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천상의 소리 지상의 음악가: 미하엘 하이든이 작곡한 성가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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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9-07-29 | 조회수5,454 | 추천수5 | |
[천상의 소리 지상의 음악가] 미하엘 하이든이 작곡한 성가들
“역사는 1등만을 기억합니다.” 오랫동안 많은 이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이 문장은, 우리나라의 한 대기업이 회사 로고를 바꾸면서 사용한 기업 광고 문구이다. 세계 1등 기업이 되겠다는 야심을 세상에 알리는 선전 포고나 다름없었다.
한편으로 이 문구에서 ‘1등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실적 지상주의에 찌든 당시 한국 사회의 서글픈 단면을 느낀 이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누군가는 이 문구에 암시된 폭력성, 곧 대다수 소시민의 삶의 의미를 부정하는 듯한 태도에서 분노를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역사는 정말 1등만을 기억하는 것일까? 음악사는 이것이 반은 맞고, 반은 그렇지 않음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작곡가 ‘미하엘 하이든’(1737-1806년)의 삶과 음악들을 통해서 역사가 기억하는 곡이란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 보려 한다.
형의 그늘에 가려진 미하엘 하이든
음악사에서 ‘위대한 작곡가’라고 부르는 이들은 시공간을 뛰어넘는 예술적 가치를 지닌 ‘명작’이라 불리는 작품을 남긴 이들이다. 다시 말해 예술적으로 ‘최고 수준’을 뜻하는 ‘클래식’의 반열에 오른 작곡가들이라 할 수 있다. 대중음악과 대응하는 것으로 ‘고전 음악’이라 부르는 것의 이면에는 이런 가치 판단이 개입되었다.
고전 음악은 시간이 흘러도 반복해서 연주되고 감상될 뿐만 아니라, 학술적으로도 계속해서 연구된다. 그 가운데 어떤 곡들은 재평가받기도 한다. 대다수의 명작이 만들어졌던 순간부터 그 가치를 인정받았던 것은 아니다. 그 시대에는 인정받지 못했지만 후대에서야 빛을 밝힌 음악이 있는가 하면, 그 당시에는 명성을 얻었지만 갈수록 연주되지 않고 망각 속에 묻혀 이름만 남은 경우도 존재한다.
미하엘 하이든은 우리가 흔히 ‘교향곡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 하이든이 아니다. ‘파파 하이든’은 ‘요제프 하이든’(1732-1809년)을 말한다. 미하엘은 요제프의 다섯 살 터울의 친동생이다. 요제프 하이든의 음악은 그의 생전에도 명성이 대단했다. ‘교향곡의 아버지’라 불릴 정도로 요제프의 음악은 오늘날에도 큰 울림을 준다. 그 반면 미하엘의 작품은 형의 그늘에 가려 오늘날 아는 이가 많지 않다.
그렇다고 미하엘의 작품이 ‘잊혔다.’라고 말하는 것은 반만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여전히 그의 곡이 신자들을 통해 종종 불리기 때문이다. 「가톨릭 성가」 27번 ‘이 세상 덧없이’와 32번 ‘언제나 주님과 함께’, 78번 ‘영광의 왕께 찬미를’, 167번 ‘생명이신 천상 양식’은 모두 미하일이 작곡한 성가이다.
더불어 「가톨릭 성가」에는 형 요제프의 미사곡도 수록되었다. 그렇지만 337-345번에 해당하는 이 미사곡이 요제프가 작곡한 곡인지는 더 따져 봐야 할 문제이다. 곧 미하엘의 작품이 요제프의 작품으로 둔갑한 것은 아닌지를 말이다.
실제로 요제프 하이든의 작품으로 알려졌던 100곡 이상의 미사곡이 실제로는 다른 작곡가의 작품이었다고 밝혀진 바 있다. 337-345번의 미사곡 또한 지난날에는 요제프 하이든의 작품 목록에 있던 곡이었으나, 오늘날 미하엘의 곡이라는 주장으로 정리되고 있다. 실제로 ‘빈 소년 합창단’이 노래한 ‘하이든: 독일 미사’ 음반에는 이 미사곡을 ‘미하엘’이 작곡했다고 명시했다.
이는 미하엘보다 요제프가 더 유명해서 생긴 일일 것이다. 요제프의 이름을 달고 시장에 나오면 악보가 훨씬 많이 팔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이든의 경우만이 아니라 저작권의 개념이 희미하던 지난날에 다른 유명 작곡가에게도 흔히 일어나는 사례이다.
음악 가문이 아니었던 하이든
음악사를 살펴보면 19세기 이전의 음악가들은 가업을 잇는 경우가 흔했다. 대표적으로 바흐와 모차르트 가문은 대를 이어 음악인의 길을 걸은 ‘음악 가문 출신’이다. 자신이 못다 이룬 성공을 아들에게 이루게 하려고 애쓴, ‘레오폴드 모차르트’와 같은 극성 아버지가 등장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하이든 가문의 경우는 달랐다. 하이든 형제의 부모는 음악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아버지 마티아스는 나무 수레바퀴를 만드는 목수였고, 어머니 마리아는 궁에서 요리를 거들던 시중이었다.
오스트리아 남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하이든 형제는 아주 이른 나이에 오늘날 ‘빈 소년 합창단’의 전신인 ‘성 슈테판성당’의 소년 성가대 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시골 학생이 노래를 빼어나게 잘해서 명문 음악학교에 입학하고자 수도인 오스트리아 빈으로 상경한 것이다.
그곳에서 이들은 당대의 가장 훌륭한 선생들로부터 체계적인 음악 수업을 받게 된다. 이는 이들이 음악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변성기가 온 요제프가 더는 소년 합창단에서 노래할 수 없게 되자 미하엘이 형의 뒤를 이었다. 18세기 대부분의 음악가가 그러했듯이 미하엘 또한 오르간과 바이올린 연주에 빼어났고, 작곡에도 소질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 그는 학생 시절에 대부분의 교회 음악을 작곡했다.
미하엘은 25살 때부터 잘츠부르크 궁정 교회의 음악인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빈을 떠난 그는 모차르트의 도시로 이름난 오스트리아 작은 도시 잘츠부르크에서 생애 대부분을 보냈다. 그곳에서 미하엘이 함께 일한 음악가 중에는 레오폴드 모차르트도 있다. 그의 아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도 이곳 궁정 음악가로 일하게 된다.
모차르트 부자는 미하엘의 음악을 매우 높이 평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1780년대에 음악 시장에서 출판된 미하엘의 교향곡 악보들을 소장할 정도로 그의 음악에 큰 관심을 보였다.
마지막 세대의 교회 음악가
하이든은 평생 잘츠부르크라는 작은 도시의 궁정 음악가로 지냈지만, 그 당시 유행하던 새로운 양식이 된, 단순하면서도 듣기 쉬운 교회 음악으로 명성을 얻었다. 교회 음악가로서의 그의 명성은 잘츠부르크를 넘어 대도시 빈까지 퍼졌고, 오스트리아의 여왕이 직접 그에게 미사곡을 위촉하기도 했다.
하지만 유럽 전역을 휩쓴 ‘프랑스 대혁명’의 열풍은 당시 유럽 음악 사회를 재정적으로 뒷받침하던 귀족과 왕족의 지배 체제를 무너뜨렸다. 결정적으로 미하엘 하이든은 교회 음악의 생산 체계를 뒷받침하던 마지막 세대의 음악가라 할 수 있다.
교회 음악의 영광이 저물어가던 시기에 주옥같은 교회 음악을 남긴 미하엘 하이든. 교회 음악이 절정이었던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오늘날 그의 명성은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가 기억하는 1등이 아닌들 어떠하랴. 그의 이름이 새겨진 아름다운 성가가 신자들을 통해서 계속해서 불릴 것이니!
* 정이은 안드레아 - 서울대학교에서 음악학을 가르치고 있다. 서울대학교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음악학을 공부하고, 홍콩대학교에서 음악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19년 7월호, 정이은 안드레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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