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생활성가 토론]리듬/가사에 반영된 음악의 특징 | |||
---|---|---|---|---|
이전글 | 이전 글이 없습니다. | |||
다음글 | [NWC] NWC 사용자 지침서 | |||
작성자임진경 | 작성일2000-05-25 | 조회수2,040 | 추천수11 | |
우선 올려주신 질문에 대한 제 견해를 밝히며 이 글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생활성가는 엄연히 ’생활’성가 임에도 남녀 간의 사랑이면 안된다는 듯한 말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것이 미사에 불리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는 말에는 동의하지만요. 남녀간의 사랑은 하느님과 무관한 것인가요? "
- 형제님이 지적하신 대로 남녀간의 사랑을 다룬 모든 생활성가가 문제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간과하지 않아야 할 것이 생활성가와 대중가요가 가진 차이점이겠습니다. 대중가요의 90% 이상이 남녀간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것을 생활성가로 보지는 않습니다. 생활성가가 기반으로 하는 정신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을 토대로 한 인간의 사랑’ 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에서 궁극적으로 성가와 가요의 차이점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요가 남녀간의 사랑을 노래하는 차원에서 끝난다고 한다면, 성가는 여기에 인간의 사랑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중요한 역할을 가지고 있는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활성가가 이런 역할을 잘 할 수 있도록 가사의 선택과 사용에 있어서 보다 신중해야 할 것입니다.
"가사의 전달은 물론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가사의 문제, 이는 번역한 노래가 있으므로 해서 계속 존재하게 됩니다. 이를 ’생활성가’의 문제라고 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생활성가 중에도 엄연히 가사 전달이 잘 되는 곡이 존재합니다. 비율이 그렇게 낮다고 보진 않습니다. 대부분 번역한 노래의 경우 심합니다. 제가 볼때에는 가톨릭 성가에도 그런 부분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
- 언젠가 전례문이 바뀐 후 기존 전례문의 미사곡에 새 전례문을 새로 입히는 것에 관한 어려움을 토로한 적이 있습니다. 형제님의 말씀대로 가톨릭 성가에도 그러한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공감하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렸던 것은, 생활성가의 불규칙적 리듬요소들로 인해 가사의 전달과 집중의 정도가 떨어지므로 그것이 전례성가에 쓰일수 있는 한계점이 있다는 것이였습니다. 여기서 언급한 것을 보다 자세히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대부분의 가톨릭 성가는 규칙적인 리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단조롭다고 느낄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리듬의 단순성은 가사를 음미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성가를 부를 때 그 가사를 속으로 느끼며 부를 수 있는 공간적 여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생활성가는 보다 복잡하며 불규칙적인 리듬이 제시됩니다. 이 경우 상대적으로 몸이 느끼는 리듬적 자극이 강하기 때문에, 가사에 집중하기보다는 곡의 리듬이 주는 음악에 몸이 더 반응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가사전달의 문제를 말씀드렸습니다. 물론 전례에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면 (즉 율동을 필요로 하는 레크레이션이나 가두 선교, 친교를 나누는 공동체의 회합 등) 적절히 사용해 더욱 효과적인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고 봅니다.
-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생각 하나
요즘 TV에서 뜨는 광고들은 우리의 무의식 안에 잠재하는 말초적인 신경을 자극시키는 것들이라고 합니다. 이런 매스컴의 효과는 상당해서 우리의 생활곳곳에 파고 듭니다. 백화점이나 상가에서는 구매욕을 자극시키는 음악을 틀고 있고 (속도가 느린 음악을 틀면 사람들이 물건을 살 의욕이 나겠습니까?), 패스트 푸드 음식점에서도 식욕을 촉진시키는 색깔을 (주로 노랑,빨강과 흰색 계통) 쓰며 손님들이 얼른 먹고 나갈수 있는 활동적인 음악을 틉니다. 이러한 여파에 힘입어 ’음악치료’라는 분야가 미국에서는 인기가 있다고 합니다.
어찌 보면 이러한 세태에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는 우리에게 전통성가는 시대에 부합하지 못하는 유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기성세대들조차 전통성가의 진정한 맛을 느끼고 공유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음악의 현실에서 올바른 전례를 위해 도전하고 보급하려는 많은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이 또한 척박한 환경 안의 도전입니다. 이러한 도전을 가능케 하는 힘은 무엇인가? 그것은 전례음악을 통해 하느님의 무한하신 영원성을 찬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상에 몸을 두고 있지만 우리의 영혼은 하느님을 향하고 있어야 하는 신앙의 정수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기에, 시대를 초월해 전례음악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전례 때 우리가 흠숭하는 주체가 하느님이시기에 우리가 공적으로 드리는 전례에서의 음악 또한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하느님의 영원성을 추구하는 음악’이 되어야 하는것입니다. 이렇게 지상에 몸담고 있는 영혼들을 천상의 하느님께로 이끄는 역할을 하는 것이 성가대의 존재의 이유가 되며, 그렇기에 이 시대에 도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몫을 다 하기 위해.....
생활성가도 그 몫이 있습니다. 위에서도 언급한 바 있듯이 하느님의 사랑을 기반으로 한 이웃사랑을 전파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생활성가가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여러가지 다양한 스타일이 생겨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것은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생활성가가 자리를 잡아가고 그 몫을 다하기 위해서는 젊은이들만의 것으로 그 범위를 국한시켜서는 안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생활성가로서 자리잡아 가기 위해 나름대로의 기준과 범위 등을 성교회의 가르침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세속성을 통해 사람들과 가까워지는 긍정적인 위치에서 나아가 근본적으로 하느님을 전하는 도구로서 그 역할을 하는 진정한 몫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