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천상의 소리 지상의 음악가: 시간의 종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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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9-09-24 | 조회수4,363 | 추천수1 | |
[천상의 소리 지상의 음악가] 시간의 종말
지구촌 스포츠 축제인 국제 올림픽 경기 대회를 창시한 피에르 드 쿠베르탱의 아버지 샤를 쿠베르탱은 그림에 조예가 깊은 화가이다. 파리외방전교회에 소장된 그의 그림 ‘출발’(Le Depart)은 선교사 파견 예식을 마친 뒤 서로를 축복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작품으로 남은 프랑스 선교사들
1868년에 완성된 이 그림에 등장하는 네 명의 신부는 모두 1866년 병인박해 때 한국 땅에서 순교한 파리외방전교회의 위앵, 도리, 볼리외, 브르트니에르 신부이다. 이들 가운데 왼쪽 두 번째 도리 신부와 볼을 맞대고 축복의 인사를 건네는 이는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작곡가 샤를 구노이다.
한때 파리 생쉴피스신학교를 다녔으며 파리외방전교회에서 음악을 담당하기도 했던 구노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세 명의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 곧 앵베르, 샤스탕, 모방을 기리는 노래를 작곡하기도 했다. 그 곡이 바로 「가톨릭 성가」 284번 ‘무궁무진세에’이다.
파리외방전교회는 1830년대부터 박해로 신음하던 조선 땅에 신부들을 파견하기 시작했다. 파리외방전교회 회칙에는 선교 수도회의 “전통에 따라 선교 지역으로의 출발은 돌아온다는 생각을 갖지 않는 것”(194항)이란 항목이 있다. 그 당시 조선 땅에 들어간다는 것은 분명 죽음을 각오한 일이었다. 이처럼 그림 ‘출발’의 이면에는 죽음을 각오한 출발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림 중앙의 볼리외 신부는 내리쬐는 빛을 올려다보고 있다. 서른도 채 되지 않았을 이 젊은 신부에게 인간 세상에서의 죽음이 그다지 위협적이지 못했던 듯싶다. 현세와의 영원한 이별이 될 수도 있는 이 ‘출발’이 가진 의미가 이처럼 그림 속 인물들의 얼굴에서 각기 다른 모습으로 드러난다. 그렇지만 선교사들에게 ‘출발’은 세속에 얽매이는 것이 아닌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행위임을 헤아려 본다.
제 영혼은 주님께로 향해 있습니다
김대현 감독의 다큐멘터리 ‘시간의 종말’은 19세기 조선 땅으로 파견된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의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내레이션을 통해서 나지막이 울리는, 샤스탕 신부가 순교하기 직전 가족에게 보낸 마지막 작별 편지는 죽음을 각오한 선교사들의 ‘출발’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알려 준다.
“이미 저는 언젠가 하느님을 위해 어떤 고통을 겪어야 함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주교님이 당신을 따라오라고 저를 부르셨을 때 저는 제가 순교의 영예를 받게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조선의 땅에 도착했을 때 다섯 명의 신자가 고문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저에게 성사를 받은 많은 사람과 새 신자들, 10-15세 아이들까지 혹독한 고문을 견디며 보여 준 모범 덕분에 큰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 제 영혼은 주님께로 향해 있습니다.”
조선 땅을 밟은 지 3년 만인 1839년 샤스탕 신부는 비슷한 시기에 조선 땅으로 건너온 앵베르, 모방 신부와 함께 새남터에서 참수되었다. 그의 나이 서른여섯 살 때였다. 비단 샤스탕 신부뿐만이 아니었다. 역사가 미처 기억하지 못하는 수많은 조선의 신앙 선조가 하느님을 믿고 따랐다는 이유로 무참히 처형되었다. 하느님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놓았던 신앙 선조들은 그렇게 살과 피를 이 땅 깊숙이 아로새겼고, 우리 교회는 이 땅 위에서 자라날 수 있었다.
시간의 종말을 위한 사중주
다큐멘터리 ‘시간의 종말’은 이들의 죽음이 ‘침묵’이 아니라 ‘완성을 향한 움직임’이라는 메시지를 20세기의 위대한 작곡가 올리비에 메시앙의 작품 ‘시간의 종말을 위한 사중주’를 통해 전해준다.
‘시간의 종말’이라는 다큐멘터리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메시앙의 이 음악은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님과 신앙 선조들의 순교의 삶을 묵직한 울림으로 표현한다.
다큐멘터리의 중요한 장면에서 배경음악으로 삽입되는 ‘시간의 종말을 위한 사중주’는 그런 의미에서 이 다큐멘터리의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다.
‘시간의 종말을 위한 사중주’의 특이한 점은 일반적인 사중주와는 다르게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그리고 클라리넷이라는 이례적인 편성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메시앙이 이 곡을 작곡할 당시의 주변 상황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이 곡이 작곡된 1940-41년 당시 메시앙은 독일군의 포로로 수용소에 있었는데, 그 수용소에는 바이올린, 첼로, 클라리넷 연주자도 함께 수감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1월 15일 한겨울, 이들 연주자의 연주를 통해 삶과 죽음의 경계에 내몰린 5천 명의 전쟁 포로 앞에서 초연되었다.
메시앙은 이 악보의 서문에 이 곡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요한 묵시록의 한 구절을 남겼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일곱째 천사가 불려고 하는 나팔 소리가 울릴 때, 하느님께서 당신의 종 예언자들에게 선포하신 대로 그분의 신비가 완전히 이루어질 것이다”(10,6-7).
200여 년 전,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이 조선 땅에 흩뿌린 피는 하느님 말씀의 씨앗이 뿌리내리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이제는 거꾸로 사제, 수도자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는 오늘날의 프랑스 교회에 성직자를 파견할 정도로 한국교회는 실로 기적과도 같은 성장을 일구어 냈다.
샤를 쿠베르탱의 그림 ‘출발’이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한순간을 포착하여 담았다면, 이 선교사들이 이국땅 조선에서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남기고자 했던 그 의미는 우리 신앙인을 통해서 완성되어 갈 것이다. 곧 그 출발은 시간의 종말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의 완성을 향한다는 사실을, 더불어 선교사들을 통해 뿌리내린 그 사랑의 삶을 꽃피워야 할 임무가 이 땅의 신앙인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말이다.
* 정이은 안드레아 - 서울대학교에서 음악학을 가르치고 있다. 서울대학교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음악학을 공부하고, 홍콩대학교에서 음악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19년 9월호, 정이은 안드레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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