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교회음악 산책22: 프란츠 슈베르트의 독일 미사(Deutsche Mess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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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9-01-02 | 조회수2,965 | 추천수1 | |
[쉽게 듣는 교회 음악 산책] (22) 프란츠 슈베르트의 ‘독일 미사(Deutsche Messe)’ “단순 · 소박한 모국어 미사곡의 힘”
- '독일 미사'는 슈베르트의 미사곡 중 가장 대중적으로 사랑 받는 곡이다. 2007년 4월 16일 독일 스투트가르트 라디오 심포닉 오케스트라가 바티칸 바오로 6세 홀에서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80세 생일을 맞아 특별 공연을 펼치고 있다.
불과 백 년 전만 해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문맹 인구 비율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다. 특히 시골에서는 글을 읽을 줄 아는 한 사람이 마을 사람들 모두를 모아놓고 책을 읽어주는 일도 많았다. 모국어로 쓰인 글도 읽지 못하는데, 외국어로 된 글이야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글을 읽을 줄 알거나 남들이 모르는 언어를 안다는 것은 곧 권력을 의미한다. 글을 아는 사람은 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책의 내용을 마음 내키는 대로 바꿔서 읽어주기도 했고, 편지 내용을 사실과 다르게 일러줘 갖가지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16세기에 마르틴 루터가 모국어인 독일어로 번역하기 이전에는 독일 사람들 대부분이 성경을 읽을 수 없었다. 특별히 공부를 많이 한 학자들 말고는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를 해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이 독일어로 번역되면서 성직자와 학자들의 독점적 권력이 흔들리게 됐다. 그때부터 민중은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가 아니라 자기 나름의 생각으로 성경 말씀을 이해하기 시작했고, 교회의 가르침에 때로는 회의를 품기도 했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작곡가 프란츠 슈베르트(Franz Schubert, 1797~1828)가 작곡한 ‘독일 미사 Deutsche Messe, D.872’ 역시 이와 비슷한 예가 된다. 슈베르트의 여러 미사곡 중에서도 가장 대중적으로 사랑 받는 이 작품은 라틴어가 아니라 독일어 가사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바로 앞 시대의 고전주의 예술가들과는 달리, 슈베르트 시대의 낭만주의 예술가들은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강했고 모국어에 각별한 애정을 지녔다. 그래서 라틴어나 다른 외국어 서적들이 독일어로 번안되었고, 슈베르트 역시 그런 시대 조류의 영향을 받아 앞 시대의 하이든이나 모차르트보다 적극적으로 독일어 가사를 성가에 사용했다.
‘사람들이 뜻도 제대로 모르는 라틴어가 아니라, 먹고 마시고 이야기하고 꿈꾸며 일상의 삶 속에서 온종일 쓰고 있는 독일어로 성가를 만들자. 그러면 그 가사가 노래 부르는 사람들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 더욱 신앙심이 깊어질 거야.’ 슈베르트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 ‘독일 미사’의 가사를 쓴 사람은 빈 대학의 물리학 교수 노이만(Johann Philipp Neumann, 1774~1848)이었다. 노이만은 ‘독일 미사’를 위해 모두 여덟 곡의 가사를 썼고, 그 순서는 미사 전례를 따른다(미사 시작 - 영광송 - 복음환호송 - 봉헌 - 거룩하시도다 - 성체성사 - 하느님의 어린 양 - 파견성가). 그러나 이 가사는 라틴어 미사 전례집에 들어 있는 가사를 고스란히 독일어로 옮긴 것이 아니고, 상당 부분이 노이만의 자유로운 창작으로 채워져 있다.
‘가톨릭 성가’에는 이 ‘독일 미사’ 전곡이 우리말 가사로 번역되어 들어 있는데, 이는 미사 때 자주 불리는 성가들이다(‘가톨릭 성가’ 329~336번). ‘미사 시작’이라는 제목의 성가는 성가집 안에도 여러 개가 있지만, 특히 이 ‘독일 미사’에 수록된 슈베르트의 작품은 간결하고 소박하면서도 마음에 깊이 와 닿는 곡이다.
“기쁨이 넘쳐 뛸 때 뉘와 함께 나누리 슬픔이 가득할 때 뉘게 하소연하리 영광의 주 우리게 기쁨을 주시오니 서러운 눈물 씻고 주님께 나가리”
동네 성가대에서 보이 소프라노로 노래하던 어린 슈베르트를 아버지는 당시 빈 궁정악장이었던 안토니오 살리에리에게 선보였고, 살리에리는 슈베르트의 재능을 인정해 그를 궁정 소년 합창단 단원으로 받아들였다. 이 시기부터 교회음악 레퍼토리에 익숙해진 슈베르트는 스스로 작곡을 시작하게 되자 미사 전례음악에 특별한 애정을 기울였다.
하느님을 찬미하려는 그의 간절한 욕구과 깊은 신앙심은 그 자신이 쓴 메모와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신앙과 더불어 인간은 이 세상에 발을 들여놓는다. 신앙은 판단력과 지식에 앞선다. 어떤 것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것을 믿어야 하기 때문이다.”(슈베르트의 1824년 3월 28일 일기에서)
슈베르트 시대 로마 가톨릭교회는 라틴어를 자국어로 번역해 행하는 미사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오스트리아에서는 라틴어 미사 텍스트를 독일어로 바꿔 노래하는 이른바 ‘민족 미사’가 하이든 시대부터 존재해왔고, 슈베르트는 자신의 ‘독일 미사’로 그 전통을 확실히 굳힌 셈이다.
작곡이 완성된 1827년 주교구 행정청은 이 ‘독일 미사’의 공연을 허가했지만 성당에서 미사시간에 연주하는 것은 금지했다. 그 뒤 슈베르트 서거 100주기를 맞는 1928년이 되어서야 오스트리아 주교회의는 공식적으로 이 작품을 미사 때 연주하는 일을 허가했다.
100년 동안이나 미사 전례음악으로는 사용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이 ‘독일 미사’ 성가들은 민요처럼 부르기 쉬우면서 경건한 멜로디 덕분에 꾸준히 민중의 사랑을 받아왔다. 언제나 단순하고 소박한 것이 아름답고 오래 간다. [음악평론가 이용숙(안젤라)씨]
Tip
미사곡이란 글자 그대로 미사 전례를 위한 가톨릭교회 음악이다. ‘…교회음악산책’에서는 기욤 드 마쇼의 ‘노트르 담 미사’를 통해 미사곡에 대해 간단히 살펴본 바 있다.
중세와 르네상스의 전환점에 선 마쇼의 미사곡을 계기로 조스캥 데 프레, 팔레스트리나 등 수많은 작곡가들이 유명 미사곡들을 만들어냈다. 또 바로크 시대 이후 교회음악에도 오케스트라가 채용되면서 미사곡은 독창 뿐 아니라 중창과 합창도 곁들인 풍성한 연주로 변화했다. 특히 바흐,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구노 등의 작곡가들이 대형 곡을 만들어내면서 미사곡은 전례용 외에 연주회용으로도 중요한 위치에 서게 됐다.
미사곡 중 고유미사곡이란 입당송이나 화답송, 복음환호송, 영성체송 등 미사마다 변하고 또 교회력에 따라 생략되기도 하는 미사 고유문을 음악화한 것이다. 통상미사곡은 전례력에 따라서도 그 내용이 변화하지 않는 대영광송과 거룩하시도다, 하느님의 어린 양 등 5가지 통상 기도문을 가사로 한 음악을 일컫는다.
음악 양식에 따라서는 ‘그레고리오 미사곡’과 ‘다성부 합창 미사곡’, ‘자국어 가사에 의한 단성부 개창 미사곡’ 등으로 나뉜다. 특히 ‘자국어 가사에 의한 단성부 개창 미사곡’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신자들의 능동적인 전례 참여를 독려함에 따라 널리 보급됐다. 슈베르트와 하이든 등이 자국어로 쓴 미사곡도 이 종류에 포함된다.
슈베르트의 독일미사를 담은 음반으로는 볼프강 자발리쉬의 지휘, 바이에른 방송합창단과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의 연주로 1986년 녹음된 것(EMI)이 유명하다. 우베 크리스티안 하러가 지휘하고 빈 소년합창단과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음반(필립스, 2002년)도 추천음반으로 꼽힌다. [가톨릭신문, 2009년 1월 1일, 주정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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