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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고해성사] 하느님께서 기대하시는 참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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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호식 [ jpatrick ] 작성일2004-10-30

하느님께서 기대하시는 참 고백

 

 

사람들은 보통 자기가 지은 죄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진심으로 용서를 청하는 태도 앞에서 관대해진다. 반대로 자기 죄를 감추거나 잡아떼거나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거나 형식적으로 뉘우치는 태도를 보면 용서할 마음이 없어지고 끝까지 죄를 묻게 된다. 공직자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여론은 공직자가 잘못을 저지르고 솔직하게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때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신다. 인간이 죄를 짓고 난 다음, 그 죄를 솔직히 인정하고 용서를 청하면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지만, 그것을 감추거나 잡아떼면 가만 두시지 않는다. 성서에서 대표적인 예 네 가지를 들어 하느님께서 기대하시는 참 고백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겠다. 세 가지 예는 구약성서에서 나머지 한 가지 예는 신약성서에서 골랐다.

 

 

1. 여자가 주기에 먹었습니다(구약성서 새 번역, 창세 3,8-19)

 

8 그들은 주 하느님께서 저녁 산들바람 속에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들었다. 사람과 그 아내는 주 하느님 앞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9 주 하느님께서 사람을 부르시며,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10 그가 대답하였다.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 11 그분께서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주더냐? 내가 너에게 따먹지 말라고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따먹었느냐?” 하고 물으시자, 12 사람이 대답하였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 13 주 하느님께서 여자에게 “너는 어찌하여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 하고 물으시자, 여자가 대답하였다. “뱀이 저를 꾀어서 제가 따먹었습니다.”

 

14 주 하느님께서 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너는 모든 집짐승과 들짐승 가운데서 저주를 받아 네가 사는 동안 줄곧 배로 기어다니며 먼지를 먹으리라. 15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 16 그리고 여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네가 임신하여 커다란 고통을 겪게 하리라. 너는 괴로움 속에 자식들을 낳으리라. 너는 네 남편을 갈망하고 그는 너의 주인이 되리라.” 17 그리고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에게 따먹지 말라고 명한 나무에서 열매를 따먹었으니, 땅은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사는 동안 줄곧 고통 속에서 땅을 부쳐 먹으리라. 18 땅은 네 앞에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돋게 하고 너는 들의 풀을 먹으리라. 19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의 명을 어기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은 창세기의 이야기이다. 하느님께서는 남자를 진흙으로 빚어 만드시고 이어 그의 옆구리 갈비뼈를 취하시어 여자를 만들어 내시고 동산에서 살게 하셨다. 그리고 동산을 관리할 책임을 맡기시며 다른 열매는 모두 따먹어도 좋으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만은 따먹지 말라고 명하셨다. 아울러 그 열매를 따먹으면 죽게 된다고 엄중히 경고하셨다. 그러나 다산(多産)의 상징인 뱀이 여자에게 접근하여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창세 3,5) 하고 유혹한다. 여자가 열매를 따서 먹고 그 남편에게도 주자 그도 그것을 먹었다.

 

아담과 하와가 저지른 죄악의 본질이 무엇일까? 단순히 하느님께서 따먹지 말라는 나무 열매를 따먹었기 때문에 그들이 그렇게 엄청난 벌을 받고, 그것도 모자라 그들의 자손 만대 후손들까지도 계속 같은 벌을 받고 있는 것인가? 문제는 그들이 따먹은 열매의 성격에 있다. 그 열매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기능을 갖는다고 했다. 여기서 선과 악은 윤리적인 선행과 악행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 곧 행복과 불행, 더 나아가 구원과 멸망을 가리킨다. 그리고 성서에서 ‘안다’는 표현은 ‘지적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몸 전체로 체험한다’는 뜻을 지닌다. 그래서 ‘여자가 남자를 안다’고 했을 때, 그것은 ‘여자가 남자와 육체 관계를 맺는다’는 말이다. 따라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따먹었다’는 것은 ‘행복과 불행, 구원과 멸망의 주체가 되었다’는 뜻이다.

 

인간의 행복과 불행, 구원과 멸망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이는 그가 처음 만들어질 때 벌써 형성된 삶의 조건이었다. 하느님께서 당신 생명의 숨을 진흙덩이 인간에게 불어넣지 않으셨던들 인간은 생명체가 될 수 없었다(2,7 참조). 하느님을 자기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느냐 아니냐에 따라 인간의 행복과 불행, 구원과 멸망이 결정되는데, 아담과 하와는 이 사실을 부인하고 하느님에게서 독립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하느님처럼 된다는 뱀의 말에 솔깃하여 그 열매를 따먹었지만, 하느님처럼 되기는 고사하고 눈이 열려 자신들의 나약한 육체를 확인했을 따름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서로의 부끄러운 알몸을 가렸다. 그런 다음 그들은 동산 안에서 하느님 앞을 피하기 위하여 나무 사이에 몸을 숨겼다. 그러나 나무 사이에 숨는다고 동산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눈길을 피할 수 있겠는가?

 

주 하느님께서 아담을 부르시며 “너 어디 있느냐?”(3,9) 하고 물으셨다. 이 물음은 하느님 앞에서 인간은 무엇이며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실존적인 질문이다. 아담은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3,10) 하고 대답하였다.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아무것도 갖추지 못한 허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본디 땅의 먼지가 그의 본질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아담은 하느님과 대등한 위치에 올라서려 하다가 그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하느님을 대면하기가 두려워 숨었다.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주더냐? 내가 너에게 따먹지 말라고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따먹었느냐?”(3,11) 하느님은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셨다.

 

하느님의 빈틈없는 추궁에, 아담은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3,12) 하고 하와에게 책임 전가를 한다. 바로 얼마 전에 자기 갈빗대에서 나온 여자를 보고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2,23) 하고 반기던 아담이, 자기가 불리한 처지에 빠지니까 삶의 협력자를 고발하고 나아가 그를 보내 주신 하느님을 고발하고 있다. 여기에 죄에 떨어진 인간의 비정함과 추함이 드러난다. 인간은 자신의 잘못을 이웃에게 뒤집어씌움으로써 자신이 결백해질 줄로 착각하지만 이는 결국 그 이웃을 보내 주신 하느님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하와도 마찬가지이다. “뱀이 저를 꾀어서 제가 따먹었습니다.”(3,13) 하고 뱀에게 책임을 전가시킴으로써 그처럼 영악한 피조물을 만드신 하느님을 고발하고 있다. 그리하여 죄는 인간과 하느님, 인간과 인간, 인간과 피조물 사이에 대립을 초래한다. 뱀은 악의 장본인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따로 심문하실 필요가 없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과 같아지고 당신에게서 벗어나려 했던 아담과 하와를 어떻게 징벌하시는가? 아담과 하와를 본래의 모습과 처지로 되돌리신다. 아담은 먼지에서 나와 먼지로 돌아가야 할 알몸이다. 동산에서처럼 하느님께서 직접 먹여 주시지 않으면, 그는 “흙으로(아다마흐 = 아담 + 방향 접미어 ‘아흐’) 돌아갈 때까지”(3,19) 이마에 땀을 흘리며 힘든 노동을 해야 먹을 것을 마련할 수 있는 비참한 존재이다. 여자는 출산의 큰 고통을 겪어야 새 생명을 얻게 되고, 살아가면서 남편의 힘과 도움을 필요로 하며 그의 지배를 받게 된다. 물론 여자의 운명에 관한 이 묘사는 창세기 저자 당대의 가부장적 여성관에 바탕을 둔다.

 

한편, 악의 장본인인 뱀에게는 하느님께서 저주를 내리시고 한 여인과 그 후손을 보내시어 그를 짓밟게 하신다. 전통적으로 교부들은 이 여인과 그 후손을 성모님과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해석해 왔다. 첫 남자와 여자가 범죄한 직후에 이처럼 악의 장본인을 쳐이길 구세주를 약속하신 데에서 우리는 비천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크신 자비와 사랑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주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그의 아내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 주셨다.”(3,21)는 말씀에서도 그분의 자상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이런 하느님 앞에서 아담과 하와가 책임 전가를 하지 않고 솔직히 자신의 죄를 고백하였던들 사정은 달라졌을 것이다.

 

 

2.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구약성서 새 번역, 창세 4,8-16)

 

8 카인이 아우 아벨에게 “들에 나가자.” 하고 말하였다. 그들이 들에 있을 때, 카인이 자기 아우 아벨에게 덤벼들어 그를 죽였다. 9 주님께서 카인에게 물으셨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10 그러자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느냐? 들어보아라. 네 아우의 피가 땅바닥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 11 이제 너는 저주를 받아, 입을 벌려 네 손에서 네 아우의 피를 받아낸 그 땅에서 쫓겨나리라. 12 네가 땅을 부치어도, 그것이 너에게 더 이상 수확을 내주지 않으리라. 너는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되리라.” 13 카인이 주님께 아뢰었다. “그 형벌은 제가 짊어지기에 너무나 큽니다. 14 당신께서 오늘 저를 이 땅에서 쫓아내시니, 저는 당신 앞에서 몸을 숨겨야 하고,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되어, 만나는 자마다 저를 죽이려 할 것입니다.” 15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아니다. 카인을 죽이는 자는 누구나 일곱 갑절로 앙갚음을 받으리라.” 그런 다음 주님께서는 카인에게 징표를 찍어주셔서, 어느 누가 그를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도록 하셨다. 16 카인은 주님 앞에서 물러나와 에덴의 동쪽 놋 땅에 살았다.

 

인류의 첫 살인은 종교적인 동기에서 저질러졌다. 목축을 하는 아벨과 농사를 짓는 카인이 왜 따로 제단을 차리고 제물을 바쳤는지 모른다. 형제간이니 한 제단에서 형이 지은 곡식과 동생이 기른 가축을 같이 바쳤더라면 형제 살인이라는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인류 역사 안에서 종교 때문에 얼마나 많은 전쟁이 일어났던가! 그리고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전쟁들도 대부분 종교간의 갈등이 그 배경에 자리잡고 있다. 북아일랜드에서는 가톨릭 신자들과 성공회 신자들이, 중동에서는 유다교인들과 회교도들이, 옛 유고에서는 그리스 정교를 믿는 세르비아인들과 가톨릭교를 믿는 크로아티아인들과 회교를 믿는 보스니아인들이, 인도와 파키스탄에서는 힌두교도들과 회교도들이, 스리랑카에서는 힌두교도들과 불교인들이 끊임없이 갈등과 분쟁을 일으키고 있다.

 

카인은 하느님께서 동생 아벨의 제물을 기꺼이 굽어보시고 자기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몹시 화를 내며 얼굴을 떨어뜨렸다. 주님은 왜 아벨의 제물은 받아 주시면서 카인의 제물은 받아 주지 않으셨을까? 이 이야기의 배경에는 가나안 농경민들보다 이스라엘의 조상인 히브리 목축민들을 더 높이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난한 이들의 우선적 선택이라는 성서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이다. 하느님께서는 장자의 특권을 지닌 카인보다 기득권에서 밀린 아벨에게 더 호의를 보이신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아벨의 제물을 굽어보셨다 해서 카인을 미워하시거나 내치신 것은 아니다. 아벨의 선택이 곧바로 카인의 배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카인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하느님께서 자기 제물을 받아 주지 않으신 것에 화를 내며 죄없는 아벨을 들로 데리고 나가 쳐죽였다.

 

그때 주님께서 카인에게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4,9) 하고 물으셨다. 앞에서 “너 어디 있느냐?”(3,9)는 물음이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의 자세를 묻는 것이라면 이 물음은 이웃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묻는 것이다. 하느님의 물음에 카인은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4,9) 하고 잡아뗀다. “당신의 소리를 듣고 … 두려워 숨었습니다.”(3,10)고 하는 제 아비의 소극적인 대답과는 달리, 카인은 하느님께 퉁명스럽게 되쏜다. 그러나 카인은 제 부모처럼 적어도 핑게를 대거나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떠넘기지는 않는다. 그러자 그분께서도 단도직입적으로 “네 아우의 피가 땅바닥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4,10) 하시며 곧바로 카인에게 형벌을 선고하신다. “네가 땅을 부치어도, 그것이 너에게 더 이상 수확을 내주지 않으리라. 너는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되리라”(4,12) 아담에게 내린 형벌보다 더 무겁다. 힘들게 땅을 갈아도 땅이 더 이상 수확을 내주지 않고, 카인 자신은 세상을 떠도는 신세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카인은 하느님의 형 선고에 “그 형벌은 제가 짊어지기에 너무나 큽니다.”(4,13) 하며 즉시 이의를 제기한다. 이것도 제 아비 아담과 다른 태도이다. 아담은 아무 말 없이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형벌을 받아들인 데 반해, 카인은 벌이 자기가 감당하기에 너무 무겁단다. 이에 덧붙여 “당신께서 오늘 저를 이 땅에서 쫓아내시니, 저는 당신 앞에서 몸을 숨겨야 하고,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되어 만나는 자마다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4,14) 하고 하소연한다. 고대 근동에서 제 친형제를 살해한 자는 가문이나 씨족 사회에서 추방하였고 이렇게 추방당한 자는 죽여도 무방하였다. 카인의 처절한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주님께서는 카인의 후견인(고엘)이 되어 그의 생명을 보호해 주겠다고 약속하신다.

 

카인이 살인죄를 저지르고 하느님의 추궁에 모른다고 잡아뗀 것은 분명 잘못이지만, 남에게 책임을 전가시키지 않은 것은 하느님의 뜻에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형벌을 선고받고 적극적으로 그분의 자비에 호소한 것은 매우 잘한 일이다. 카인은 그 덕에 하느님을 든든한 후견인으로 모실 수 있었고 비록 아벨의 피를 받아낸 땅에서는 쫓겨났지만 다른 곳으로 옮겨 새 성읍을 세우고 살 수 있게 되었다.

 

 

3. 주님께 죄를 지었소(구약성서 새 번역, 2사무 12,5-15)

 

5 다윗은 그 부자에 대하여 몹시 화를 내며 나단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살아 계신 한, 그런 짓을 한 그자는 죽어 마땅하다. 6 그는 그런 짓을 하고 동정심도 없었으니, 그 암양을 네 갑절로 갚아야 한다.” 7 그러자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임금님께서 바로 그 사람입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에게 기름부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우고,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해 주었다. 8 나는 너에게 네 주군의 집안을, 또 네 품에 주군의 아내들을 안겨 주고, 이스라엘과 유다의 집안을 주었다. 그래도 적다면 이것 저것 너에게 더 보태주었을 것이다. 9 그런데 어찌하여 너는 주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그분이 보시기에 악한 짓을 저질렀느냐? 너는 헷 사람 우리야를 칼로 쳐죽이고 그의 아내를 네 아내로 삼았다. 너는 그를 암몬 자손들의 칼로 죽였다. 10 그러므로 이제 네 집안에서는 칼부림이 영원히 가시지 않을 것이다. 네가 나를 무시하고, 헷 사람 우리야의 아내를 데려다가 네 아내로 삼았기 때문이다.’

 

11 주님께서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내가 너를 거슬러 너의 집안에서 재앙이 일어나게 하리라. 네가 지켜보는 가운데에서 내가 너의 아내들을 데려다 이웃에게 넘겨주리니, 저 태양이 지켜보는 가운데에서 그가 너의 아내들과 잠자리를 같이 하리라. 12 너는 그 짓을 은밀하게 하였지만, 나는 이 일을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 앞에서, 그리고 태양이 지켜보는 가운데에서 하리라.’”

 

13 그때 다윗이 나단에게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 하고 고백하였다. 그러자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임금님의 죄를 용서하셨으니 임금님께서 죽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14 다만 임금님께서 이 일로 주님을 몹시 업신여기셨으니, 임금님께 태어난 아들은 반드시 죽고 말 것입니다.” 15 그리고 나서 나단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주님께서 우리야의 아내가 다윗에게 낳아 준 아이를 치시니, 아이가 큰 병이 들었다.

 

다윗이 헷족의 용병 우리야를 죽이고 그의 아내 바쎄바를 차지하자, 주님께서 나단 예언자를 보내시어 다윗의 죄를 깨우쳐 주셨다. 나단은 이야기 하나를 다윗에게 들려 주어 그를 격분하게 하였다. 어떤 성읍에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살았는데, 부자에게는 양과 소가 많았고 가난한 이에게는 작은 암양 한 마리밖에는 없었다. 가난한 이는 암양을 애지중지하며 친딸처럼 길렀다. 어느 날 부자에게 나그네가 찾아왔는데, 부자는 자기 양이 아까워 가난한 사람의 암양을 잡아 그 나그네에게 대접하였다. 이 이야기를 들은 다윗은 그 부자에게 격분하며 나단에게 “주님께서 살아 계신 한, 그런 짓을 한 그 자는 죽어 마땅하다.”(2사무 12,5)고 말한다. 부자가 저지른 죄는 암양 하나를 빼앗은 것에 불과하지만, 그 암양을 빼앗으면서 부자가 보여 준 무자비함과 비열함이 너무 가증스러워 죽음의 형벌에 처함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다윗은 이 사실을 주님의 현존을 두고 맹세하였다.

 

다윗이 격분하여 부자를 단죄하는 말을 듣고 나단은 다윗에게 “임금님께서 바로 그 사람입니다.”(12,7) 하고 일깨워 준다. 어떻게 이 비열한 부자가 다윗이 된다는 말인가? 나단은 하나하나 풀어 설명하였다. 주님께서는 다윗을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우시고 그의 선임자 사울의 손에서 구해 주셨다. 그리고 사울 집안의 모든 사람을, 심지어 사울의 아내들까지도 그에게 넘겨 주셨다. 그리하여 다윗은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를 다 포함하는 통일 왕국을 차지한 막강하고 부유한 임금이 되었다. 이렇게 부족할 것이 하나도 없는 다윗이 이민족이지만 자기에게 온갖 충성을 다 바치는 헷족 용병 우리야의 아내와 간음하고 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하여 우리야를 교묘하고 악랄하게 살해하였다. 그런 다음 그의 아내를 자기 아내로 삼았다. 하느님께서는 나단의 입을 빌려 이 모든 일을 통하여 다윗이 그분을 무시하였다고 질타한다. 가난한 이가 애지중지하는 암양을 빼앗는 일이나 가난한 용병의 사랑스런 아내를 강탈하는 일은 하느님을 무시하는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희한한 사실은 똑같은 잘못을 남이 저지르면 곧바로 눈에 띄는 중대한 비난거리가 되고 내가 저지르면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대수롭게 여기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다윗처럼 현명하고 위대한 임금도 남의 비열하고 가증스러운 행동 안에서 자신의 죄를 전혀 발견하지 못한 것을 보면 우리 같은 범인들이야 오죽하겠는가!

 

주님께서는 다윗이 저지른 죄악에 대한 형벌로 그의 집안에 칼부림이 영원히 가시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이는 다윗이 헷 사람 우리야를 암몬 자손들의 칼로 죽였기 때문이다. 또 다윗의 아내들을 그의 이웃에게 넘겨주고 그의 이웃이 저 태양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다윗의 아내들과 잠자리를 같이 하리라고 선언하신다. 여기서 말하는 다윗의 이웃은 백주에 온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천막을 치고 그의 후궁들을 범한 그의 아들 압살롬을 가리킨다(16,22 참조). 11장 12절에서 나단이 한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진 셈이다.

 

나단의 추상 같은 고발과 형벌 선언을 다 들은 다윗은 나단에게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12,13) 하고 솔직하게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였다. 다윗의 죄 고백에는 아무런 군더더기가 없다. 이 깨끗한 고백 한 마디가 다윗을 죽음에서 건졌다. 죄악의 씨앗인 아들은 죽지만 다윗은 죄를 용서받고 죽지 않게 된다. 그러나 다윗의 죄 고백에는 한계가 있다. 그는 가난한 외국인 용병을 유린하여 가난한 이들의 후견인이신 주님을 무시하였다는 나단의 지적에 주님께 죄를 지었다고만 고백할 뿐, 자기가 죽인 우리야에게도 죄를 지었다고 고백하거나 그의 집안을 위한 어떠한 보상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4.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공동 번역, 루가 15,11-24)

 

‘탕자의 비유’로 널리 알려진 이 비유는 40여 가지가 되는 예수님의 비유들 가운데 백미(白眉)이다. 이 비유 전체에 관한 자세한 해설은 졸저 [놀라운 발견] 47-63면을 참조하기 바라고 여기서는 작은 아들의 고백과 이 고백을 듣고 보이는 아버지의 반응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겠다.

 

이 비유의 초점은 두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자비와 사랑이기 때문에비유의 제목을 ‘두 아들을 둔 아버지의 비유’로 바꾸는 것이 옳을 듯하다.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작은아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상속받아서 모두 처분하여 돈으로 바꾼 다음 먼 고장으로 떠났다. 본디 작은아들 몫은 큰아들의 반이니까 아버지 유산의 3분의 1을 넘겨 받은 것이다. 아버지 생존 시에는 아들이 상속 재산의 소유권만 넘겨받고 처분권은 행사할 수 없다. 여기서 처분권이라 하면 밭으로 된 재산을 팔 수 있는 권한을 말한다. 이런 규정도 아랑곳하지 않고 패륜아 같은 작은아들은 아버지가 살아 계신데도 밭을 처분한 돈을 모두 싸짊어지고 당시 한창 일어나고 있던 페니키아의 신흥 도시들 가운데 한 곳에 나가 사업을 시작하였던 것 같다. 젊은 나이에 사업 경험과 절제력이 부족한 그는 오래지 않아 가지고 간 돈을 모두 탕진하고 빈털털이가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그 지방에 흉년까지 들어 할 수 없이 어떤 집의 식객으로 들어갔는데, 주인은 그를 농장에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유다인들의 율법에 따르면 돼지는 부정한 짐승으로 취급하여 먹거나 기르는 것을 금지하였지만, 그는 지금 생존을 위하여 자신의 종교마저도 부정해야 할 처지에 빠진 것이다.

 

그날도 허기진 배를 안고 돼지를 치다가 돼지들이 쥐엄나무 열매를 맛있게 먹는 것을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돼지들과 더불어 먹이통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굶주림 때문에 가족과 종교는 물론 이제는 인간성마저 상실할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제서야 제정신이 든(아람어로 ‘제정신이 든’이라는 표현은 참회를 뜻함) 그는 이렇게 탄식조로 증얼거렸다.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많아서 그 많은 일꾼들이 먹고도 남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게 되었구나! 어서 아버지께 돌아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으니 저를 품꾼으로라도 써 주십시오 하고 사정해 보리라”(15,17-19). 이제 작은아들은 자신의 방탕한 생활과 재산 탕진이 ‘하늘과 아버지께 지은 죄’임을 깨달았다. 그는 아버지가 평생을 바쳐 모은 ‘재산’(12절과 30절에서 ‘생명, 삶’을 뜻하는 β?ο?로 나옴)을 탕진함으로써 아버지께 죄를 지었고,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과 부정한 짐승과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는 율법의 금령을 어김으로써 ‘하늘’(하느님께 대한 완곡어법)께 죄를 지은 것이다.

 

아버지의 삶을 먹어 치우고 아들의 자격을 잃어버린 그가 생존을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아버지에게 백배 사죄하고 그집 머슴이 되는 길뿐이다. 그렇게 하기로 굳게 다짐한 작은아들은 아버지 집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멀리서 그를 본 아버지는 양반의 채신도 잊은 채 허겁지겁 달려가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포옹은 애정의 표현이요 입맞춤은 용서의 표현이다. 아들은 수백 번도 더 마음속으로 되뇌던 사죄의 말을 시작하였다.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으니 …”(15,21). 그리스 말 본문은 여기서 아들의 말이 끊긴다. 아버지가 아들의 말을 막은 것이다. 그 대신 하인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꺼내어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발을 신겨 주라고 분부한다. 제일 좋은 옷은 고운 아마포 옷을 가리키는데, 임금이 공이 많은 신하에게 내리는 훈장과 같은 것이었다. 가락지는 문서에 서명할 인장이 새겨져 있었는데, 가락지를 끼워 줌으로써 아들의 지위를 다시 찾아 준다는 의미가 있다. 신발은 짐승 가죽으로 만든 샌들인데, 사치와 호사를 뜻한다. 아버지는 신명이 나서 외친다. “살진 송아지를 끌어 내다 잡아라. 먹고 즐기자! 죽었던 내 아들이 다시 살아 왔다.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았다”(15,23). 이 아버지에게는 자신의 삶을 다 먹어 치우고 돌아온 작은아들이 방탕한 패륜아가 아니라, 자신이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아들, 죽은 줄 알았다가 다시 살아 찾아온 귀한 아들이었다.

 

비유에 나오는 작은아들의 고백,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15,21)는 완전한 고백이다. 세상 안에서 인간이 저지르는 잘못은 언제나 양면성을 지닌다. 동료 인간이나 피조물을 해치는 죄악은 하느님께 짓는 죄요, 하느님께 반역하게 되면 그 피해가 인간과 피조물에게 직접 미치게 된다. 그런데 이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는 왜 작은아들이 지은 죄를 징벌하지 않는가? 앞의 세 경우에는 모두 하느님께서 형벌을 가볍게 해주셨을 망정 형벌을 완전히 거두지는 않으신 반면, 여기서는 아버지가 전혀 죄를 물으시거나 벌을 내리지 않으신다. 그것은 아들이 이미 자신이 저지른 잘못의 대가를 충분히 치렀기 때문이다. ‘아담’과 ‘카인’과 ‘다윗’의 경우에는 죄를 지은 바로 직후에 하느님께서 그들 앞에 나타나시어 죄를 추궁하시고 그 다음에 벌을 내리시지만, ‘작은아들’의 경우에는 먼저 제 잘못으로 자기 재산과 종교와 아들의 자격, 심지어 자신의 인간성마저 상실하여 이미 죽은 목숨과 다름없는 상태에서 아버지를 만났다. 그런 비참한 처지에 빠진 아들이 돌아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하고 고백하며 아들 자격이 없으니 품꾼으로 써 달라고 하니, 어찌 그 아버지가 죄를 따져 물어 벌을 내릴 수 있겠는가! 죽은 아들이 살아 돌아온 것만 해도 감지덕지할 뿐이다.

 

 

맺음말

 

오래된 라틴 말 격언대로 인간은 잘못하는 존재이다(Errare humanum est). 누구보다도 하느님께서 이 사실을 잘 아신다. 그분이 직접 비천한 재료에서 인간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창세기 저자가 갈파했듯이 땅의 먼지에서 난 인간(아담)은 ‘흙으로’(아다마흐) 돌아갈 존재이다. 아담과 하와는 이 사실을 잊고 하느님과 같아져 하느님의 손에서 벗어나려 하였다. 자신의 행복과 불행, 구원과 멸망을 하느님을 배제하고 스스로 결정하려 하였다. 그리고 그런 큰 죄를 짓고 나서 자기네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기는 커녕 하느님 앞에서 몸을 숨기고 비겁하게 다른 존재에게 책임을 전가시켰다. 그 결과 자기네 본래의 비참한 실존으로 다시 돌아가고 말았다.

 

살인의 기원을 이룬 카인의 형제 살해는 묘하게도 하느님의 호의를 다른 형제보다 더 많이 얻어 내려는 종교적 동기에서 출발하였다. 카인은 자기 동기를 죽인 다음, 그 죄를 물으시는 하느님께 ‘내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하고 잡아뗀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심을 깨닫고는 그분이 내리시는 형벌을 모면하려고 그분의 자비에 호소한다. 뻔뻔스럽지만 밉상은 아니다. 적어도 하느님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태도에 그분의 마음이 움직였을 법하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역대 임금들 가운데 가장 거룩하고 출중한 임금으로 추앙받았다. 그럼에도 치세 초기에 그가 저지른 바쎄바와의 간음과 그의 남편 우리야의 살해로 왕국 전체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게 되었다. 절대 권력 앞에서 힘없이 스러진 한 가난한 용병의 목숨을 하느님께서는 그냥 간과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우리야의 목숨을 빼앗은 것은 당신을 무시한 행위였다고 나단 예언자를 시켜 다윗의 은밀한 죄상을 폭로하시자, 다윗은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다.”고 자신의 죄를 깨끗하게 인정하고 고백한다. 그래서 그는 나단의 이야기를 듣다가 비열한 부자에게 자기가 미리 내린 선고대로 죽어야 마땅하였지만, 죽음의 징벌에서는 벗어난다. 그러나 죄악의 씨앗인 그의 아들은 죽고 그의 집안에 칼부림은 가실 날이 없게 된다. 한편, 다윗의 고백은 아직 불완전하다. 하느님께만 죄를 지었다고 생각할 뿐, 용병 우리야의 죽음에 대해서는 참회하거나 어떤 보상 조치도 취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두 아들을 둔 아버지’의 비유에 나오는 작은아들은 아버지의 삶을 먹어 치우고 방탕한 생활을 하다 인간성마저 상실한 채 아버지 집으로 다시 돌아와, 자기를 맞으러 달려온 아버지에게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하고 고백한다. 하느님과 인간에게 죄를 지었음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아버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참 고백이다. 이런 고백을 하는 이는 비록 죽은 것이나 다름 없는 비참한 삶 속에서도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를 얻게 될 것이다.

 

[사목, 1999년 4월호, 정태현(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총무/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