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하느님의 뜻은 성사이고, 모든 성사를 합친 것을 능가한다 - [하느님의 뜻이 영혼을 다스릴 때] 65. / 교회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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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병찬 [ jesus_maria ] | 작성일2022-03-06 | |||
'하느님의 뜻이 영혼을 다스릴 때'(교회인가) 는 '천상의 책'에서 '하느님의 뜻' 부분을 발췌한 것입니다. 예수님과 대화한 루이사 피카레타에 대해서는 매일 올리는 글 아래에 있습니다. 65 하느님의 뜻은 성사이고, 모든 성사를 합친 것을 능가한다. 1919년 12월 26일 1.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성사들마저 능가한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것일까?’ 내가 혼자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때에 예수님께서 내 안에서 걸음을 옮기시며 말씀하셨다.
2. “딸아, 성사들을 성사들이라고 부르는 까닭이 무엇이냐? 성스럽기 때문에, 은총과 거룩함을 줄 수 있는 가치와 힘이 있기 때문이 아니냐? 그러나 이 성사들은 사람의 내적 준비에 따라 작용한다. 그러므로 성사들이 자체 안에 지닌 은혜를 줄 수 없어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3. 그런데 나의 뜻은 신성하고 거룩하며 모든 성사들의 효력을 다 지니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나의 뜻은 자신 안에 지닌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영혼을 준비시킬 필요도 없다. 영혼이 나의 뜻을 행할 마음이 드는 순간부터 이미 스스로 준비된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4. 나의 뜻은 모든 것이 준비가 되어 있고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렇게 할 지향이 서 있는 것을 보면, 지체 없이 이 영혼과 통교하면서 이 뜻 안에 담긴 선을 쏟아 부어, 전례 없이 놀라운 인물을, 곧 하느님 뜻의 용사, 하느님 뜻의 순교자를 기른다.
5. 게다가 성사들이 하는 일은 바로 영혼을 하느님과 일치시키는 것이 아니냐? 그러면 나의 뜻을 행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이냐? 피조물의 뜻이 창조주의 뜻과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겠느냐?
6. 영혼이 영원하신 의지 안에 사라지는 것이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모든 것인 분에게로 올라가고 모든 것이신 분이 아무것도 아닌 것 속으로 내려오시는 것이 아니겠느냐?
7. 그러니 그것은 영혼이 할 수 있는 가장 고상하고, 가장 거룩하고, 가장 순수하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용감한 행위이다.
8. 아, 그렇다, 너에게 거듭 확언하거니와 나의 뜻은 성사이다. 모든 성사들을 합친 것을 능가하지만 더욱 놀라운 방식으로 그러하다. 어떤 사람의 중개도 필요 없고, 어떤 물적 요소도 개입되지 않는 것이다.
9. 이 나의 뜻 성사는 나의 뜻과 영혼의 뜻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두 뜻이 서로 한데 묶여 성사를 이루는 것이다. 나의 뜻이 생명이니 영혼은 이미 준비된 상태로 이 생명을 받고, 나의 뜻이 거룩하니 영혼은 거룩함을 받고, 나의 뜻이 강하니 영혼은 굳셈을 받고, 여타 모든 점에 대해서도 그러한 것이다.
10. 반면에 나의 다른 성사들은 영혼들을 준비시키기 위해 엄청 많은 일을 해야 한다. 용하게 효과를 거두는 성사가 되게 하려면 말이다! 내가 나의 교회에 맡긴 이 (은총의) 통로들이 얼마나 자주 악용되거나 업신여김을 받거나 유린되고 있는지!
11. 심지어 어떤 이들은 이 성사들로 스스로를 더럽히고, 나를 거슬러 모욕하기 위해서 이를 이용하기도 한다. 아, 네가 고해성사에서 저질러지는 엄청난 모독과 성체성사의 가공할 악용을 안다면, 그 큰 비통으로 말미암아 나와 함께 울게 될 것이다.
12. 아, 그렇다. 홀로 나의 뜻 성사만이 영광과 승리를 구가할 수 있다. 그 효과에 있어서 완전하고, 사람의 모욕을 겪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이 나의 뜻 안으로 들어오려면 그 자신의 뜻과 격정을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때에만 비로소 나의 뜻이 사람에게 내려와 에워싸고, 사람을 그 자신과 동화시켜 놀라운 인물로 만드는 것이다.
13. 이런 이유로 (사람의 뜻과 결합된) 나의 뜻에 관해서 말할 때 나는 축제 기분에 젖으며 결코 이것이 중단되지 않는다. 나의 기쁨은 완전하여, 나와 영혼 사이에 어떤 비통도 끼어들 수 없는 것이다.
14. 그러나 다른 성사들로 말하자면, 내 마음은 비통에 잠긴다. 내가 은총의 샘으로 준 이 성사들을 사람은 비통의 샘으로 변질시키기 때문이다.”
(65. 하느님의 뜻은 성사이고, 모든 성사를 합친 것을 능가한다. 끝) *~*~*~*~*~*~*~*~*~*~*~*~*~*~*~*~*~* 하느님의 뜻이 영혼을 다스릴 때 하느님의 뜻이 영혼을 다스리실 때 하느님의 종 루이사 피카레타의 “천상의 책”에서 발췌한 본문 - 하느님의 뜻의 영성을 이해하는데 입문의 역할을 함. 이 책을 제일 먼저 읽기를 권고함 지은이 : 루이사 피카레타(천주 성의의 작은 딸) 머리말 1 이 책은 루이사 피카레타의 저술을 알리기 위하여 그녀의 벗들이 여러 대목을 발췌하여 출판한 것입니다. 본인의 좋은 벗인 호세 루이스 아쿠냐에게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본인은 루이사의 저술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한층 더 아낌없는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받들게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루이사가 매우 열렬하고 심오하게 생활화한 마음가짐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 마리아께서 “피앗” 곧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고 말씀하셨을 때에 하느님께 바치신 마음가짐이기도 합니다. 같은 마음가짐으로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지극히 거룩한 수난을 받아들이며 실행하셨습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은 또한,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시며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을 때에, 우리도 기도와 생활을 통하여 배워 가지기를 원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이 예수님께서 당신의 성령을 통하여 많은 이들에게 온전히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고자 하는 열망을 서둘러 일으켜 주시기를 빕니다. 그들이 그분의 사랑 안에 뿌리를 박고 굳건히 결합해서 “머리이신 그리스도(에페 415)”를 향하여 모든 면에서 온전히 자라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1992년 11월 22일 멕시코의 아틀라코물코에서 리카르도 기사르 디아스 주교 머리말 2 그리하여 마침내 새벽이 밝아오다 1994년은 루이사의 시복 조사와 하느님 뜻의 나라의 개선에 있어서 특별히 중요한 해였습니다. (교황청) 신앙교리성이 루이사의 시복 조사를 시작하는 것에 아무런 이의가 없다는 것을 시성성에 통보한 것입니다. 확실한 것은 하느님의 섭리와 많은 이들의 기도 덕분에 그 자신의 생애와 증언으로 크나큰 관대함을 보여 준 루이사에게 교회가 결국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1994년 4월 3일 성토요일, 루이사가 살았던 트라니 교구의 대주교가 루이사의 시복 조사를 시작해도 좋다는 시성성의 통보를 받았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이후 수개월에 걸쳐 교회법에 의거한 조사위원회가 구성되어 소식을 공지하기 위한 준비 과정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결과, 1994년 11월 20일 그리스도왕 대축일에, 루이사가 세례성사를 받은 성당에서 카르멜로 카싸티 대주교가 시복 조사를 공식적으로 시작하려고 교구 법원의 명령서를 읽었으며, 여기서 루이사의 개인 유품이나 증언을 대주교 자신이나 루이사의 저서들을 담당하고 있는 시복 조사 청원자 (몬시뇰 펠리체 포사 - 역주)에게 제출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 대주교는 다음과 같이 훌륭한 표현을 쓰면서 루이사에 대하여 언급했습니다. “… 사랑과 아낌없는 마음씨로 자기 자신을 봉헌한 루이사는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면서 60여 년 동안 침상에서만 생활했으니, 그야말로 산 제물이 된 영혼이었습니다. 우리는 오직 루이사의 십자가의 빛 안에서 그녀가 자기 자신을 봉헌한 영적 상황 속으로 들어갈 때만 그 가르침과 메시지를 왜곡하거나 경박한 철학 작품으로 바꾸거나 혹은 중대한 교의적 오류와 행위로 변질시키거나 수정하지 않고 올바르게 통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어머니인 성교회가 드디어 교회의 나무 열매를 알고 맛보려고 손에 쥐기 시작했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시다. 이는 (세상에 있는 하느님의 나라인 교회)의 맏물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위에 서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저 발! 평화를 선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며 구원을 선포하는구나・・・・ 들어 보아라. 너의 파수꾼들이 목소리를 높인다. 다 함께 환성을 올린다.”(이사 52,7-8) 파블로 마틴 신부 루이사 피카레타에 관하여 하느님께서는 이따금 인류의 제반사에 더없이 거대하고 보편적인 변화를 일으키기를 원하십니다. 이러한 사건이 일어날 때에, 고유한 모양으로 이 변화와 행동을 같이하는 매우 특별한 사람들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하느님의 통상적인 방식입니다. 한처음, 천지창조의 결정으로 인류가 생겨나기 시작했을 때에, 아담과 하와는 최초의 인간으로 뽑혀 시간 속에 들어오게 되었고, 그들은 자연계에서 우리의 원조가 되었습니다. 그 후에, 인류가 너무나 깊이 죄악에 빠져 있었으므로 하느님께서 대홍수를 내리시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노아를 택하시어 방주를 짓게 하시어, 그 가공할 변화를 겪은 이후 살아남을 극소수의 사람들을 데리고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또 선택된 백성인 유다인들을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오고자 하셨을 때도 그분께서는 모세를 택하셨고, 그를 통하여 우리에게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많은 세월이 흐른 후 인류 구속의 결정이 이루어지자, 하느님 아버지의 외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지극히 깨끗하신 동정 마리아의 태중에 강생하셨습니다. 마리아께서는 ‘하느님의 어머니’요 ‘구속주의 어머니’가 되시어 예수님의 인류 구속 사업에 온전히 협력하셨습니다. 이제 그리스도교 신앙이 선포된 지 이천년이 되어 가는 오늘날, 인류는 또다시 타락하여 매우 불결한 죄악의 상태 속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손에 의하여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리라는 징조를 어디서든지 볼 수 있습니다. 대정화가 임박해 있는 것 같고, 그리하여 이 땅에 바야흐로 ‘새 시대’가 시작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새로운 시대는 정화를 통한 성화의 결정이 실현되는 것으로서,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 아버지께,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고 기원하신 ‘주님의 기도’가 이루어질 시대입니다. 이 새로운 시대를 여시려고 성삼위께서는 또 하나의 아주 특별한 사람을 택하셨으니, 그것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뜻이 어떻게 하늘에서 이루어지는지를 보여 주셔서 우리도 하느님의 뜻을 선물로 받고 여기 땅에서도 그 사람과 같이 지극히 숭고하게 그분의 뜻을 이루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특별한 사람의 이름이 다름아닌 루이사 피카레타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루이사에게 그녀 특유의 사명에 적합한 명칭을 많이 지어 주셨는데, 그 가운데는 “하느님 뜻의 나라의 사도”, “빛의 자녀의 둘째 세대의 맏이”, “예수님의 비서요 대서인(代書人)”, “하느님의 뜻 안에 갓 태어난 아기”, “지극히 숭고한 지식을 가진 교사”, 그리고 “하느님 뜻의 작은 딸” 등이 있습니다. 이 마지막 이름이 현재 이탈리아 코라토의 산타 마리아 그레카 성당에 안치되어 있는 그녀의 묘비에 새겨져 있습니다. 루이사는 하느님 뜻의 나라를 알리는 사람으로서 우리 아버지께서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시게 될 새 시대를 열기 위하여 ‘탁월하게’ 일한 선구자였습니다. 아무런 음식을 취하지 않고 잠도 거의 자지 않은 채 64년 동안 침상에서만 생활했던 그녀는 초등 교육밖에 받지 못했지만, 예수님께서 날마다 오셔서 하느님과 하느님의 거룩한 뜻에 관한 지고한 신비로 루이사의 정신을 비추어 주셨고, 루이사는 이를 충실히 받아썼습니다. 이는 루이사가 그녀의 고해사제로 임명된 사제를 통하여 대주교의 명에 오직 순명하기 위해서 40여 년 동안 쓴 글들로서, 무려 36권에 달하는 책이 되었습니다. 이 책은 주님께서 친히 붙이신 다음의 제목으로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 가운데 이루어질 하느님 뜻의 나라 천상의 책 사람들로 하여금 질서와 그 본연의 위치와 창조된 목적에로 돌아오게 하시는 부르심” 토마스 M. 페히 간략한 해설 ‘가톨릭교회 교리서’ 521항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리스도께서 살며 겪으신 모든 것은 우리를 당신 안에서 그대로 살게 하고 그분이 우리 안에서 그것을 살게 한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니, 곧 그리스도께서 몸소 살며 겪으신 것을 우리가 그분 안에서 살고, 그분도 우리 안에서 그것을 살도록 해 드리는 것이다. 여타 모든 것 - 성사들과 기도와 단식과 극기와 속죄 - 은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이 별로 효과가 없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들의 풍요성을 온전히 개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루이사의 저술들은 우리를 이끌어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거듭 살도록 한다. 그것은 이 책들이 예수님의 내적 생명에 대하여, 곧 예수님께서 당신의 신적인 뜻과 인간적인 뜻을 어떻게 결합하여 참 하느님이시며 참 사람으로 활동하셨는지, 그분 안의 모든 것이 어떻게 그분의 신적인 뜻 안에서 살며 완성되었는지를 우리에게 알려 주기 때문이다. 또한 그분의 신적인 뜻이 인간적인 뜻과 함께 활동하면서 그분의 모든 행위를 맡아 보관하는 수탁자가 되었다는 것, 따라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것은 그분의 신적인 뜻 안에 - 그분의 신적인 의지 작용 안에 - 남아 있으면서 우리가 이 신적인 뜻 안에 살면서 그분께서 당신 생애를 통하여 행하신 모든 행적을 찾아내어 그것이 우리의 생명이 되고 우리의 각 행위 전체의 생명이 되도록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이 책들 안에서 그분의 신적이고 인간적인 내적 활동을 나타내 보이시어, 우리가 그분께서 살며 겪으신 것을 더욱 깊이 알고 통찰하게 해 주신다. 우리가 알게 됨으로써 그것을 원하며 우리 자신도 그대로 살 수 있게 하시기 위함이다. 예컨대, 이 대목을 보자. “딸아, 내 뜻 안에서 사는 영혼의 참 생명이란 나의 생명 안에서 그 자신의 생명을 이루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행하는 모든 것에 나의 모상을 부여하는 것이다. 나는 내적이고 외적인 행위 전체를 오직 나의 신적인 뜻 안에 날아오르게 했다. 내 정신의 모든 생각이 사람들의 모든 생각 위를 날면서 그 지성에 관을 씌워 내 아버지의 엄위로우신 옥좌 앞으로 공경과 흠숭과 영광과 사랑 및 모든 인간의 생각에 대한 보상을 가지고 날아올랐던 것이다. 나의 눈길, 말, 동작, 심장 박동, 발걸음과 다른 모든 것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그러니 그 영혼이 나의 뜻 안에서 살려면 자기 자신에게 내 정신의 활동을 주고, 나의 눈길, 나의 말, 나의 동작, 나의 심장 박동, 나의 발걸음을 그대로 주어야 한다. 이와 같이 하면 자기 자신의 모습을 벗어나서 나의 모습을 띠게 된다. 그것은 바로 자기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죽고 그 안에 있는 하느님의 뜻에는 끊임없이 생기를 불어넣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의 생명이 이 생명 안에 포함된 모든 부요함과 함 께, 나의 모든 방식, 나의 공로, 나와 같은 거룩함과 나와 같은 능력과 함께, 그 영혼 안에서 거듭 살게 되는 것이다. 오직 영혼 안에 살아 있는 나의 뜻만이 그 영혼과 그의 행위들 안에 내 행위들의 모든 선과 생명을 심어 줄 수 있고, 그와 더불어 오직 하나의 일을 하며, 오직 하나의 생명을, 곧 그 영혼 안의 내 생명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살며 겪으신 것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그만큼 더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당신 생명을 살기를 원하게 되고, 그분께서도 당신께서 살며 겪으신 것을 우리가 수용할 수 있는 한 온전히 우리 안에서 살 수 있게 되신다. 또한, 우리가 이 하느님의 생명을 우리 안에 이루려면 신적인 모성이 필요하다. 즉 동정 성모님께서 당신의 사명과 모성적인 임무를 감안하셔서 우리가 참으로 “강생하신 ‘말씀’과 닮은 모습”이 되기까지 그 생명을 기르며 완전히 성숙시켜 주셔야 한다. 이 모든 것이, 본질적으로 위대하고 뛰어난 이 저술들의 주제이다. 호세 루이스 아쿠냐 R. 루이사 피카레타에 관한 더 상세한 소개 …· 루이사는 82세까지 이 땅에서 살았지만, 그 중 64년을 “세상에서 가장 작은 수방(=독방)”인 그녀의 침상에서 지냈다. 침대 둘레와 위쪽에 밝은 색의 쇠붙이 구조물이 있고 거기에 커튼이 달려 있어서 이 커튼을 내리면 넓이가 2㎡ 될까 말까 한 독방이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루이사와 그녀의 사랑이신 예수님께는 넉넉한 공간이었으니 예수님께서 거의 매일 찾아오셔서 그녀의 내적 인간 전체가 당신을 닮아가도록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뿐만 아니라 “엄마” - 루이사는 성모님을 그렇게 불렀다 - 를 위한 공간이기도 하였다.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녀께서도 루이사가 예수님의 내면과 당신 자신의 내면을 온전히 본받게 하시려고 자주 방문하셨던 것이다. 루이사는 끊임없이 “귀부인 순명”의 지배하에 있었다. 언제나 묵묵히 이 “귀부인”에게 순종했는데, 그것은 그녀의 고해사제의 명령에 대한 순명이었지만, 고해사제는 주교에 의해 임명되었으므로) 결국은 주교에게서 비롯되는 명령이었다. 우리 주님께서 개입하셔서 의심할 여지가 없도록 결정적으로 루이사의 자리를 잡아 주셨으니, 그것은 보속의 산 제물이라는 신분이었다. 콜레라의 만연으로 코라토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죽은 1886년에 이 전염병이 루이사로 하여금 산 제물의 신분을 받아들이게 한 도구가 되었다. 예수님께서 이 재난이 중단되도록 고통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셨는데, 루이사가 이를 받아들여 사흘간 고통을 겪고 나자 몇 달 동안 계속되었던 콜레라가 사라졌던 것이다. 루이사가 21세가 되었을 때, 새로 임명된 고해사제인 미켈레 데 베네딕티스 신부는 그녀의 영을 알고 시험하고 분별하기 위해서, 만일 고통을 받고자 한다면 반드시 (그의 명령에 대한) 순명의 행위로 그렇게 할 것을 첫째 요건으로 정해 주었다. 한 해가 지난 후,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고통 중의 그녀 자신을 봉헌하라고 하셨다. 그런데 이 고통은 이전처럼 때때로 중단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것이 될 터였다. 그녀의 모든 고통은 진노하신 하느님의 정의에 보상을 바침으로써 인간에게 떨어질 많은 징벌을 피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는 갈수록 사악해지는 인류가 받아 마땅한 징벌이요, 그것도 임박한 징벌이었다. 루이사는 고해사제에게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원하시는 바를 알리면서 “당분간” 고통을 받을 수 있도록 명령을 내려 달라고 청하였다. 그 당시 루이사는 그 고통의 기간을 40일로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고해사제가 이를 허락하자, 그 때부터 루이사는 줄곧 침대에서 지내게 되었는데, 그래도 병에 걸리거나 욕창(蓐瘡)으로 고생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녀가 임상적인 병에 걸려 고통을 당한 것은 오직 임종 무렵뿐이었다. 1947년 3월 4일, 폐렴에 걸린 지 보름 만에 숨을 거두었던 것이다. 어쨌든, 이 (지속적인) 산 제물의 상태는 일련의 독특한 은총들을 받게 되는 새로운 시작이었다. 예수님께서 매우 자주 찾아오셔서 ‘신비적인 혼인’을 준비시키시면서 그녀가 하느님의 뜻에 완전히 일치하도록 이끄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또 십자가와의 결합과 같은 다른 신비적인 결합들을 위하여 그녀를 끊임없이 준비시키셨다. 그리고 어느 날 아침, 그분께서는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히신 구세주의 모습으로 나타내 보이시면서 당신 수난의 가장 고통스러운 상처들을 그녀에게 박아 주셨다. 그러나 그녀의 소망대로 곁으로는 그 성흔(聖痕)이 전연 보이지 않게 해 주셨다. 그 때부터 루이사는 예수님께서 그녀 안에 새롭게 재현하시는 십자가 고통을 받게 되었다. 고통에 대한 만족할 줄 모르는 열망에 시달린 루이사는 몇 년이 지난 후에 자신의 그 모든 바람까지 하느님의 뜻에 맡겨야 한다는 것을 배워 익혔다. 고통을 받고자 하는 소망 외에도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 싶은 소망도 있었던 것이다. 1899년에 고해사제가 세상을 떠난 후 새 고해사제인 젠나로 디 젠나로 신부가 루이사를 돌보는 책임을 맡게 되었고, 그것이 24년 동안 계속되었다. 젠나로 신부는 루이사를 순명의 지배 아래 두면서 최초의 명령으로 그녀와 예수님 사이에 일어난 일을 처음부터 전부 글로 옮기라고 하였다. 그래서 루이사는 1899년 2월부터 글쓰기에 들어갔다. 예수님께서는 루이사의 숭고한 사명을 위한 준비를 계속하셨는데, 그것은 가장 큰 은총이며 탁월한 상태인 ‘하느님 뜻 안에서 사는 것’이었다. 그분께서 이에 대해 처음 말씀하신 것은 1889년이었으며, 은총 중의 은총인 이 은총을 루이사에게 주시면서 “하느님 뜻의 작은 딸”이라는 이름도 지어 주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 주님께서는 조용하고 은밀하게, 루이사와 더불어, 새로운 ‘은총의 시대’를 열기 시작하셨다. 이는 곧 세상에 하느님 뜻의 나라가 참으로 오심으로써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Fiat Voluntas Tua, Sicut In Coelo Et In Terra)라고 하신 ‘주님의 기도’가 실현될 시대이다. 루이사는 글쓰기를 계속하여 하느님의 뜻 안에서 사는 것에 관한 가르침을 주제로 36권의 책을 썼고, 뿐만 아니라 1915년에 초관을 내고 1916년, 1917년, 1921년 및 1932년에 중간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시간들”과 1932년에 출간하여 1933년과 1937년에 중간한 “하느님 뜻의 나라의 동정 마리아”와 같은 다른 책들도 썼다. 이는 모두 교회의 출판인가와 오류 없음의 판정을 받은 책들이었다. 순명으로 그녀에게 글을 쓰게 한 명령이 마침내 거두어진 것은, 제36권의 마지막 장을 완료한 1938년 12월 28일의 일이었다. 젠나로 신부는 1922년에 세상을 떠났고 그 후임은 프란체스코 데 베네딕투스 신부였는데 수년 후인 1926년에 숨을 거두었다. 그녀의 대주교가 임명한 마지막 고해사제인 베네뎃토 칼비 신부는 그녀가 죽을 때까지 고해사제로 있었다. 끝으로, 루이사는 짧지만 고통이 심한 폐렴을 앓다가 1947년 3월 4일 새벽 여섯 시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시신은 나흘 동안 공적인 공경을 받았다. 그 후 루이사의 고향인 코라토가 소속된 트라니 대교구와 다른 지역으로부터 많은 대표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장례식이 엄수되었으니, 이것이 그녀가 받은 최초의 영예였다. 그 당시에 찍힌 여러 사진들이 이 사실을 입증해 주거니와, 루이사의 유해는 현재, 교회의 인가에 따라, 코라토의 산타 마리아 그레카 성당에 안장되어 있다. 그러면, 루이사는 어떻게 일상생활을 하며 지냈겠는가? 이에 대해서 그녀의 마지막 고해사제인 베네뎃토 칼비 신부는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겼다. 1. 루이사 생애의 특별한 현상들 새벽 여섯 시경에 고해사제가 루이사에게 도착해 보면, 루이사는 마치 대리석 덩어리처럼 굳어 있었다. 얼마나 단단히 굳어 있는지, 게다가 얼마나 무거운지, 루이사의 여동생이나 집안의 다른 사람이 고해사제나 주교의 명에 따라 루이사를 평상시 자세대로 침대 위에 앉히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마치 큰 납덩어리 같이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어서 팔다리를 펼 수도 없었던 것이다. 다만 고해사제가 (혹은 특별한 사정이 있을 경우, 다른 어느 사제가 강복하면서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손 등에 십자성호를 그어 줄 때만 비로소 생기가 돌아오며 몸의 동작도 회복되곤 했다. 그렇게 해야 되살아나서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동생으로 하여금 여느 때와 다름없는 자세로 자기를 앉히기 쉽게 해 주는 것이었다. 다른 특별한 현상은 (이미 지적한 대로) 64년 동안을 오직 침상에서만 지냈는데도 욕창으로 고생한 적이 전연 없었다는 점이다. 또 하나의 특별한 사실은 그녀의 식사였다. 조금만 먹어도 고스란히 토하곤 했기 때문에 침대에 붙박이게 된 때로부터 64년 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결국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산 셈이니, 그녀의 음식은 다만 하느님의 뜻과 성체 예수님뿐이었다. 이러한 현상들과 다른 특별한 현상들이 목격되자 철저한 통제를 받았다. 더군다나, 우리 교구의 장상들이 임명한 적지 않은 수의 박사와 교수들이, 곧 교의와 윤리와 수덕신비신학 교수들이 판단을 내리기 위하여 그녀를 철저히 검사하기도 하였다. 그들 중 두 사람만 지적해 보면, 한 사람은 로마 (성 안토니오) 국제대학교의 생리학 및 의학교수인 도메니코 프란체, O.F.M. 박사였으며, 또 한 사람은 (같은 대학교의) 윤리와 수덕신비신학 등의 교수인 콘살보 발스 박사였다. 이와 같이 루이사를 (그 죽음 같은 상태에서) 깨운 고해사제나 다른 사제는 그 다음에 그녀의 조그만 방 침상 옆에서 거룩한 미사를 집전하였다. 루이사는 영성체를 하고 나면 마치 잠자는 것처럼 황홀경에 잠겨 주님과 두 세 시간 친밀한 대화를 나누곤 하였다. 이때는 몸이 경직되거나 감각이 없는 상태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복되신 주님께서 더욱 눈에 띠는 방식으로 낮 동안 그녀와 함께 계시는 일이 잦았으므로 주변인들도 그것을 목격하곤 하였다. 의식이 돌아오면 그녀는 침대에 앉은 채 일을 시작했다. 그것은 레이스를 뜨거나 붙이면서 수예품을 만드는 일이었는데, 주로 장식품이나 테이블보였고 성당에서 쓰이는 다른 품목들도 있었다. 루이사는 날마다 그녀 주위에 모이는 몇몇 소녀들과 아이들에게 그 수예품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곤 하였다. 그러나 이 일보다 훨씬 더 그들을 끌어당긴 것은 하느님의 현존에서 발산하는 루이사의 부드러우면서도 자연스러운 매력이었다. 그들은 루이사가 늘 해 왔던 것처럼 “수난의 시간들”을 그녀와 함께 묵상하며 기도하는 것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여기에 모이는 소녀들 가운데 다수는 “수난의 시간들”을 외울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보속의 성시간을 가졌고 다른 신심업도 행하였다. 루이사의 생활은 이처럼 겉보기에 언제나 같은 것이었으니, 곧 일과 침묵과 기도의 생활이었다. 오후 두 시 반이나 세 시가 되면 그들은 루이사에게 약간의 음식을 주었지만, 이미 언급한 대로 그녀는 잠시 후에 그것을 고스란히 토했으며, 이 용도로 쓰이는 그릇이 따로 정해져 있었다. 오후에 그녀는 보통 한 시간의 묵상기도를 바쳤다. 그들은 커튼을 내려 침대를 둘러싸게 한 다음 그녀를 홀로 남겨두거나, 때로는 그녀에게 찾아오신 천상 여왕님과 함께 있게 하고 방을 나갔다. 그런 다음 루이사는 저녁 열 시나 열한 시까지 일을 계속하였고, 그 이후에 글을 쓰곤 하였다. 주님께서 어떤 것을 나타내 보이시거나 말씀을 주신 것이 낮 동안이었건 밤에 잠들어 있었을 때였건, 아니면 쓰라는 명을 받은 때였건 이 시간에는 언제나 글을 쓴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정이나 새벽 한 시경이 되면 침대에 누워 그 “죽음”의 상태에 들어갔고, 그러면 감각 기능이 마비되는 것이었다. 침대에 미처 드러눕기 전에 이 상태가 오면, 앉아 있었던 자세대로 석상처럼 굳어 있는 것이었다. 루이사의 나날은 그렇게 지나가곤 하였다. 이제 안니발레 마리아 디 프란치아 신부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자. 그는 17년 남짓 루이사와 알고 지냈지만 그녀의 특별 고해사제가 되어 가까이서 접촉한 지 2년이 채 안된 1927년에 세상을 떠났다. 프란치아 신부는 루이사의 삶과 저술 및 하느님의 뜻에 관한 가르침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므로 “수난의 시간들”을 출판하였다. 그가 코라토에 온 것은 1910년이었고, 이때부터 루이사를 방문하기 시작하면서 특별한 영적 관계를 맺게 되었다. 루이사와의 만남이 그의 삶에 헤아릴 수 없는 변화를 일으켰으며, 하느님의 뜻에 관한 지식이 그의 영성에 근본적인 바탕을 이루게 되었다. 트라니 교구 대주교는 루이사의 저술들과 관련된 출판을 지도하도록 프란치아 신부를 교구의 교회서적 검열관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수난의 시간들”을 출판하기 위하여 모든 힘을 쏟았고, 그 책에 긴 해설문을 직접 붙이기도 했으며, 넷째 판까지 모두 교회 인가와 오류 없음의 확인을 얻었다. 교구 검열관인 그는 또 루이사가 쓴 전반 열아홉 권의 책들에 대해서도 교회 인가를 얻어 내었다. 디 프란치아 신부가 루이사에 대하여 남긴 다음의 증언을 주목해 보자. 『…· 루이사는 홀로 숨어 지내며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친히 의무를 지우지 않으셨다면,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 또 앞으로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지만 - 흠숭하올 예수님과 사적으로 지속된 장기간의 통교 내용을 결코 글로 옮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의무는 어떤 때는 주님께로부터 직접 부과되는 것이었고 또 다른 때는 루이사의 영적 지도자들로부터 거룩한 순명의 이름으로 오는 것이었습니다. 루이사는 이 순명이 엄청난 고통을 불러일으킬 때에도 굳건하고 아낌없는 마음으로 복종해 왔습니다. 그녀의 순명은 절대적인 것이어서 만일 그렇게 하라는 명령만 있다면 천국마저 거절할 정도입니다. 이것은 고결하고 참되고 검증된 영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입니다. 그녀는 지금까지 40년 동안 내적으로 투쟁하면서 그 “귀부인 순명”의 지배를 받아 온 것입니다. 이 고독한 영혼은 온전히 하느님께만 속한 극히 순결한 동정녀로서, 우리의 거룩하신 구원자 예수님의 특별한 총애를 받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당신 사랑의 기적을 증가시켜 오신 주님께서 이 동정녀를 도구로 쓰시고자 하신 것 같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고 가장 배운 것이 없는 루이사를 부르셨으니 말입니다. 더욱이, 주님께서는 그녀를 숭고한 사명에 맞갖은 도구가 되도록 기르고자 하셨으니 다른 누구의 사명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그 숭고한 사명은 바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하신 ‘주님의 기도’처럼 하느님 뜻의 승리가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주님의 이 동정녀는 소녀 시절부터 지금껏 하느님 사랑의 산 제물이 되어 40년 이상 침상에 붙박여 있었습니다. 그 동안 예수 성심의 영원한 사랑 안에서 더없이 큰 기쁨에 잠겨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자연적이고 초자연적인 광범위한 고통을 체험했습니다. 모든 한계를 뛰어넘는 그 고통은 예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었고 때때로 중단되기도 했지만 지속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몸의 고통에다 영혼의 고통까지 겪었습니다. 몸의 모든 고통은 손발과 옆구리, 혹은 이마에 보이지 않는 성흔을 받은 신비스러운 상태에서 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로부터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통을 자주 받았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와 같은 고통을 허락하지 않으시면, 그것이 월등 더 큰 영적 고통이 되곤 했던 것입니다. 이는 그녀가 진실로 고결한 영혼임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표입니다····. 이처럼 장기간에 걸쳐 침상에서만 계속 생활하는 산 제물의 상태로 영적이고 육체적인 수많은 고통에 참여해 온 루이사에 대해서 상세히 언급하면, 이 이름 없는 동정녀를 보는 것이 괴롭고 혼란스러울지도 모릅니다. 고통스러운 병증 때문에 침대에 누워 있기만 하는 사람을 보는 것 같을 테니 말입니다. 그렇지만 루이사의 경우에는 또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이 정배가 낮 동안 침상에 앉아서 수예품을 만들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온갖 극단적인 고통을 겪으면서 밤을 지낸 사람이라는 것을 내비치는 단서가 조금도 없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특별하거나 초자연적인 어떤 표시도 도무지 없습니다. 오히려 건강하고 기쁘고 행복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으로 자기가 맞아들인 몇 사람의 벗들과 이야기를 하거나 생각에 잠기거나 때로는 웃기도 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한 가지만 더 지적해 보면, 예수님의 이 정배는 현세적이라기보다는 천상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녀의 소망은 알려지지 않은 무지한 사람으로서 예수님과 그분의 복되신 어머니 - 그녀를 특별히 보호해 오신 어머니 - 외에는 아무도 찾지 않으며 이 세상을 통과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필자는 이것이 근거가 확실한 증언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루이사를 매우 잘 알고 있었고 큰 열성으로 “수난의 시간들” 거듭거듭 출판했던 디 프란치아 신부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하여 1990년 10 월 7일에 시복되었고 2004년 5월 16일에 시성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프란치아 신부는 우리 시대의 사제들을 위한 모범으로 공표되고 칭송되었다. 2. 루이사의 저술들 루이사를 알았던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듯이, 필자도 그녀의 생애에 관한 수없이 많고 놀랍고 특별한 일화들을 자세히 소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화들을 서술하는 것은 그녀의 생애를 신심 깊고 교훈적이며 기적적인 일련의 삽화들로 만들어 버릴 위험이 있다. 루이사에 대해서 가장 중요한 것, 그녀를 다른 모든 사람과 구별하게 하는 것, 곧 그녀의 사명을 뒷전으로 밀어 둘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루이사는 어떤 사람이었으며, 삶을 통해 무엇을 성취했는가? 그녀의 사명은 무엇이었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놀라운 대답은 바로 그녀가 쓴 글들 속에 있다. 루이사를 그녀의 저술과 별도로 떼어놓고 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 말이다. 그것은 그녀의 내적 삶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우리에게 알려 줄 뿐만 아니 라, 우리를 그녀의 생명을 이룬 지식에 이르도록 한다. 이 지식이 다름 아닌 하느님 뜻의 생명에 관한 지식이다. 그러나 우리가 루이사의 글을 읽으며 경탄하기 전에, 앞에서 언급한 두 사제, 즉 도메니코 프란체 신부와 콘살보 발스 신부의 증언을 소개하는 것이 좋겠다. 다음은 도메니코 프란체 신부의 증언이다: 「친애하는 신부님, 일 년쯤 전인 지난해 9월에 신부님께서 어떤 신뢰할 만한 사람 편으로 저에게 [하느님 뜻의 나라 안에서] (한 영혼의 이야기, 1부, 밝아 오는 새벽)이라는 제명의 책 두 부를 보내 주시면서, 저자가 익명으로 출간되기를 원한 이 책에 대해서 판단을 내려 달라고 하셨습니다. 존경하는 신부님, 신부님께서 아시다시피, 저는 단지 이 책을 읽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어서 저자를 직접 만나기를 원했는데, 그것은 더 정확한 평가를 내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또한, 책을 읽고 저자를 만난 후에도 저 자신만의 판단에 그치지 않고 능력이 있는 동료 적임자 몇 사람의 의견을 구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증언 중의 하나를 동봉하려고 합니다. 이는 저와 같이 성 안토니오 국제대학교에서 봉직하고 있는 신학 교수 콘살보 발스 신부의 의견입니다. 그는 현재 우리 책들의 교열(校閱) 책임을 맡고 있거니와 이 편지 뒤에 그의 증언을 붙여 넣겠습니다. 사실, 이 책 전체를 읽을 시간이 없거나 그럴 뜻이 없는 사람들도 내용 목차를 일별하면, 완덕으로 나아가도록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 영혼이 (모든 집착으로부터의) 이탈과 자기 소멸의 길을 통하여, 또 유혹과 시련들 - 이 시련들 중 가장 혹독한 한 가지는 현재까지 46년 이상이나 지속되고 있습니다. - 을 통하여 얼마나 점진적으로 향상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우선 의사로서, 그토록 오랜 기간 꼼짝없이 침상에서만 지내야 했던 환자에게서 욕창이나 피부 염증을 보지 못했으니 단지 놀라울 따름입니다. 또 저는 신앙 문제를 심사하는 조사자로서 매우 큰 위안을 느끼고 있습니다. 의사들과 고해사제들과 대주교들이 여러 해에 걸쳐 철저한 조사를 했지만 그 누구도 아무런 속임수를 찾아내지 못했다는 확신을 얻었으니 말입니다. 끝으로 저는 사제로서 기쁨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 환자에게서 그리스도교적 덕행의 모든 고결함뿐만 아니라, 특별한 은총의 비추임을 받아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영혼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이 영혼을 정화하시어 다른 사람들을 위한 자비의 도구가 되게 하시려고 그녀 안에서 행하고 계신 듯한 모든 것과 함께, 저는 이 저술 안에서 그녀의 존재 의의라고 할 수 있는 중심 주제를 봅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뜻입니다. 이 가련한 환자는 모든 사람에게 그들 자신의 뜻은 악이라는 것과, 모든 인간의 뜻에 공통적인 악이 죄인 것처럼 모든 죄인들에게 모든 보편적인 치유제가 바로 하느님의 거룩한 뜻이 인간 뜻의 생명이 되는 것임을 깨닫도록 호소합니다. 이 책이 독자에게 하느님과 하느님의 거룩하신 뜻의 권리를 일깨우면서 그분의 지고한 권능이 모든 인간의 뜻과 이 하찮은 세상의 권세나 나라들 위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면, 영혼들의 선익을 위해 이미 큰 공헌을 한 것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존경하는 신부님, 사제이며 의사인 저의 판단으로는, 오직 그런 고통을 감수한 영만이, 아직도 계속 감수하고 있는 영만이, 그리고 하느님의 뜻 안에 녹아든 인간의 뜻만이, 이 영혼이 드러내는 것과 같은 중요하고 근본적인 개념에 도달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학교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한 채 홀로 그 숱한 고통을 겪으며 침상에만 붙들려 있는 이 사람이, 따라서 문학이나 신학, 또는 수덕에 관한 지식이 극도로 제한된 상태에 있는 사람이 이해하기에 극히 까다로운 주제에 관해서 참된 능력을 가지고 말하고 있고, 극히 난해한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주고 있으며, 그의 글을 읽는 독자들의 영혼을 더없이 향기로운 덕행의 영역으로 데려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제가 이 환자에게 실행한 신체적, 정신물리학적, 윤리적 테스트에 대해 상술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저는 내심으로 확신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세속적인 쾌락이나 무절제와 절연하고 65년을 살아 온 끝에 이 글을 쓰고 있는 제가 재천명하는 확신입니다. 그것은 신부님께서 저에게 주신 이 책이 사람들에게 보급되기만 하면 크나큰 선을 이룰 수 있으리라는 확신입니다. 올곧고 유덕한 영이 (주님의 말씀을) 받아쓴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잊지 못할 기회를 주신 신부님께 감사드리며 신부님의 힘 있는 기도를 간청합니다. 1931년 7월 20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 안토니오 국제대학교 생리학 및 선교 의학교수 교황청 선교 협회 명예 회원, 외과 의사 도메니코 프란체 신부 다음은 프란체 신부가 위의 편지에서 언급한 발스 신부의 의견서다. (그는 프란체 신부와 같은 대학의 교의신학 등의 교수로서) 1931년 7월 18일에 이 글을 프란체 신부에게 보냈고, 프란체 신부는 이를 자기의 편지와 동봉하여 팔마 신부에게 부친 것이다. 여기서는 지면 관계로 그 긴 증언의 요지만 옮기기로 한다. 존경하는 신부님, 저는 [하느님 뜻의 나라 안에서] 라는 책을 읽고 연구했습니다. 그 중 다음 몇 가지 점에 대하여 깊이 생각한 끝에 말씀드립니다. 1) 교의에 관하여 저는 이 책이 성교회의 가르침과 계시의 출처에 나타나 있는 가르침과 완전히 일치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어떤 교의 문제에 대해 지나가는 말로 언급할 때도 그렇습니다. (그 다음에는 일련의 분석과 주석이 이어지는데, 이를테면 “숭고하고 놀라운 신학적 정확성...”, “결코 반복되지 않으면서도 새롭고 훌륭한 관점들이 한 순간도 신앙진리에서 벗어나지 않고 제시되어 있습니다.” 등이다. - 필자 주) 때때로 설명이 필요한 특수한 개념들과 불분명한 표현들이 여기저기에 보이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한 것들에 대하여 더 깊이 숙고해 보면 첫눈에 느껴지던 부조화가 사라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 친히 이 영혼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터무니없는 글을 쓰게 될까 두려워하는 그녀를 안심시켜 주시면서 말입니다. 2) 수덕에 관하여 이 책은 특히 성화에 이르는 적극적인 수단들, 곧 기도, 노동, 본분 완수, 성사들, 독서, 고통 등을 제시할 때나, 특히 덕행들 자체에 대한 광범위한 가르침을 줄 때나, 내용 전체에 걸쳐 그 판단들이 매우 정확합니다... 주의해 보십시오. 저자의 모든 관점의 정당성을 입증하려면 책 전체를 인용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3) 신비들에 관하여 이 책은 참으로 영감을 받아 쓴 것 같습니다. (제시된 여러 점들 중에서 이 한 가지 예를 봅시다.) “하느님에 대한 추상적이고 직관적인 인식과 영혼 자신의 인식에는 차이가 있다. 직관적인 지식으로 이루어지는 설명은, 성령의 선물들이 인간 안에서 활동하는 신적 방식에 대한 교의 신학을 심리학적, 경험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이는 덕행들의 활동이라는 인간적인 방식과 대립된다.” 4) 이 영혼의 자화상에 관하여 이것은 이 영혼이 얼마나 열렬히 은총 안의 삶을 살고 있는지를 드러냅니다. 은총에 대하여 매우 아름답고 정확한 글을 써 내고 있으니, 성령의 선물들만이 그녀에게 그러한 지식을 줄 수 있으며, 더군다나 그 선물들을 설명하는 지혜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완전히 활동적인 이 선물들로부터 하느님을 그분의 속성과 삼위일체적인 생명 안에서 관상하는 것과 그리스도와 복되신 어머니를 그분들의 신비 안에서 관상하는 것이 나오며,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느님의 뜻에 대한 매우 고무적이고도 놀라운 통찰이 나옵니다. 이 영혼을 몰입시키는 하느님의 은총으로부터, 다른 무엇이 아니라 바로 이 은총으로부터, 그녀가 사랑하는 분께서 요구하시는 가장 크고 깊은 희생을 감수할 수 있는 저 굳건함과 관대함이 나오고, 저 예민하고 신선한 감수성이 나옵니다. 또한 예수님에 대한 사랑에 근거하여 쏟아지는 한없는 이웃 사랑도 거기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특히, 자신의 인간적인 뜻을 주님의 뜻으로 바꾸는 대치 행위야말로 오직 은총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주님의 뜻이 더없이 큰 시련과 고통과 메마름 한가운데서도 그녀를 평화롭고 안전하고 기쁘게 있도록 지켜주고, 그녀의 특별한 사명을 계속하게 하는 것입니다... 검토와 비교 작업을 거친 이 모든 관찰에 비추어 볼 때, 저는 여기에서 다루고 있는 사람이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것과 이 영혼 안에 이루어지고 있는 일은 하느님의 일이라는 깊은 확신을 품게 되었습니다. 비록 그녀의 삶이나 내력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이 책에 대한 검토와 이를 읽으며 저 자신이 체험한 효과가 제 이해의 정당성을 충분히 입증하는 것입니다. 이 책이 제 영혼 안에 영적 진보에 대한 새로운 갈망을 불어넣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느님께서만 인간 마음의 열쇠를 쥐고 계시며 성화를 향해 고동치게 하실 따름입니다... 신부님의 친애하는 형제, 콘살보 발스, O.F.M 신부 그렇다면, 루이사를 다른 모든 사람들과 구분시키는 점은 과연 무엇인가? 단적으로 말해서 루이사는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 나의 음식”(요한 4.34 참조 - 역주)이라고 말씀하신 주님 인성의 완전한 모상과 “····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38 - 역주)라고 하신 지극히 거룩한 동정녀의 완전한 모상으로서 하느님의 뜻 안에서 산 첫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하기야, 이제까지 성인들과 교회도 하느님의 뜻을 준행함과 완전한 자아 포기, 하느님의 뜻 및 그 뜻의 작용과의 결합을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는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나 성 빈첸시오 데 바오로 같은 성인들에게서 이렇게 표현된 예를 볼 수 있다. 즉 “자기 자신을 비우고 오직 하나의 뜻만이 있도록 자신의 뜻을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일치시키는 것”이라는 표현이다. (그리고 이 점에 대해서라면 수백 명의 다른 성인들도 손꼽을 수 있고,) 이것이야말로 지고한 목표점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두 뜻의 결합과 루이사의 가르침에는 어떤 차이가 있겠는가? 이에 대한 해답을 그녀의 책에서 찾아보면, 1922년 10월 6일자 (제14권)의 글 속에서 루이사가 예수님께, 오랜 세기에 걸쳐 교회 안에 수많은 성인들이 있었는데 어째서 그녀가 하느님 뜻 안에서 사는 첫 사람이 될 수 있느냐고 질문하는 대목이 나온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 그것도 다른 (모든) 사람을 넘어 틀림없이 내가 너를 처음으로 불렀다. 왜냐하면, 다른 이들을 얼마나 사랑하건, 그들에게는 나의 뜻 안에서 사는 방법 및 이 지고한 뜻 안에서 사는 사람이 받게 될 효과와 기묘한 일들과 부요함에 대해서 가르쳐 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성인들의 전기나 교훈서들 중에서 네가 한껏 찾아본다고 하더라도 사람 안에 작용하는 나의 뜻과 나의 뜻 안에서 활동하는 사람이라는 이 놀라운 일은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기껏해야 포기와 맡김과 두 뜻의 결합만을 볼 뿐, 사람 안에 작용하는 하느님의 뜻과 내 뜻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서도 볼 수 없을 것이다. 이는 (너 이전에는) 그처럼 숭고한 상태로 살아갈 사람을 나의 인자로 부를 때가 되지 않았음을 뜻한다. 게다가, 내가 너에게 간청하라고 요구한 그 방법마저 다른 누구에게서도 볼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곧 루시아가 이미 체험한 두 뜻의 결합으로부터 그 두 뜻의 하나 됨과 그 하나 됨의 활동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뜻 안에 있는 사람의 활동과 생명 안으로 그 효과 등과 함께 들어가는 것이다. 독자도 “진리의 빛을 향해 열린 마음으로” 편견 없이 이 글을 읽는다면, 이 주장을 확증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마음으로 읽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제12권, 1919년 1월 29 일).” * * * 이제부터 시작될 본문은 하느님의 종 루이사 피카레타가 기록한 “천상의 책" 총36권 중에서 연대순으로 발췌한 것이다. 각 장에 제목이 제시되어 있는데, 이는 다만 내용 확인에 도움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편의상 붙였을 뿐 루이사가 붙인 것은 아니다. 호세 루이스 아쿠냐 R. (루이사 피카레타체 대한 설명.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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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기를 바라며, 하느님의 나라가 오시며,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시기를 바랍니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주 우리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지극히 거룩하시고 만군의 왕이시며 살아 계신 자비의 하느님, 오늘도 저에게 생명을 주셔서 감사하며 주님의 구속사업의 도구가 되게하시고 평온한 죽음을 맞게하소서.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여! *~*~*~*~*~*~*~*~*~*~*~*~*~*~*~*~*~*~*~*~*~* [ 온 세상과 모든 가정에 주님의 은총이 넘치기를 기도드립니다 ]
╋ 사제는 또 하나의 그리스도(Sacerdos alter Christus)이다. 거룩한 사람들만이 사제의 위대함을 제대로 볼 줄 알았다(1975.7.29) ╋ 주님, 모든 연옥영혼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시고, 특히 전세계로 퍼진 코르나19로 죽은 모든이에게 자비를 베풀어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아멘. 세계 곳곳에서 고통받고 신음하는 이들의 한숨과 기도를 들어주시고, 국민들을 억압하고 탄압하는 지도자들이 회개하여 주님 품으로 돌아오게 하소서. 아멘. 성령의 불길이 한반도에서 전세계로 퍼져나가길 기도드립니다. 아멘!
*~*~*~*~*~*~*~*~*~*~*~*~*~*~*~*~*~*~*~*~*~* “거룩한 연옥 영혼들과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하느님을 반대하는 사람들과 다른 신들을 믿는 사람들과 쉬는 교우들을 위해서” 라는 지향을 미사에 참례때 혹은 기도하면서 붙이면 매우 큰 선행과 보속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인의 통공 교리를 생활화 한다면 지상에서 행할 수 있는 선행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령께 찬미와 흠숭을,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와 성가정의 수호자이신 요셉께 사랑을!
( http://예수.kr , http://마리아.한국)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자비의 예수님, 양점상 마리아와 장한상 요셉과 장가브리엘과 모든 거룩한 연옥영혼에게 구원의 은총 속에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교회와 교황님과 사제와 수도자와 온 세상의 모든 이들과 태아에게도 은총과 자비를 베푸소서. 온 세상과 우리 나라에도 사랑과 평화와 축복이 가득하게 이끌어주소서. 성모 마리아님과 배필이신 성 요셉과 성인의 통공 안의 모든 가족들은 하느님께 빌어주소서. 이 모든 것을 우리 주 예수님의 수난의 공로로 하느님의 뜻 안에서 하느님께 기도드립니다. 하는 일마다 잘되리라 (시편1,3).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하느님! 수난 공로의 예수님과 함께 장한상요셉, 양점상마리아, 장가브리엘, 곽판수, 박일조 마리아와 모든 거룩한 연옥영혼들이 하느님의 뜻 안에서 그들의 죄와 배은망덕한 것에 대해 보속의 기도드립니다. 천국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해주소서! 하느님, 사랑합니다! 찬미합니다!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피앗! 피앗 미히!(성인의 통공)♥
♥하느님! 수난 공로의 예수님과 함께 안토니오 비오, 릿다, 미카엘, 미카엘의 믿음의 배필, 후손들과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 안에서 그들의 죄와 배은망덕한 것에 대해 보속의 기도드립니다. 자비와 은총과 축복과 용서를 베푸소서! 하느님, 사랑합니다! 찬미합니다!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피앗! 피앗 미히!(성인의 통공)♥ ♥하느님! 수난 공로의 예수님과 함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이들과 혹은 대신하여 하느님의 뜻 안에서 8월 15일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 뜻의 위대성을 찬미하고 흠숭하는 '하느님의 뜻 축일'이 예수님이 루이사에게 말씀하신 것이 하루빨리 이루어 질 수 있도록 간청하며 애원합니다. 이루어주소서! 피앗! 피앗 미히!♥ ♥하느님! 수난 공로의 예수님과 함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이들과 혹은 대신하여 하느님의 뜻 안에서 그들의 죄와 배은망덕한 것에 대해 보속의 기도드립니다. 하느님, 사랑합니다! 찬미합니다!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피앗! 피앗 미히!♥ ♥하느님! 수난 공로의 예수님과 함께 과거 현재 미래의 암이나 질병으로 고통받는 모든 이들과 혹은 대신하여 하느님의 뜻 안에서 그들의 고통을 봉헌하며, 죄와 배은망덕한 것에 대해 보속의 기도드립니다. 하느님, 사랑합니다! 찬미합니다!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피앗! 피앗 미히!♥ ♥하느님! 수난 공로의 예수님과 함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전쟁에서 죽거나 고통당한 모든 이들과 혹은 대신하여 하느님의 뜻 안에서 그들의 죄와 배은망덕한 것에 대해 보속의 기도드립니다. 이들의 영혼을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로 구원해주소서! 피앗! 피앗 미히!♥
♥예수님의 뜻 안에서 안토니오 비오가 봉헌하는 미사와 기도와 바램에 축복과 구원과 자비를 베푸시는 예수님을 예수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