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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상철 신부의 성가 이야기: 115번 수난 기약 다다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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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7-03-30 조회수5,726 추천수0

[이상철 신부의 성가 이야기] (57) 115번 수난 기약 다다르니 (상)


가장 오래된 우리말 사순 성가… 파리외방전교회 통해 전해져 1924년 「죠션어 셩가집」 수록

 

 

- 성가 ‘수난 기약 다다르니’의 프랑스 선율을 담은 1903년 출간된 프랑스 성가집.

 

 

아마도 사순 시기에 가장 많이 부르며 그 분위기를 잘 표현하는 성가를 꼽으라면 대부분 주저 없이 115번 ‘수난 기약 다다르니’ 성가를 꼽지 않을까 한다. 그만큼 이 성가는 수난을 앞둔 예수님의 절절한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는 성가다.

 

이 성가는 우리말로 나온 사순시기 성가 중 아마도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니고 있는 성가라고 할 수 있다. 

 

이 노래는 1924년 최초로 등장한 가톨릭 성가집인 「죠션어 셩가집」 제1판에 ‘슈난 긔약 다다르니’라는 제목으로 38번 성가로 수록돼 있다. 당시 우리나라에 파견된 파리외방전교회 사제를 통해 수록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성가의 작곡자는 현재 가톨릭성가에 ‘Campra’라고 적혀 있다. 「정선 가톨릭성가집」에 표기되어 있던 것을 그대로 가지고 온 것이다. 아마도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의 음악감독으로도 재직했던 프랑스 작곡가 캉프라(Andre Campra, 1660~1744)를 말하는 듯하다.

 

선율은 Au sang qu’un Dieu(하느님께서 피 흘리실 때가 다가왔도다)라는 제목으로, 작곡자를 알 수 없는 프랑스의 전통 선율이다. 

 

Au sang qu’un Dieu는 특별히 사순시기, 그 중에도 성 금요일에 많이 불렸던 프랑스 성가 가사의 첫 줄이다. 가사를 쓴 이는 17세기 말부터 18세기 초까지 활동했던 프랑스 가톨릭교회 신학자이며 시인이자 저술가였던 페넬롱(Franois Fnelon,1651~1715) 대주교가 쓴 것이다. 

 

선율은 바로크 시대 음악가 페르골레지(Giovanni Battista Pergolesi, 1710~1736)가 자신의 오페라에 사용하면서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앞서 언급한 바대로 이 성가가 우리 성가집에 처음 나타난 것은 1924년 출판된 「죠션어 성가집」이다. 

 

우리나라는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朝佛修好通商條約)’으로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게 됐는데, 이후 천주교 신자가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자체적인 성가책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1922년 유세준(Devred Emile) 보좌 주교가 사리원본당의 이기준 신부에게 7월 11일 보낸 서한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또 말씀드릴 것은 여섯 달 후에 라리보 신부와 비에모 신부가 그와 같은 성가집을 출간할 예정이니 조선 성교회를 위하여 성가집 하나가 필요합니다.”

 

이 기록으로 보아 첫 성가집을 출간하는 데 있어 프랑스 선교사였던 원형근(Larribeau Adrien) 신부와 우일모(Villemot Paul) 신부가 관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3월 26일, 이상철 신부(가톨릭대 교회음악대학원 교수)]

 

 

[이상철 신부의 성가 이야기] (58) 115번 수난 기약 다다르니 (하)

 

최양업 신부가 지은 천주가사에서 유래

 

 

- 천주가사 중 ‘사주구령가’. 사주구령가는 조선 말기 천주교 박해시기에 널리 전해지던 천주가사들을 한데 모아 필사한 가첩이다.

 

 

작곡자를 알 수 없는 선율로 이뤄진 115번 성가 ‘수난 기약 다다르니’는 1924년 출판된 「죠션어 성가집」에서부터 등장했다. 이 선율은 당시 우리나라에 선교사로 파견됐던 원형근(Larribeau Adrien) 신부와 우일모(Villemot Paul) 신부가 관여해 제작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수난 기약 다다르니’와 같이 4.4조로 이뤄진 가사는 김수정의 논문 ‘한국 가톨릭교회 최초의 공식 성가집인 「죠션어 셩가집」(1924)에 대한 연구’에도 그 학문적 해석이 나온다. 논문에 따르면 ‘수난 기약(受難期約)’은 그 가사의 문학적 양식으로 보아 천주가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분류되고 있으며, 그렇다면 이 성가의 가사는 박해시대 때부터 이어져 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박해시기 우리나라 천주교인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사람들은 글을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던 이들이었다. 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며 신앙을 전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도구로 사용되었던 것은 성화(聖)와 더불어 ‘천주가사(天主歌辭)’라는 노래였다. 가사문학(歌辭文學)의 영향을 받아 주로 4.4조로 이뤄진 ‘천주가사’는 초기에는 이벽의 ‘천주공경가’와 정약종의 ‘십계명가’와 같은 것들이 있었다. 이후 최양업 신부 등에 의해 더욱 활발히 창작되다가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고 프랑스 선교사들이 입국해 유럽의 성음악을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사라져갔다. 이즈음 출판됐던 「죠션어 성가집」에는 주로 프랑스의 선율이 주를 이루고 있어서 115번 성가는 천주가사와 프랑스 선율의 융합과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115번 성가 가사의 기원으로 여겨지는 내용은 ‘천주가사’의 하나인 ‘삼세대의(三世大義)’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성경의 내용을 4.4조로 엮어 만든 이것은 최양업 신부의 저작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175행부터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등장한다. “슈난긔약 다다르니 산원으로 피하실졔 십이종도 츄죵야 젼후좌우 호위 니….” 이후 이어지는 구절들을 보면 「죠션어 성가집」에 수록되었던 가사와 거의 동일한 내용이 등장하고 있다. 「죠션어 성가집」에는 예수님의 체포와 무덤에 모시는 부분까지 내용을 이야기 형태로 담아 모두 10절로 이루어진 가사가 실려있다. 그런데 이후 가사에 변화가 생겨 「정선 가톨릭 성가집」에서부터 교훈적 내용의 4절로 축약해서 수록하기 시작했고 이 가사가 현행 성가집으로 이어지고 있다.

 

현재 구전으로 내려오던 천주가사를 기억하고 있는 구교 신자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형편이다. 순교자들이 박해시대를 견디어 내며 불렀던 우리 고유의 성가가 서양 음악에 밀려 거의 사라져 버린 것이 오늘날 우리 교회의 안타까운 현실이기도 하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4월 2일, 이상철 신부(가톨릭대 교회음악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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