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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가톨릭 문화산책: 성음악 (8) 성음악의 영원한 표상, 팔레스트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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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3-10-26 조회수4,066 추천수0

[가톨릭 문화산책]<37> 성음악 (8) 성음악의 영원한 표상, 팔레스트리나


프로테스탄트 음악 맞서 전통 교회음악 지켜내



16세기 초 가톨릭교회는 '프로테스탄트발 태풍'에 시달리고 있었다. 당시 교회는 이에 대응해 트리엔트공의회를 연다. 이탈리아 북부 트리엔트(지금의 트렌토)에서 교황 바오로 3세 때인 1545년에 막을 올려 율리오 3세와 마르첼로 2세, 바오로 4세를 거쳐 비오 4세가 재위하던 1563년까지 18년간 이어졌다. 당시는 프로테스탄트의 새로운 신학 이론이 야기한 혼란이 나타나 이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정통 교리를 정리할 필요성이 컸던 것. 공의회는 여러 개혁 교령들을 반포함으로써 앞으로 이어질 교회 자체 개혁의 발판도 마련했다. 트리엔트공의회의 결정은 이후 400년간 교회생활의 든든한 바탕이 돼 제2차 바티칸공의회까지 교회를 지켜왔다.

트리엔트공의회는 전례와 전례음악도 재평가하는 계기였다. 공의회의 정신은 간단명료했다. 전례음악은 속적 요소가 없이 성스러워야 하고, 전례의 흐름에 잘 부합해야 하며, 기도문인 가사가 잘 전달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시대적 흐름 속에서 나타난 위대한 음악가가 팔레스트리나였다.
 
'교회음악의 영원한 표상'으로 꼽히는 거장 조반니 피에르루이지 다 팔레스트리나.


팔레스트리나(1525~1594)의 이탈리아식 이름은 조반니 피에르루이지 다 팔레스트리나(Giovanni Pierluigi da Palestrina)이고, 라틴어식 이름은 요한네스 페트랄로이시우스 프레네스티누스(Johannes Petraloysius Praenestinus)다. 흔히 불리는 '팔레스트리나'는 그가 태어난 곳으로, 당시는 '00 출신의 아무개'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는 소년 시절 로마의 성모마리아대성당의 소년성가대원으로 음악교육을 받았고, 19세에는 고향의 아가피토성당 오르간 연주자 겸 창자(唱者)로서 본격적으로 음악가의 삶을 시작했다. 26세에는 기혼자임에도 불구하고 예외적으로 성 베드로 대성당의 율리오 3세 교황의 성가대인 '율리아합창단(Capella Julia)'의 악장이 됐다. 바오로 4세는 그가 기혼자여서 교황 성가대에서 내보냈지만, 그는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당의 악장으로 갔다가 46세 때 다시 성 베드로 대성당의 악장으로 복귀했다. 그의 유해는 지금도 성 베드로 대성당에 안치돼 있다.

팔레스트리나는 두 개의 커다란 칭호를 받기에 마땅하다. 하나는 '로마악파의 수장'이요, 또 하나는 '반 프로테스탄트 음악가'다. 당시 교회음악계는 로마악파와 베네치아악파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로마악파는 순수하게 사람의 목소리만을 사용한 전례음악을 주장했고, 베네치아악파는 악기 사용도 병행했다. 요즈음도 빈번하게 들을 수 있는 '아카펠라(a capella)'라는 용어는 당시 임시 교황 성당인 '시스티나 경당에서 부르는 모습을 따라서'라는 뜻인 'a capella sixtina'를 줄여 만든 말이다. 합창단이 악기와 함께 노래하면 훨씬 소리를 내기가 편하지만, 반면 가사의 전달력은 떨어지는 현상 때문에 이런 전통이 생겼을 법하다. 또 한 가지, 그와 로마악파의 음악은 각 성부가 독자적 선율을 갖고 흐르며, 성부 간 조화를 이루는 다성음악(Polyphony)만을 전례에 사용했다. 물론 대영광송(Gloria)이나 신경(Credo)은 기도문이 길어서, 긴 가사에 대위법을 다 사용하면 연주 시간이 너무 길어지고 미사 진행에도 장애가 될 수 있다. 이런 때엔 많은 부분에 화성적 기법을 이용해 여러 성부들이 함께 가사를 읽어나가듯이 노래하도록 작곡했다. 그렇지만 무반주 다성음악은 로마악파의 양대 특징으로 꼽힌다. 이 로마악파에는 팔레스트리나를 필두로 아니무치아(1500?~61)와 나니노(1544~1607), 안네리오(1560~1614), 알레그리(1582~1652), 라소(1532~94), 스페인 사람 빅토리아(1549~1611), 영국인 버드(1543~1623) 등이 유명하다.

당시 독일과 영국의 프로테스탄트 음악가들은 라틴어 가사와 그레고리오 성가를 버렸다. 당연히 영어와 독일어에 바탕을 둔 새로운 음악이 생겨났다. 특히 루터의 코랄은 큰 위력을 발휘했고, 독일에선 가톨릭교회에도 코랄이 등장해 코랄에 바탕을 둔 음악 형식들이 나타났다. 이같은 흐름은 다른 가톨릭 지방에도 영향을 주려 했다. 팔레스트리나는 이런 영향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그레고리오 성가의 개혁을 시도했다. 그레고리오 성가가 신자들이 부르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선율을 가졌기에 루터의 코랄이 나타났다고 판단한 팔레스트리나는 그레고리오 성가 선율을 다시 단순하게 만들려 했다. 또 105편의 미사곡 중 79편에서 그레고리오 성가의 선율을 소재로 작곡했다. 그레고리오 성가 개혁은 실패했지만, 그는 이렇게 프로테스탄트 음악의 영향에서 전통 교회음악을 지켰다.

대위법에 의한 다성음악의 절정에 다다른 팔레스트리나의 음악은 트리엔트공의회에서 '교회 양식(Stile ecclesiastico)'으로 인정됐다. 또 베네치아악파의 몬테베르디에게서는 전 시대에 완성된 음악이라는 뜻으로, 또 새 시대 새로운 작곡방식과 다르다는 뜻으로 '옛 양식(Stile antiquo)'라고도 불렸다. 팔레스트리나에게 이런 칭호가 붙는다는 사실 자체가 한 시대의 완성자임을 말한다. 또 19세기에 독일어권에서 시작해 전 교회에 열풍처럼 불었던 가톨릭 교회음악 복고 운동인 체칠리아협회(Caecilienvereins)에서도 그레고리오 성가와 팔레스트리나의 음악을 최고 모델로 삼았다. 교황 비오 10세는 1903년 자의교서 「성음악에 관하여(Tra le Sollecitudini)」를 통해 교회음악의 개혁을 강조하면서 '팔레스트리나'라는 이름을 개별적으로 거명하기도 했다.

"특히 피에르루이지 다 팔레스트리나의 작품들은…고전적 다성부 음악은 교회음악 최고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그레고리오 성가를 충실히 따르고 있어서 교황이 집전하는 전례와 같은 교회의 장엄 미사에서 그레고리오 성가와 함께 불릴 수 있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이 음악도 교회 미사, 특히 주요 성당과 대성당, 신학교와 다른 기관의 교회나 경당에서 널리 복원돼 불려야 한다"(비오 10세 자의교서 「성 음악에 관하여」 4항).

그는 또 다음 세대 음악을 위한 기반도 마련했다. 그의 음악은 초기에는 철저한 교회선법(modus)에 의한 음악이었지만 후기의 작품을 보면 차차 조성(tonality)음악으로 변해간다. 이처럼 가능성을 열어준 덕분에 다음 세대인 바흐는 조성음악의 완성자가 될 수 있었다. 팔레스트리나의 작품은 거의 전부가 교회음악곡이다. 105편의 미사곡이 있고, 모테트와 애가(Lamentatio), 봉헌송(Offertorium), 아가(Canticum Canticorum), 마리아의 노래(Magnificat), 통고의 성모(Stabat Mater), 찬미가(Hymnus)등 500여 곡에 이른다. 여기에 교회 마드리갈(madrigal, 14세기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자유로운 형식의 가요)과 세속 마드리갈이 모두 100곡 더 있다.

 

 

교황 마르첼로 미사곡(Missa Papae Marcelli)


 

교황 마르첼로 2세<사진>는 1555년 4월 10일부터 5월 1일까지 3주 간 교황직에 있었다. 그때 성 금요일 예식 뒤 교황성가대원들을 불러서 훈화했다. 성가를 '들을 수 있고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감동한 팔레스트리나는 1563년에 미사곡을 한 편 작곡해 마르첼로 2세 교황께 헌정했다. 이 곡은 그의 최대 명작으로 꼽히며, 최근 바오로 6세 때까지는 교황 즉위 미사에서 불렸다.
 
이 미사곡에는 전설이 하나 붙어 있다. 트리엔트공의회는 다성음악을 전례에서 축출하기로 결정했는데, 팔레스트리나가 이 곡을 들려줘 공의회의 결정을 번복케 하고 다성음악을 구했다는 이야기다. 이 전설은 작곡가이자 음악 이론가인 아가차리(1578~1640)가 1607년에 기술한 내용이다. 이 전설이 17세기 예수회 음악가들을 통해 후대에 연결됐고, 결정적으로는 19세기 역사가 바이니가 1828년에 저술한 「팔레스트리나 생애록」에 그를 '다성음악의 구원자'라고 쓰게 했다. 내용은 대충 이렇다.

"1565년 4월 28일, 비텔로찌 추기경 지시로 교황 성가대원 전원이 모였는데, 거기에는 보로메오 추기경과 교황위원회 위원인 6명의 추기경이 다 모였다. 팔레스트리나도 참석했고, 미사곡을 세 곡 불렀는데, 끝으로 부른 곡이 마르첼로 미사곡이다. 세 번째 곡에 모두 감탄하고 작곡자를 칭송했다. 그리고 계속 이런 식으로 곡을 쓰라고 했다."

그러나 교황성가대 자체 일지에는 바이니가 언급한 내용 부분에서 그때 이 미사곡이 불렸다는 말이나 위원들의 반응에 대한 언급도 없다고 전해진다.

20세기에는 핏츠너가 그의 오페라 '팔레스트리나'에서 이 전설을 대본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공의회에서 다성음악을 몰아내려 했다는 증거가 될 어떤 기록도 찾아볼 수 없고, 이 미사곡이 위원들의 마음을 돌렸다는 증거도 없다. 전설은 어디까지나 재미있는 전설일 뿐이다. 하지만 이 작품 속에는 트리엔트공의회의 전례 정신이 깊이 담겨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평화신문, 2013년 10월 27일,
백남용 신부(서울대교구, 교회음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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