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반주자의 글 - 전례음악에서의 경험과 생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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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임진경 | 작성일1999-08-10 | 조회수2,197 | 추천수15 | 반대(0) 신고 |
잠원동 성당 라우다떼 청년성가단 반주자로 있는 임진경 카타리나입니다. 인터넷이라는 좋은 도구를 최근 익히게 되어, 올라온 여러 글들을 의미 깊게 읽어보았습니다. 이곳 성가 게시판에서 다양한 목소리를 접하면서 반가움도 느끼고, 더불어 안타까움도 느꼈습니다. 그리고 얼마간의 생각 끝에, 지금껏 전례음악을 해 오면서 생각하는 것들과 여기서 느낀 것들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미 예전에 나왔던 내용이나 혹시 표현의 실수가 있더라도 너그러이 보아 주시고, 직접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의 생각으로 들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저는 개신교 대학에서 오르간을 전공했고, 전례음악에 관해 많은 고민을 해 왔습니다. 지난날 올바른 전례음악을 위해 평생을 걸겠다는 소명을 갖고, 의욕에 차서 뛰어 들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 소명의식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 소명을 가지고 해쳐나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지적했듯이 다양한 수준과 연령의 전례음악인들을 수용할 공식적인 기관이 충분치 않고, 지금 존재하고 있는 곳도 지역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교육 프로그램의 체계화와 조직화가 더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군소지역에서는 참된 전례음악에 대한 갈망으로 이런 저런 시도를 하고 있으나, 참된 전례음악에 대한 기준 자체가 인식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시도를 하는 사람과 신자들, 심지어 주례사제까지도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은 경우들을 봅니다.
먼저 시도를 하고 있는 음악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일반음악과 전례음악은 엄연한 차이가 있습니다. 아무리 일반음악에 대해 훌륭한 식견과 능력을 갖추었다 해도 전례의 흐름을 알고 있어야 전례에 봉사할 수 있습니다. 전례는 초대교회 때부터 이루어진 가톨릭 교회의 위대한 업적이며 신앙의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사보다도 훌륭한 기도가 없다고 하는데, 미사의 양식이 한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듯 전례음악도 정말 오랜 기간을 두고 형성되어 왔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신앙고백이나 시편의 찬미가는 지금 우리 세대들만이 부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선조들이 2천년간 불러 왔던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그레고리오 성가를 부르다 보면 처음엔 4선악보 보는 번거로움에 부딪치지만 부를수록 그 깊은 맛에 빠져드는 것 같습니다. 제가 성가대를 해 온 기간이 반주자로서만 12년 정도 되는데, 제가 다성음악에 눈을 뜬 것은 대학에 진학하고 나서였습니다. 처음엔 요란하고 규모가 큰 오케스트라용 합창음악만 듣다가 반주가 없는 a capella를 들으려니 도대체 흥이 나질 않더군요. 일종의 '감정 폭발'적인 카타르시스를 얻지 못해서겠지요. 하지만 1년 정도 계속 들었을 때, 다성음악으로 인해 스스로를 정화시켰다던 친구의 말이 바로 저 자신의 경험이 되었습니다. 그 후로 발견한 많은 다성음악들과 시대별로 내려오는 교회음악들은 비단 그 시대에만 쓰여졌던 고루한 것이 아니라 시간을 뛰어넘어 존재하는 신앙고백이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제가 지난 5년 정도 봉사해 온 잠원동 천주교회에 처음 왔을 때, 특송으로 불려지는 많은 곡들이 흑인영가를 편곡한 것이라든가 개신교회의 복음성가 및 찬송가를 짜깁기 또는 편곡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하느님으로 바꾼다거나 여호와를 야훼로, 할렐루야를 알렐루야로 고치는 등의 개사작업을 거쳐서 말입니다. 물론 모든 곡이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주조가 그러하였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우리 나라의 많은 청년 성가대의 현실이 그러합니다. 물론 성가대를 이끌어 나가는 지도자의 책임이 가장 크겠지요. 대다수 성가대 지도자들이 일반음악을 전공한 분이기에 이러한 문제가 크다 할 것입니다. 일반적인 음악의 흐름은 평단원들보다 잘 알고 있지만 전례음악은 제대로 배워보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성가대는 제대로 된 전례음악을 접하기가 어려워지고 기존의 감정 폭발적 음악들을 '편식'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컨대 다성음악을 접하게 되면, 재미가 없고 지루하며 스스로 감동을 느끼지 못합니다. 한번 가슴속 시원하게 소리를 질러야 특송을 한 것 같은데, 다성음악을 부르면 밋밋하고 고루하다는 느낌만을 가진다는 것이지요. 이런 현실에서 등장한 생활성가야말로 희소식이 되었을 것입니다. 가사를 바꿀 필요도 없으니 개신교의 노래같지 않고, 작곡하신 분이 신학생도 있고 신자이니까 아무런 문제될 것 없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성가대의 방향이 이렇다 보니 그들의 소리를 접하는 신자들의 귀와 취향도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성가대가 무조건 큰 소리로 웅장한 클라이막스를 이루고 노래를 끝냈을 때 박수를 치는 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러한 현실 속에서 거룩한 전례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어쩌면 '싸우는') 음악인들의 현실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지금의 저희 성가대는 운이 좋게도 전례음악에 대한 지식을 어느 정도 갖춘 지도자를 만나, 시행착오를 거쳐 가며 올바른 전례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전에는 별로 하지 않던 가톨릭 전통 전례음악, 특히 다성음악의 비중을 키우게 되었습니다. 다성음악을 부르니까 흥이 나지 않으며 성가대에서 노래할 맛이 나지 않는다는 성가단원들의 불만섞인 소리를 인내하며 꾸준히 시도한 끝에, 크게 만족할 만큼은 아니더라도 상당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작년 정도부터는 성 목요일 전례의 특송도 무반주로 정말 멋지게 해냈습니다. 뿐만 아니라 Allegri의 <Miserere mei Deus>를 countertenor 파트까지 소화해 내며 원 악보대로 불렀답니다. 단원들의 태도에도 변화가 있었고 신자들의 반응 또한 달라져서, 무반주 motet의 숙연함과 인성이 만들어낸 찬미에 전에는 잘 모르던 감동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되는 데까지는 시간이 걸리는 것 같습니다. 저희가 전례를 올바르게 드리기 위해 힘든 과정을 거치는 동안 신부님들의 격려도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항상 격려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어떤 신부님께서는 우리의 전례가 너무 고상해서 "젊은이답게" 하라는 말씀을 공지사항 시간에 하시기도 했고, 개인적으로 rock mass를 해 보시겠다는 어느 젊은 신부님도 계셨습니다...
우리가 자랑할 전례음악이 너무나도 많은데 무관심 속에서 방치되고, 오히려 개신교 성가대의 연주에서 너무나도 자신있게 우리의 전통적인 성음악이 불려지고 있음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개신교 내에서도 우리의 생활성가와 유사한 복음성가를 부르는데, 교회음악에 대해 정통한 분은 예배 때엔 복음성가의 사용을 금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김종헌 신부님께서 '청년성가집'에 관한 글에서 밝히신 이유와 유사합니다. 저는 우리 전례음악이 가진 모습이 우리 가톨릭 신앙의 그것과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쇠처럼 빨리 달구어져 빨리 식는 게 아니라 2천년에 걸쳐 이루어온 그만큼의 은근함과 깊이를 가졌기 때문에, 부를수록 들을수록 우리의 영혼을 정화시키고 하느님께로 향하여 다가가게 하는 힘이 들어있음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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