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음악편지: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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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5-08-10 | 조회수4,875 | 추천수0 | |
[아가다의 음악편지]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얼마 전 한 신부님으로부터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클래식 음악을 들으려고 하는데, 좋은 작품을 추천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 신부님은 지난해부터 꽤 오랜 기간 유명 레코드사의 명곡 컴필레이션 음반 여러 장을 반복적으로 들으시면서 클래식 음악과 가까워지려고 노력하셨습니다. 저도 기억하기 힘든 작곡가들의 생몰 연도를 줄줄 외우실 만큼 열의가 있는 분이었죠. 그렇게 남다른 워밍업 기간을 거친 분이 ‘본격적으로’ 클래식 감상을 하시겠다고 하는데, 과연 어떤 곡이 좋을까 이틀쯤 고민하다가 더 늦어지면 안 될 것 같아 작곡가와 작품 제목을 문자로 알려드렸습니다.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들어보세요!” 그렇게 작품을 추천해 드리고 이제 일주일이 지났는데요. 잘 듣고 계신지, 어떻게 들으셨는지, 지금까지는 아무 말씀이 없으십니다. ‘처음부터 너무 부담스럽게 긴 곡이었나?’, ‘곡에 대한 짧은 설명이라도 메일로 보내 드릴 걸 그랬나?’ 살짝 불안해집니다. 그래서 이번 호에서는 저의 추천곡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신부님을 포함해 클래식 음악 감상에 뜻이 있는 신자들과 나누려고 합니다.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창작 배경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바로 이 음악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숙면을 취하게 하려는 의도에서 작곡됐다는 것인데요. 바흐가 자신에게 도움을 주었던 한 귀족이 불면증으로 고생하자, 그 귀족의 머리맡을 밤마다 지키고 있는 전속 음악가가 연주할 수 있도록 이 작품을 작곡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골드베르크’라는 제목은 바로 그 전속 음악가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고 하는데요. 이 일화의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청취자의 입장에서 이 작품은 듣다 보면 자장가처럼 잠이 잘 올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일단 70분을 훌쩍 뛰어넘는 곡의 길이가 소설로 치자면 장편소설에 해당하니까요. 70분! 말이 그렇지, 단 한 대의 악기로 한 시간이 넘는 긴 대곡을 듣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음악회에 가서 듣는다면 모를까, 집에서 음반을 통해 전곡을 듣는다는 것은 더욱 그렇죠. 본인의 강력한 의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요즘처럼 바쁜 세상에 한 시간 넘게 온전히 음악에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이 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십중팔구 다른 볼일이 계속 생기는 바람에 전곡 감상은 흐지부지되어 버리고 말죠.
연주자의 입장에서도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만만치 않은 깊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피아니스트가 만일 무인도에 가게 된다면 무엇을 챙겨가겠느냐는 질문에,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악보를 챙겨, 여생을 모조리 들이부어도 모자랄 만큼 연습을 하겠다.”는 답변을 했을 만큼, 시간과 공력을 필요로 하는 작품인 것이죠.
그렇다면 바흐는 이 대작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어떻게 구성했을까요? 긴 여정은 ‘아리아’라고 하는 주제에서 시작됩니다.
오른손이 한 선으로 된 멜로디를 연주하고 왼손이 반주를 하는 단순한 구성의 이 아리아는 곧 이어질 서른 개 변주곡의 모태입니다. 차분하고 단아한 이 멜로디를 가지고 바흐는 아리아의 화성 진행은 유지하는 가운데, 서른 가지의 다른 모습으로 음악을 전개해 나갑니다. 그중에는 16분음표의 빠른 진행으로 생기가 가득한 곡이 있는가 하면, 더욱 차분한 분위기로 감상에 젖어들게 만드는 곡이 있고, 카논의 모습을 한 곡도 있습니다. 즉흥적이고 화려한 느낌의 곡도 있고, 바흐가 가족들과 즐겨 불렀다는 독일 민요가 절묘하게 끼어들어간 곡도 있죠. 그렇게 각양각색의 서른 개의 변주를 드라마틱하게 펼쳐낸 바흐는 작품의 마지막에 처음에 들었던 그 단정한 아리아를 다시 한 번 배치합니다. 같은 곡이지만 긴 여정 끝에 다시 만나는 이 아리아는 또 다른 느낌을 줍니다.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이’와도 같은 이 아리아를 만나기까지, 그 과정이 마치 인생의 이치와 닮아있다며 철학적인 의미를 부여하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몇 년 전 이 작품을 공연장에서 실제로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음반을 통해 수없이 들었던 음악이었지만, 공연장에서 듣는 이 작품은 더 큰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휴식 시간 없이 집중해서 연주하는 피아니스트의 모습도 존경스러웠고,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서른 개의 다채로운 변주를 이끌어낸 작곡가의 아이디어와 능수능란함에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종교작품이 아니었음에도 엄숙하고 경건했습니다. 음악에 임하는, 삶에 임하는 바흐의 태도를 느낄 수가 있었죠.
지금까지 바흐의 명곡 골드베르크 변주곡에 대한 이야기 전해 드렸는데요. 알게 모르게 이 작품의 단편들은 여러분이 영화를 통해서도 이미 많이 접하셨습니다. <잉글리시 페이션트>, <양들의 침묵>, <설국열차> 등 유명한 영화의 배경 음악으로 사용됐으니까요. 다양한 장르의 영화 속에서 골드베르크 변주곡는 어떤 맥락으로 등장했을까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그런 이야기를 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그때까지 수면용으로도 좋으니 골드베르크 변주곡과 가까이 지내시고 계세요!
[평신도, 2015년 여름호(VOL.48), 양인용 아가다(KBS 1FM <새아침의 클래식> 작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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