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천상의 소리 지상의 음악가: 포레와 지난날의 전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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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9-10-30 | 조회수4,428 | 추천수1 | |
[천상의 소리 지상의 음악가] 포레와 지난날의 전통
지금의 우리 사회가 평화롭고 천국과 같은 곳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 것 같다. 텔레비전을 틀면 오늘도 이 사회의 부끄럽고 끔찍한 모습과 마주하니 말이다. ‘왜 이런 불행한 시대를 살아야 하는가?’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좋지 않은 소식들에 울분이 치밀 때는 텔레비전을 끄고 음악을 듣는다. 음악이 주는 평화가 잠시나마 세상의 근심과 걱정들을 잊게 해 준다.
어지러운 시대의 교회 음악
사실, 시대를 막론하고 세상은 항상 시끄러웠다. 프랑스 작곡가 가브리엘 포레(Gabriel Fauré, 1845-1924년)가 살았던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의 세상도 그러했다. 오늘날 이 사회가 혼란스럽다고 느끼는 것만큼이나 그 당시 유럽 사회는 거대한 가치관의 혼란과 마주하고 있었다.
프랑스 혁명 이후 사람들은 세상이 좋아질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그 기대감은 처참히 무너졌다. 그 뒤로도 사람들은 더 나은 세상을 바라며 힘겹게 싸워야만 했다. 그 속에서 유럽 교회 또한 가치관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다. 1859년 영국의 생물학자 다윈이 발표한 「종의 기원」은 많은 이를 무신론자로 만들었다. 1882년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아예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다. 심지어 신을 죽인 것은 바로 ‘우리’라고 밝혔다.
근대 과학은 눈부신 성장을 거듭했고, 유럽과 미국 각지에서 진행된 산업 혁명은 사람들의 삶을 급속도로 바꾸어 놓았다. 또한, 왕이 쥐고 있던 권력은 점차 자본을 가진 이들에게로 옮겨 갔다. 이러한 혼돈의 세상 속에서 사람들은 점차 교회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 당시 유럽 사회가 겪은 극심한 변화는 간접적이긴 하지만 교회 음악에도 영향을 미쳤다. 중세 이래 교회는 음악의 가장 큰 후원자였다. 많은 작곡가가 교회에 고용되어 교회 전례 음악을 만들었고, 이 음악들은 서양 음악 문화를 찬란히 꽃피우게 한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대혁명 이후 작곡가들은 그들의 생명줄과 같았던 교회와 궁정을 떠나 홀로서기를 해야 했다. 더불어 지난날 음악가들이 교회를 위해 쓴 미사곡이나 모테트와 같은 음악 장르들도 모두 시대에 뒤처진 옛것이 되고 말았다.
교회 음악가로 성장한 포레
찬란했던 옛 영광을 뒤로하고 유럽의 교회 음악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던 그때, 가톨릭 전통이 강한 프랑스에서는 그러한 흐름을 거스르는 듯한 움직임이 있었다. 종교 음악을 전문으로 교육하는 학교가 세워졌던 것이다. 그 시작은 1817년 알렉상드르 쇼롱이 설립한 ‘고전 음악과 종교 음악을 위한 왕립 학교’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학교는 1830년 7월 혁명의 여파로 정부의 지원이 끊기자 곧 문을 닫아야 했다. 그렇지만 그로부터 23년이 지난 1853년 교육가 루이 니더메이에르가 쇼롱의 뜻을 이어 파리에 ‘에콜니더메이에르’라는 이름의 새 교회 음악 전문 학교를 세웠다.
포레의 아버지는 프랑스와 스페인의 접경지대의 중세 도시인 ‘푸아’(Foix)의 한 고등 사범 학교 교장이었다. 어린 포레는 어버지가 근무하던 학교의 부속성당에서 오르간을 연주하면서 몇 시간씩 놀았다고 한다. 포레의 재능을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그 성당에서 조용히 기도를 드리던 한 눈먼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포레의 아버지에게 포레가 음악에 재능이 있다고 전해 주었고, 그것이 포레가 본격적으로 음악 수업을 받게 된 계기가 되었다. 결국, 포레의 부모는 1년의 고민 끝에 여덟 살의 포레를 새로 개교한 파리의 에콜 니더메이에르로 유학을 보냈다.
그리하여 포레는 아홉 살이 되던 1854년에 입학하여 20세가 될 때까지 11년간 에콜 니더메이에르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며 교회 음악가가 되기 위한 훈련을 받았다.
학교 기숙사에서는 밤마다 종교 서적을 읽는 독서 모임에 참석해야 했고, 목요일과 주일마다 미사에 참례해야 했다. 가톨릭 신앙은 포레에게 삶의 한 부분이었다.
포레가 에콜 니더메이에르에서 받은 교육은 그레고리오 성가, 르네상스 시대의 다성 음악 등 지난날 절정에 오른 가톨릭 교회 음악의 전통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이 학교에서 보낸 11년의 수학 기간은 작곡가 포레의 작품 활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포레가 남긴 교회 음악들
포레가 이 학교를 졸업하던 1865년, 졸업 작품으로 제출한 ‘장 라신의 찬미가’(Cantique de Jean Racine)는 교내 작곡 부문의 최우수상을 받았다. 이 곡은 오늘날에도 널리 연주되고 사랑받는 포레의 대표곡이기도 하다.
포레는 학교를 졸업한 뒤 주로 교회 오르간 연주자로 활동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1905년 프랑스에서 가장 명망 높은 음악 교육 기관인 파리 콘서바토리의 원장직을 맡게 될 때까지 그는 생애의 절반 이상을 교회 음악가로 살았다.
그렇지만 교회 음악을 작곡해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포레가 젊은 시절에 작곡으로 번 돈은 미미했다. 그래서 그는 교회 오르간 연주자로 일하는 한편, 오르간, 피아노, 작곡 개인 교습을 하면서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새 작품을 쓰는 일은 여름휴가 기간 때나 가능했다. 오늘날의 음악가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포레는 많지는 않지만 보석 같은 19세기 종교 음악의 명작들을 남겼다. 그의 대작이라 할 수 있는 ‘레퀴엠’을 비롯해서, ‘성체 안에 계신 예수’(Ave verum corpus), ‘지존하신 성체’(Tantum ergo) 등 그가 남긴 종교곡들은 분명 기존의 가톨릭 교회 음악 전통 안에 있었지만, 그는 지난날의 교회 음악과는 달리 더욱 감정에 호소하는 음악을 썼다.
19세기의 예술가들이 시대에 뒤떨어진 옛 장르라고 생각했던 교회 음악은 포레의 손에서 새로운 생명력을 얻게 되었다. 포레는 당시 보수적인 교회 음악 작곡가들이 원했던 것과는 다르게 그레고리오 성가의 전통으로 돌아가지도 않았고 팔레스트리나 음악의 전통을 계승하지도 않았다.
포레는 지난날의 화려했던 교회 음악이 자신의 예술에 일종의 ‘도그마’처럼 작용하는 데 저항했다. 포레는 ‘성체 안에 계신 예수’와 ‘지존하신 성체’를 하나로 묶은 작품집인 ‘Op.65’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저는 제가 느꼈던 바대로 인간의 감정을 담았습니다.”
이는 포레가 교회 음악 작곡가로서 혼란스러운 시대로부터 자기 자신을 지켜 낸 방법이었다. 더불어 ‘감정’이라는 가장 원초적이며 인간적인 가치를 통해서 독창적이고 새로운 교회 음악을 펴낼 수 있었던 원동력이기도 했다. 포레는 혼란스러운 시대에 꿋꿋이 지켜 내야 할 가치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음악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 준다.
* 정이은 안드레아 - 서울대학교와 국민대학교, 한양대학교에서 음악학을 가르치고 있다. 서울대학교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음악학을 공부하고, 홍콩대학교에서 음악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19년 10월호, 정이은 안드레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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