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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전례헌장 116항의 본문과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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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헌 쪽지 캡슐 작성일1999-08-02 조회수2,314 추천수1

116(a):"성교회는 그레고리오 성가를 로마식 전례의 고유한 성가로 인정한다.

따라서 같은 조건이라면 이 성가가 전례 행위(의식)에서 첫 자리를 차지한다. "

 

 

5. 그레고리오 성가와 다성 음악(116조)

 

이에 관해 전례헌장 실시평의회는 기관지 『Notitiae』에서 교회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레고리오 성가의 연구가 당연히 요청된다. 사목적인 상태가 변했는데도 다른 어떤 종류의 노래에도 이처럼 선율과 가사가 일치하고, 독창자나 성가대가 노래하는 훌륭한 노래 중에서 이처럼 예술적으로 세련되어 있고, 말에 붙여진 선율이 이처럼 단순하고 이처럼 종교적이면서 정신적인 표현력을 가진 것이 없다. 우리는 자신이 알아차리고 있지 못하지만 그레고리오 성가의 전통 안에 살고 있다. 만일 그레고리오 성가에 대해 이해를 못한다면 우리는 교육의 기초, 즉 미적이며 종교적인 교육의 기초를 상실하게 된다. 물론

새롭고 더욱 현대적인 성음악을 만드는 것이 요망된다. 그러나 그레고리오 성가는 역시 음악사 안에서 불멸의 업적이고 우리에게 항상 미적이며 영적인 교훈을 주어 모든 시대 안에서 바꿀 수 없는 가치를 갖는 것이다." 그레고리오 성가의 명칭은 성그레고리우스 1세의 이름에서 유래된다고 말하고 있으나 그레고리오 성가가 그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그레고리오 성가란 명칭은 770년경부터 쓰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레고리오 성가란 이름이 붙여진 것은 그때까지 cantos romanus(로마의 노래)로 불리고 있던 칸투스 플라누스(cantus planus)에 그레고리오의 이름을 붙여 권위를 부여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레고리오 성가'는 다음과 같은 종류의 음악과 구별된다. 그 음악이란 다성

음악이나 악기, 교회의 다른 단성 음악, 예컨대 동방 교회의 단성 음악, 동방 교회의 대부분의 전례 음악 및 라틴어에 의한 것은 암브로시오스의 전례 성가나 스페인의 전례 음악이다. 또 엄밀만 의미의 그레고리오 성가와 전문과의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전문에는 참 그레고리오 성가와 그것보다 이후의 시대에 만들어진 곡, 예컨대 찬가, 속창, 미사 통상문 등을 구별하지 않고(la Messe do Dumont나 Missa de angelis 등), 또 그레고리오 성가의 말기에 만든 고전적 고유문, 즉 연미사, 삼위일체 미사, 성인 미사와 참 그레고리오 성가를 구별하고 있 지 않다. S. Corbin, "Gregorien(chant)", in Encyclopedie de la Musique, tome Ⅱ, Paris 1959, p. 347.)

 

 성비오 10세에 의하면 "그레고리오 성가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고유한 노래이고, 교회가 고대 교부들로부터 계승한 유일한 노래이며 수세기 동안 전례 규칙에 따라 소중하게 지켜온 노래여서 교회가 순수하게 자신의 것으로서 신자들에게 줄 수 있는 노래이다."(자의교서 3조) 그레고리오 성가는 "전례 고유의 성질을 최고도로 갖고 있고 특히 그것은 성성과 합당한

형식을 갖고 있음이 인정된다. 그리고 여기서 그레고리오 성가의 또 하나의 특징, 즉 보편성을 들 수 있다."(자의교서 2조) 또 비오 12세는 회칙「Musicae Sacrae Disciplina」 안에서 그레고리오 성가의 우수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그레고리오 성가를 교회의 유산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그레고리오 성가가 특히 뛰어난 것은 그 성성 때문이다. 전례문과 그것에 붙여준 선율이 꼭 일치하고 있으므로 이 노래는 전례문과 완전히 조화될 뿐 아니라, 또 전례문이 갖고 있는 힘과 효력을 표현한다. 이 노래는 듣는 사람의 마음 안에 부드럽게 들어간다. 그 음악적인 형식은 단순하고 알기 쉬우나 이야말로 숭고하고 성스러운 음악이다." (41조) 이상에서 열거한 교황들은 그레고리오 성가를 성음악의 모범이라 부르고

내면적으로나  외면적으로나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뛰어남을 드러내고 있다.  

 

a) 먼저 '그레고리오 성가는 성서의 말씀' 즉 시편이나 예언서나 복음서의 말씀을 묵상하는 데서 나온다. 즉 이와 같은 말씀에 접함으로써 생긴 종교적 감정이 표현된다. 그레고리오 성가는 마음의 움직임과 은총의 역사에 의해 생긴 음악이고 단순히 가사에 아름다운 선율을 붙인 것이 아니다.  

 

b) 다음으로 가사에 억양을 붙여서 낭독하면서, 거기서 말씀이 요구하고 있는 리듬이 나온다. … 작곡에 있어서 가사의 신학적 내용을 엄밀히 표현하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작곡자는 가사에서 동떨어져 제멋대로 작곡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이 필요로 하는 조건을 지켜 작곡해야만 한다.

 

c) 가사의 채용을 묵상하고 이에 억양을 붙여 낭독한 다음에 노래가 지어진다. 이 노래는 다만 노래하기 위해 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자 공동체를 위한 것이다. 이 공동체는 노래로 그 일치를 표현하는 것뿐 아니라 노래로 스스로를 하느님께 바치려고 한다. 이 공동체는 그레고리오 성가를 부름으로써 전문과 선율을 통해 말하자면 두 번 기도하는 셈이다.  

 

d) 가사의 묵상과 억양을 붙인 낭독에 덧붙여 그 결과를 더 잘 표현하는 노래가 만들어지는데 그레고리오 성가에는 또 두 가지 리듬의 요구가 첨가되어, 말하자면 대위법과 같이 서로가 도와가면서 작용한다. 요구란 여기서는 기본적인 리듬,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갖는 리듬, 생리적 및 인종적 리듬을 표현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그레고리오 성가의 특징이 인정된다. 실로 그레고리오 성가는 인간 자체를 음악적이고 언어적이며 선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Jean Jeanneteau, "Les valeurs actuelles du Chant Gregorien", in Le chant liturgique apres Vatican Ⅱ, Paris 1966, pp. 155-156. Revue Gregorlenne, juillet-aout 1957, pp. 119-122 참조.)

 

그레고리오 성가는 성음악의 모범이기 때문에 내적 비판에 의해 그레고리오 성가를 연구한다면 어떠한 것이 밝혀질 것인가. 먼저 그레고리오 성가는 놀랄 만큼 풍요한 것이다. 이와 같이 그레고리오 성가가 풍요한 것은 그것이 세 가 지 서로 다른 종류의 곡, 즉 고유문의 노래, 통상문의 노래 및 집전자의 노래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그레고리오 성가에는 종교적 분위기를 창조하는 힘이 있고, 전례 의식에 참석하는 사람에게 잘 적응하고, 또 의식의 여러 가지 상황에도, 전례 고유의 정신에도, 전례 의식에서 장엄성의

정도에도, 의식 사이에 기도하기 위한 마음의 움직임에도 잘 일치한다. 그레고리오

성가에는 말과 선율로 자신을 표현하려는 두 가지 요구가 완전히 결합되어 있고 또 기술적인 요소, 즉 리듬과 음(언어와 음악)이 종교적 감정 에 완전히 결합되어 있다." 그레고리오 성가는 관상에서 생긴 것이다. 즉 그레고리오 성가는 내적 생활의 음악이다. 이 음악을 알기 위해서는 기도하면서 노래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성가의 내적 생명을 파악할 수 없다. 그레고리오 성가의 걸작을 재현하는 데는 작곡자나 노래하는 사람의 영적 가치도 큰 영향력을 갖고 있다.

 

결국 인간은 기술적인 능력만으로 그레고리오 성가를 만들 수 없다. 신앙으로 사는 자는 기도로써 하느님께 인도되고 그때 자신 안에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할 시적이며 음악적인 풍요성을 갖게 된다. 즉 인간의 기도를 낳게 하는 것은 항상 성령이다." (Jean Jeanneteau, op. cit. p. 170.) 1967년의 지침은 오늘날의 전례에서 그레고리오 성가의 지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즉 라틴어로 의식을 행할 때에 그레고리오 성가는 수위를 차지할 것이다(지침 50조). 그레고리오 성가를 사용하면 전례 의식도 빠짐없이 행할 수 있다(지침 11조). 또 전례 의식과 그다지 밀접한 관계가 없는 다성 음악보다는 그레고리오 성가를 택할 것이다. 신자들의 일치를 도모하고 이제까지의 전례를 지속시키기 위해 모국어로 집행되는

의식에서도 그레고리오 성가의 통상문을 부르는 것이 바람직하다(지침 41조). 특히 몇 가지 국어를 쓰는 지역에서는 사목상의 편의를 위해 그레고리오 성가를 부르는 것이 좋다(지침 48조). 그러나 그레고리오 성가의 모든 곡이 쇄신된 전례의 요구에 알맞다고는 할 수 없다. 지침에는 "신자들은 고유문의 노래에 될 수 있는 대로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지침 33조)라고 기록되어 있다. 특히 성서봉독 후의 노래, 즉 응송에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지침 33조 B). 그런데 그레고리오 성가의 응송은 쇄신된 전례에서는 그 역할을 이미 수행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응송은 독창자나 성가대의 노래로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지침은 어떤 노래를 전례 부흥의 요구에 합치시키기 위해, 미사에 넣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지침 53조 B). 예컨대 입당송에 더욱 긴 시편과 신자들이 노래로 반복하는 부분을 첨가할 수 있다. 이 입당송은 본래 행렬의 노래였으나 입당 행렬을 중지했으므로 다만 교창(안티포나)과 시편의 1절만으로 되어 버렸다. 이것만으로는 집전자와 성직 봉사자들이 제단을 향해 걸어갈 때 쓰기에는 너무 짧아 실용적 역할 을 다할 수 없다. 한편 안티포나는 신자들이 노래하기에는 너무 어렵다. 그 때문에 지침은 전문적인 음악 표현력을 갖고 있지 않는 일반 신자를 위해 더욱 단순한 그레고리오 성자의 곡을 모아 출판하도록 요구하고 있다(지침 50조 B).

 

또 그레고리오 성가에 알맞은 선집을 만들도록 요구하고 있다. 모두가 소리를 합해 노래하는 Sanctus(거룩하시다)는 신자들에게 가장 노래부르기 쉬운 것으로 성가집 안에 우선적으로 넣는 것이 바람직하다(지침 34조 D). 또 Credo (신앙고백)도 모든 신자가 노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지침 34조 C). 낭송 미사만이 아니라 가능하면 서서히 창미사를 거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경우, 미사가 라틴말로 행해지고 있는 한 그레고리오 성가로 최소한 집전자가 노래부르고(지침 29조) 차차 고유문이나 통상문의 노래를 그레고리오 성가로 부르는 것이

좋다(지침 30, 36조). 그레고리오 성가곡 중에 전례 부흥의 요구에 맞지 않기 때문에 노래할 수 없게 된 것이 있으면 그것을 신심 행사(pia exercitia)에서 더욱 유효하게 사용할 수도 있다. 이 신심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열심한 신자들이고 그러므로 그레고리오 성가의 영향을 받기 쉬운 것이다(지침 38조).

 

 

116(b) "다른 종류의 교회 음악 특히 다음 곡도 제30조에 따라 전례 의식의

정신과 부합하는 한 전례 집전에서 결코 배척되지 않는다."

 

 (전례 헌장 117(b)에 대한 설명에 기술되어 있듯이 1967년 10월 3일 Graduale Simplex가 발행됨으로써 이 요구는 채워졌다.  여기서 '다성 음악'이라는 몇 가지 성부에 의한 음악은

넓은 의미에서가 아니고, 성비오 10세의 자의교서나 비오 12세의 회칙 안에 씌어진 의미, 즉 a capella (무반주)의 성악곡, 후기 르네상스의 작곡가들, 예컨대 팔레스트리나가 작곡한 곡과 같은 것을 가리키고 있다.) 성비오 10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고전적인 다성 음악은 모든 성음악의 모범인 그레고리오 성가에 매우 가깝다. 그리고 이 때문에 고전적인 다성 음악 은 그레고리오 성가와 더불어 교회의 가장 장엄한 의식, 예컨대 교황좌 성당의 의식에서 사용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자의교서 4조)

 

 또 비오 12세는 이런 종류의 다성 음악을 성음악 중에서도 매우 가치가 높은 것이라고 하고 있다. "다성 음악이 전례 음악으로서의 요구를 채운다면 전례 의식을 장엄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고, 특히 신자들의 마음에 순수한 감정을 낳게 할 것이다." (Musicae Sacrae Disciplina, 52.) 그러나 다음과 같은 주의를 주고 있다. "교회 안에 다성부에 의한 노래, 특히 길고 복잡한 형식의 노래를 들여 놓치않도록 주의해야만 한다. 이와 같은 노래는 지루하기 때문에 전례문의 의미를 애매하게 하거나 전례 의식의 진행을 방해하거나, 혹은

전례 의식을 손상시키고 나아가 노래하는 사람들의 노력을 쓸모 없게 해 버린다."

(Ibid., 55.)

 

 "전례의 역사와 성음악의 역사를 조사해 본다면, 사목적인 원리와 미학적인 원리 사이에 끊임없는 긴장이 있음을 인정할 수 있다. 이 긴장 때문에 성음악은 자주 전례에서 이탈하는 결과가 되었다. 즉 예술이 전례를, 말하자면 질식시키는 일이 생겼다. 전례는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항상 내재적인 것, 정신적인 것으로 하려고 하는데, 이 내재적 가치는 인간성 때문에 언제나 품위를 잃는 경향이 있다. 한편 예술 작품의 창조는 점차로 외적인 것, 외적인 풍요성으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 그 때문에 기술이 어느 정도의 한계에 달하면 작품은 본래의 의도에서 멀어져 너무나도 감각적인 것이 되고 기교에 빠져 버리는 일이 있다.

예술의 역사를 보면 이와 같은 예를 자주 볼 수 있다. 따라서 전례 의 쇄신, 특히 성음악을 쇄신하려는 우리는 여기서 다성 음악의 기본적 지위와 의의가 무엇인가, 또 전례 안에서 어떻게 이를 유익하게 쓸 것인가를 확실히 알아야 한다.

 

첫째로, 전례의 의식은 전례의 규칙에 따라 행해지는데 음악 때문에 이 규칙이 조금이라도 왜곡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너무나 기교적으로 만들어진 성음악 때문에 의식에 참여하는 의의나 거기에서 말한 말씀의 이해나 신자 전체의 일치나 각 사람의 역할 등이 가리워져 그 때문에 성음악의 본질적인 것이 상실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다성 음악은 전례 의식에서 어떤 조건이라 제약에 따라야 한다. 다성 음악은 전례에서 무제한의 사용이 인정될 수 없다. 그러나 전례에 의해 부과된 이와 같은 규정 때문에 전례 성가의 예술적 내용이 어떠한 것이어야 할까를 생각하게 되었고, 또 이 규정이 예술을 손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예술적 창조력을 낳게 하는 계기를 만든 것이다.

 

단성 음악에 비교한다면, 다성 음악은 음악적 내용을 새로운 차원에서 전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다성 음악은 더욱 풍요하고 더욱 조형적이며 화려한 음악이다. 다성 음악은 말씀 안에 약동하고 있고 더욱이 말만으로 표현할 수 없는 내용을 더욱 생생하게 전할 수 있다. 그러나 다성 음악이 말의 의미, 즉 그 지적인 실체를 반드시 정확하게 나타낸다고는 할 수 없다. 적어도 그것은 어떤 형식의 다성 음악을 사용하는가에 달려 있다. 가사의 음절을 제창으로 부르면 말의 내용이 이해되도록 노래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장식을 붙이거나 다성부로 노래하면 전례문의 이해를 손상시킬 위험이 있다. 전례문을 듣고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과 노래로 전례문의 내용을 강조하는 것 사이에는 항상 모순이 생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례 의식에는 어떤 노래가 가장 합당한가, 혹은 어떠한 경우에 단성 음악과 다성 음악의 양쪽을 사용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야만 한다.  우리는 전례의 모든 노래를 다같이 다를 수 없다. 의식 도중에 말만 외우고 회중과 집전자 사이에 대화구가 교환되는 경우에는 전례문을 분명히 이해할 수 있도록 노래하는 것이 첫째 조건이다. 전례문의 이해를 방해하는 다성부의 노래는 모두 배제해야 한다 그러나 전례 의식의 진행에서 그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노래의 경우에는 노래 전체의 의미를 대체로 알 수 있으면 된다. 이와 같은 노래는 의식을 장엄하게 하고 그 의의를 분명히 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 다.

 

따라서 이와 같은 노래를 적어도 어떤 부분에서는 다성부로 노래하고, 또 음악적인 장식을 할 수도 있다. 예컨대 다성부로 노래하면 노래의 효과를 더욱 강하게 하는 것도 가능하다. 노래의 길이, 형식 및 그것을 신자들과 어떻게 나누어 부르는가 하는 것은 전례의 규칙에 따라 정해져 있고, 이 규칙의 위반은 일체 허락되지 않는다." (Erhard Quack, op. cit., pp. 213-215.) 1967년의 지침에는 다성 음악의 사용에 관해 몇 가지 규칙을 말하고 있다. 지침은 귀중한 성음악의 유산을 대성당이나 신학교나 기타 교회 관계의 시설에서 사용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지역의 사정이 허락하는 한 그 지역에서 성음악의 유산을 다용하기 위해 최대의 노력을 하도록 희망하고 있다(지침 20조). 일반 신자가 충분한 음악 교육을 받지

않은 경우에는 성가대만이 다성부로 노래하도록 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이 경우 일반 신자가 자기에 관계 있는 부분을 전혀 노래하지 않게 되어서는 안 된다(지침 16조), 지침은 음악적인 화려함이 아니라 전례 의식을 완전하게 행하도록 요구하고 있고(지침 11조), 특히 미사 통상문의 노래를 다성부로 부를 경우, 일반 신자를 노래하는 데서 제외하지 않도록 주의하고 있다(지침 30조 A; 20조 B; 16 조 C). 다성부로 노래하는 것은 의식의 양식에 변화를 주어 대축일 기쁨의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매우 유효하다고 강조하고 있다(지침 10조). 또 말씀의 전례, 혹은 신심 행사에서 전례 쇄신을 위해 전례 의식에서 실제로 사용할 수 없게 되어 버린 곡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고 하고 있다(지침 46조). 의심할 여지도 없이 다성이나 화음을 사용하는 것은 많은 현대인에게 자연적이면서 종교적인 요구이고 단성 음악에서는 이만큼의 만족을 기대할 수 없다. 당연히 모든 신자들의 노래에 적당한 다성 음악을 넣는 것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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