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가 이야기: 우리 이런 미사를 만들어 봐요 (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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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2-08-18 | 조회수3,128 | 추천수0 | |
[성가 이야기] 우리 이런 미사를 만들어 봐요 (2) 지난달에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개정한 미사의 성가 중 우선적으로 노래해야 할 ‘환호송(Acclamatio, acclamation)’에 대해 설명을 드렸습니다. 미사에 참여한 모든 백성이 기쁨으로 외치는 환호야말로 평일미사에서도 울려 퍼져야 할 중요한 성가입니다. 이 환호는 신앙고백이 되고, 즐거움의 감탄사도 되고, 기도내용을 시인하는 것도 되며, 인사에 대한 답례도 되기 때문입니다. 이번 호에는 여러 본당에서 잘못 사용하고 있는 성가들에 대해 언급하고자 합니다. 조금씩 고쳐나가면 좋겠습니다.
(1) 대영광송 대영광송은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만들어 사용한 찬미가 중의 하나로, 6세기가 시작될 무렵에는 이미 모든 로마미사 안에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찬미가는 기쁨의 찬미가이며 그 내용 역시 근본적으로 하느님을 찬미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대영광송은 원래 주교님만 노래 부를 수 있었고, 사제는 일 년에 단 한 번, 즉 부활성야 미사 때에만 노래 부를 수 있었습니다. 지금과 같이 사제들도 대영광송을 노래할 수 있게 된 것은 11세기부터입니다. 이 말은 곧 대영광송이라는 찬미가가 미사의 축제성과 장엄성을 나타내는 하나의 표징이라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림시기와 사순시기 때에는 특별한 축일을 제외하고는 대영광송을 노래하지 않습니다. 이와 반대로 대림시기와 사순시기를 제외한 모든 주일미사, 장엄미사, 축제, 그리고 지역 공동체의 장엄한 예식 때 대영광송을 노래함으로써 그날 축일의 특별한 장엄한 성격을 나타냅니다. 이렇게 볼 때 대영광송을 노래로 부르지 않고 외우게 될 경우, 이 대영광송은 이미 찬미가의 기능과 그날 축제의 성격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이제는 그 정의조차 모호한 “창미사”라는 이름으로 주일의 중심 미사 때에만 미사 통상문(자비송, 대영광송, 거룩하시도다, 하느님의 어린양)을 노래하고 마는데 이것은 편의주의로만 미사 거행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영광송을 노래로 하면 미사시간이 조금 더 길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경축하는 축일의 축제의 성격을 살리기 위해서는 교회가 지정한 날에는 대영광송을 노래하는 습관을 가지도록 해야겠습니다. (2) 화답송 화답송은 방금 들은 제1독서에 대해 하느님의 말씀인 ‘시편’으로 응답하는 노래입니다. 여러 방법으로 화답송을 노래할 수 있지만, 가장 기본적이고 바람직한 노래방법은 선창자가 후렴을 노래하고 나면 모든 신자들이 그 후렴을 다시 한 번 노래하고, 선창자가 시편구절을 노래하고 신자들은 후렴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신자들로 하여금 제1독서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들고, 선창자는 그 내용을 신자들이 묵상하게끔 제시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선창자가 부르는 시편구절을 여럿이서 혹은 성가대가 4부로 노래하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럴 경우, 시편구절의 내용이 신자들에게 명확하게 들리지 않습니다. 음색이 조용하고 전달력이 좋은 선창자가 시편가사를 선명하게 신자들에게 전달해야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선창자는 오페라의 아리아 혹은 리드를 노래하듯이 드라마틱하게, 성악적으로 시편가사를 노래하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 선창자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자랑하려 하지 말고, 하느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신자들에게 전달하여 신자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도록 도와주려는 마음가짐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화답송은 제1독서에 대한 묵상을 위해 교회에서 정해준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를 무시하고 독서와는 전혀 무관한 노래들, 생활성가나 성가집에서 자신들이 선호하는 찬미가들을 뽑아서 노래하는 본당들이 많은데 이것은 꼭 피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찬미가풍의 창작곡이라도 하느님의 말씀인 독서와 연관된 시편화답송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 주시기 바랍니다. 화답송을 노래하는 첫째 자리는 독서대임을 알아주시고, 제단 위의 독서대는 반드시 하나여야 한다는 것도 명심해 주십시오.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끝난 지 50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어떤 본당에서는 두 개의 독서대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사제가 읽는 복음이 평신도가 읽는 독서보다 더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신부님들이 아직도 계시다는 겁니까? 모두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3) ‘하느님의 어린양’때에 율동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많은 본당에서 특별히 청년미사와 어린이 미사 때에 ‘하느님의 어린양’을 노래할 때에 율동하는 것을 많이 보는데 이는 삼가야 합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은 사제들이 빵을 나누어 가지는 동안 신자들이 바치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반드시 노래로 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자들의 낭송으로 족합니다. 이렇게 전례음악적으로 과히 중요하지 않은 이 기도를 노래하면서 주일학교 교사와 청년들이 제단 앞에 나와 율동을 이끌어주고 따라하도록 인도합니다. 율동이 필요할 만큼 중요한 부분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사참석자들이 좋아한다는 이유로 율동을 병행한다면, 이런 율동을 따라하게 되는 주일학교 학생들이나 청년들은 ‘하느님의 어린양’ 부분을 굉장히 중요한 전례의 한 부분으로 착각하게 됩니다. 사제들이 성체를 쪼개고 나누는 전례행위가 노래나 율동이 필요할 만큼 중요한 부분이 아닙니다. 꼭 율동이 필요하다고 느낀다면 ‘복음환호송’때나 ‘거룩하시도다’ 등 환호송을 노래할 때에 사용하시길 바랍니다. 이런 순간은 정말 기쁨의 시간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여러 사제들이 공동으로 미사를 봉헌했기 때문에 빵을 나누는 시간도 길었습니다. 그래서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어린양을 지금 같이 세 번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여러 번 불렀습니다. 마지막 ‘하느님의 어린양’ 부분에서만 ‘저희에게 평화를 주소서’로 끝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 각 본당에서는 주로 사제 한 분이 미사를 드리기 때문에 ‘하느님의 어린양…자비를 베푸소서’는 반드시 두 번을 해야 할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따라서 ‘자비를 베푸소서’와 ‘평화를 주소서’를 각기 한 번만 하면 됩니다. (4) 영성체 노래 저는 한국교회의 미사전례음악의 여러 문제 중 가장 심각한 것이 영성체 노래라 생각합니다. 영성체 성가는 우리 마음에 오시는 그분과 나 자신과의 일치, 그리고 성체를 영하는 우리 서로간의 일치, 마지막으로 영성체 행렬을 위해 부르는 노래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사용하는 ‘가톨릭성가’집에 수록되어 있는 성체성가들의 거의 대부분은 성체를 찬미, 흠숭하는 가사를 가졌기 때문에 영성체 때에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오직 성시간이나 성체강복 때에만 사용이 가능한 찬미가들입니다. 따라서 미사 때에 성가를 선곡하시는 분들은 성가집의 ‘성체’라는 분류를 믿고 ‘성체’에 포함된 아무 곡이나 영성체 때에 사용하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성가집에는 성체를 흠숭, 찬미하는 노래만 많이 수록되어 있고, 영성체 때에 사용할 노래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2014년에 발행될 새 성가집에는 영성체 성가가 많이 수록되길 함께 기대해 봅시다. * 추신 : 지면상 이 글의 곳곳에 필요한 문헌을 제공하지 못함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저에게 건의나 질문이 필요하신 분은 heonkim@catholic.or.kr로 연락주시길 바랍니다. [월간빛, 2012년 8월호, 김종헌 발다살 신부(한티순교성지 전담, 가톨릭음악원 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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