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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가톨릭 문화산책: 성음악 (10) 교회 음악과 오케스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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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4-01-11 조회수3,514 추천수0

[가톨릭 문화산책] <47> 성음악 (10) 교회 음악과 오케스트라


오케스트라로 화려함 더해지고 바로크 시대 활짝 열어



2012년 3월 서울대교구 명동주교좌성당에서 사순시기 중 백남용 신부 지휘로 바흐의 '요한 수난곡'을 연주하는 가톨릭합창단.


잠시 용어 정리부터 해보자. '교회음악(Church music)'이란 무엇일까? 교회라는 용어가 그리스도교만의 용어이듯이 교회음악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표현으로 지어진 모든 음악을 뜻한다. '성음악(Sacred music)'은 음악계에서는 세속음악에 비교되는 용어로, 교회음악과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교회 문헌에서는 '전례음악(Sacral music)'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된다. 전례음악은 전례에서 사용되는 음악만을 뜻한다. 이중 성음악이라는 용어의 사용 방법이 서로 달라 혼돈이 따르기도 하는데, 예를 들면 오라토리오나 칸타타는 음악계에서는 성음악에 포함시키지만, 교회 문헌에서는 전례음악이 아니라는 이유로 성음악 범주에서 제외시키고 있다.


오라토리오, 칸타타 탄생

베네치아 악파에서 악기를 전례음악에 도입한 일은 교회음악에 매우 큰 파장을 일으켰다. 전례음악에 오케스트라가 들어와 화려함의 극치를 이뤘다. 때마침 세속음악에 오페라가 탄생하고, 교회음악에 오라토리오와 칸타타가 태어나는데, 여기에서 오케스트라는 성악과 역할을 분담하며 중요한 협연체가 된다. 오라토리오나 칸타타가 가톨릭교회의 전례지침에 의거해 전례에서 사용될 수 없다고 해서 교회음악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고, 교회가 외면해 버릴 수도 없게 된다. 나름대로 역할을 하고 신자들 신앙생활에 도움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트리엔트 공의회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오케스트라도 교회 안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다프네(Dafne, 1598)'가 오페라의 첫 작품이지만 대본과 몇몇 노래들만 전해지고 있다. 공식적으로는 1600년에 야코포 페리(1561~1633)와 줄리오 카치니(1550년께~1618)의 합작품인 '에우리디체(Euridice)'가 전해지는 오페라 중 첫 작품이다. 초기에는 쳄발로 하나의 반주로 노래됐지만, 오페라는 곧 기악단의 반주를 갖게 됐다.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Orfeo, 1607)'에서는 벌써 오케스트라의 협연이 나타난다. 그리고 당대 대가들은 앞을 다퉈 오페라를 작곡하니, 이제는 음악이 교회 울타리를 넘어 세속 무대에서도 자생할 기반을 닦고 있었다.

이러한 극음악의 발전은 교회음악에도 자극이 됐다. 우선 오라토리오는 성 필립보 네리(1515~1595)가 젊은이들의 신앙교육을 위해 시작한 모임에서 대중성가인 '라우다(Lauda)'를 부르는 것에서 출발했다. 이 모임이 1575년에 '오라토리오 협회'로 교황청의 인준을 받는다. 여기에 아니무치아(1500?~1561)나 아네리오(1560?~1614) 같은 음악가들이 가세하면서 차차 음악 형식을 갖춰 갔다. 자코모 카리시미(1605~1674)는 15개의 라틴어 오라토리오를 썼는데, 그는 오라토리오의 배역에 진행자인 사가(史家, Historicus)를 뒀다. 이는 후기 오라토리오의 복음사가(Evangelist)의 원형이며, 오라토리오와 칸타타를 구별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기도 한다. 즉 두 악곡의 전체 구성이 비슷할 경우 사가가 있으면 오라토리오요, 사가가 없으면 칸타타라고 부른다.

칸타타의 기원은 이탈리아어로 부르는 세속노래인 '마드리갈(Madrigal)'이었다. 그런데 다성음악의 마드리갈은 즐기는 음악으로는 부족해 차차 하나의 가락(멜로디)과 그에 따르는 화음의 노래로 변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초기 형태의 '아리아(Aria)'인 셈이다. 칸타타라는 이름으로 처음 발표된 곡은 알레산드로 그란디(1575~1630)의 '독창을 위한 칸타타와 아리아'다. 이런 이탈리아의 초기 칸타타는 17세기 중엽에는 제법 발달하고 많은 작품을 보여준다. 프랑스에서도 세속적 재미를 위해 많이 유행했지만, 결정적으로는 독일에서 바흐가 교회음악으로 변신시켜 사용함으로써 그 화려한 세계를 열었다. 형식이 취약한 프로테스탄트 전례에서 칸타타는 특별한 대접을 받으며 열광적 환영을 받았다. 바흐의 교회 칸타타는 주일 복음을 내용으로 작곡되고, 예배에서 복음 봉독 후에 성대하게 연주됐다. 때로는 1부와 2부를 가진 대형 칸타타들이 있어서 1부와 2부 사이에 설교가 들어가기도 할 정도였다.


오케스트라 미사곡

이렇게 기악의 발달은 바로크 시대를 활짝 열었고, 로마교회의 지침을 먼 기준으로 삼으면서 미사곡조차도 이제는 오케스트라 협주가 필수적이 됐다. 특히 독일어권에서 이런 경향이 발달했고, 프랑스 교회도 이를 따르면서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됐다. 로마와 붙어 있는 이탈리아 음악가들이 비교적 위축돼 있는 동안에 프랑스 바로크 음악가 마르캉투안느 사르팡티에(1634~1704)나 프랑수아 쿠프랭(1668~1733) 등은 마음껏 음악적 재능을 발휘하며 오케스트라 미사곡들을 썼다. 그 다음 세대에는 독일의 '비엔나 고전파'라고 불리는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1732~1809)이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1791), 프란츠 피터 슈베르트(1797~1828) 등의 미사곡 활동이 눈에 띄었다. 이 미사곡들은 길이가 길었고, 따라서 미사 길이도 길어져 로마 전례지침과는 자연 거리가 벌어졌다. 하지만 여기에 조그만 제동이 걸리기도 했다. 모차르트가 봉직하던 잘츠부르크에서는 당시 영주가 히에로니무스 그라프 폰 콜로레도 대주교였고, 자기 미사는 강론을 포함해 한 시간이 넘지 않아야 한다고 했단다. 그러니까 모차르트는 대부분의 미사곡들을 짧게 써야 했고, 자신의 음악적 상상을 마음껏 펼치지 못해 늘 불만이었다. 그러나 누가 미래를 알 수 있었겠는가? 지금은 미사가 길어지기를 원치 않는 대중들과 전례지침 때문에 모차르트의 미사곡이 가장 선호된다.

역사가 변하면서 다음 세대인 낭만주의 시대 음악가들에서는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규모가 커지고 미사곡의 길이도 더 길어졌다. 여기에 전례음악 자성론이 머리를 들면서 프랑스의 솔렘 수도원을 중심으로 한 그레고리오성가의 부활운동과 독일어권에서의 체칠리아협회라는 교회음악 복고운동이 예고됐다.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

바흐가 봉직하던 라이프치히 토마스교회 앞마당에 세워져 있는 동상.


바흐는 유명한 만큼 일화도 많다. 북독일 오르가니스트로 유명한 디트리히 북스테후데(1637?~1707) 밑에서 공부하다가 그가 자신을 딸과 결혼시키려는 낌새를 알아차리곤 야반도주했다는 얘기도 있고, 당대 대가인 게오르그 필립 텔레만(1681~1767)과 오르간 즉흥연주 시합을 갖기로 했는데 막상 당일에 텔레만이 기권하고 나타나지 않았다는 얘기도 있다. 동갑내기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헨델(1685~1759)과 서로 만나고 싶어 했지만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6개의 OO곡'이라는 작품들을 많이 썼는데, 이는 창세기에서 나오는 완전한 숫자인 7에 대한 경외심 때문에 그랬다고도 한다. 교회가 분리된 지 150여 년이 되면서 개신교 도시인 라이프치히의 교회들은 신자들이 오지 않아 거의 다 문을 닫았는데, 바흐의 칸타타가 연주되면서 하나씩 다시 문을 열고 성황을 이루게 됐다고도 한다. 교회가 음악을 육성해 어려운 때 효도를 받은 대표적 사례다. 이 사람도 실은 역사에서 잊혔다가 사후 100년에 라이프치히 음악당 게반트하우스의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부임한 펠릭스 멘델스존(1809~1847)이 그의 '마태 수난곡'을 연주하면서 음악사 안에서 부활했다.

바흐가 '근대 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데는 확실한 이유가 있다. 바흐 이전 음악과 바흐 이후 음악 사이에 커다란 변화와 차이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첫째 바흐 이전까지는 역시 교회선법 음악이 중심이었다. 그러나 바흐 이후에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성음악이 중심이 됐다. 조성음악은 이미 팔레스트리나에게서 조짐이 있었지만, 이를 완성시켜 변화의 기점을 이룬 것은 바흐 시대라고 한다.

둘째 바흐 이전까지 음악 흐름 중에는 자주 우리 귀에 매끄럽지 않은 경우가 있는데, 이는 화음 진행에서 변격 진행이 절반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반면 바흐 이후 음악 흐름은 매우 자연스러운데, 이는 정격 진행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5도 화음(V 솔, 시, 레)에서 4도 화음(IV 파, 라, 도)으로 연결을 하면 너무 듣기 불편해 근대화성에서는 금지한다. 그러나 거꾸로 IV-V의 연결은 듣기 매우 편하다. 앞엣것은 변격 진행이고, 뒤엣것은 정격 진행이기 때문이다. 바흐 이전 곡을 보면, 앞엣것도 심심치 않게 나타나지만, 바흐 이후에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셋째 바흐 이전에는 합창의 각 성부도 계속 부드러운 연결을 유지해야 했다. 반면에 바흐는 성부 하나하나의 흐름을 부드럽게 하기보다는 화음 연결이 부드럽게 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러자니 자연 각 성부 선율은 부자연스러워도 허용이 됐다. 예를 들면 소프라노는 당연히 '시'에서 '도'로 자연스럽게 흐르며 노래를 끝내지만, 테너라면 '시'에서 '솔'로 꺾여 내려올 수도 있게 됐다. 선율 연결보다는 화성 연결을 더 중요시했던 셈이다. 이렇게 음악이 오늘 우리 귀에 자연스럽게 정리된 구분점이 바흐였기에 우리는 그를 '근대음악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다.

[평화신문, 2014년 1월 12일,
백남용 신부(서울대교구, 교회음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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