자연의 웅장한 아름다움이나 변화 무쌍한 바닷가의 풍경들, 따스하고 밝게 비치는 햇빛, 새로 돋아나는 햇순들, 어린 아이의 밝고 천진 난만한 미소, 아빠와 엄마의 다정한 모습,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의 땀에 젖은 얼굴 등등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거룩함의 표정들을 보고 우리 자신의 삶을 선하고 아름답게 가꾸어 거룩하신 하느님을 닮아 갈 수 있을 것이다.
[경향잡지, 1989년 12월호, 이성배 요한 신부(대구 가톨릭 대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