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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RE:499] 결국은 성령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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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유원택 쪽지 캡슐 작성일1999-10-25 조회수1,013 추천수7 반대(0) 신고
이제 3번째로 똑 같은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만, 결국 올바른 신심이 무었인지 생각하여야 상황개선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73번 글에 올려 놓았듯이 대중적인 것을 따르는 것은 성령의 조짐이 아닙니다. 겸손을 가르쳐야 할 우리가 소위 아이들 사이에 인기인(star?)을 만들고 방치하는 것은 성령의 행위와 반대됩니다. 우리 천주교 공동체 내의 대다수가 올바른 성령의 활동이 무었인지 깨닫고 자신의 생활자세를 바꿀려 하지 않는한 개선이 있기 힘듭니다. 왜 그렇게 많은 교사들이 올바른 신앙생활을 가르치지 않고, 노는 행사 만들기에 주력하고 있습니까? 무엇 때문에 어른들은 청년에게 집단안에 가입하는 것만 신경쓰고 이를 자신의 사업 공로처럼 생각합니까? 지금 우리는 힘든 신앙의 모범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많이 많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의견을 강요하지 않지만 질문을 받았을 때, 아무리 그것이 듣는 이의 귀에 거슬리더라도, 신앙에 관하여 올바른 대답을 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말만 올바른 사람, 말 못하고 행동만 하는 사람으로는 근본적 변화를 가져올 수 없습니다. 아니 행동 안에는 올바른 말을 하는 것이 포함됩니다. 지금은 결국 듣기 싫은 소리를 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사람은 필요 없습니다. 쓴 말은 결국 듣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효과가 있습니다. 행동의 모범으로 다른이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켜 이들이 질문을 던져 왔을 때 자신의 생각을 나누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신앙대회인지 대중축제인지 모르는 행사에 의문을 제기한 사람이 그렇게도 적을까요? 신앙대회하면 무슨 기도 모임이나 신학 강의를 연상하게 되지 장기자랑을 생각하기 힘듭니다. 올바른 성령은 자랑하지 않고 유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춤, Rap music, 무술, 사회에서 너무나 흔한 이런 것을 교회안에서 마저 하면 아이들의 영혼은 어디서 신앙적으로 성숙할 수 있겠습니까? 최면과 기쁨을 분간하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무속신앙의 핵심음 무아경,Ecstasy,인데 이는 하느님과 일치가 아니라 자아도취나 악령의 꼬임에 빠져 드는 것입니다. 무당들이 신들렸다 할 때 귀신이 들어온 것이라 하지, 창조의 신이 온것이라고 합니까? 공허와 평화가 다르듯이 신앙과 집단최면은 다릅니다. 춤, 시각적 자극, 선동적인 연설을 잘 쓴 집단이 있습니다. 이 집단원들 중 순진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더 나은 세계로 간다고 믿었고 집단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기 까지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많은 사람을 죽이거나 노예로 만들었습니다. 20 세기에는 이들은 Nazi라는 이름을 가졌고 7-8 세기에는 과격한 이슬람교도들이 그랬습니다. 만약 이들이 자신의 행사에서 내적평화를 느꼈고, 일치감과 초월적인 존재를 느꼈다면 당신은 어떻게 대답할 것입니까? 어렵지만 문제의 해결은 우리 모두 올바른 일을 할려하고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것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어려운 노래를 가르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꾸준히 좋은 노래를 들려 주고, 좋은 이야기를 해주고, 같이 기도하면 언젠가 변화가 올 것입니다. 포기하지 마세요. 대부분의 사람이 포기하는 때가 바로 세상이 멸망하는 때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273번 내용을 올립니다. 많이 보시기를 우리는 진짜 하느님의 성령을 어떻게 알아 볼 수 있을까? Thomas Dubay, S. M. 신부는 그의 책 "Authenticity, A Biblical Theology of Discernment" (진실성, 분별에 관한 성서적 신학)에서 성경과 성인들의 말에서 다음 점들을 찾아 나열하였다. 성령 계시에 관한 유의점 I. Hard-nosed evidence 하느님은 자만하거나, 허영심이 많거나 자신이 세운 교회에 복종하지 않는 이에게 성령을 보내지 않는다. II. No finite idea expresses God, adequately, and thus we ought not to cling to it. 하느님은 무한한 분으로서 그분을 만난 체험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하느님은 우리를 만나러 성령을 보내시지 단지 말 몇 마디 하러 오시지 않는다. 성령을 만난 체험에 얽매일 때 우리는 하느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경험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십자가의 성 요한) III. Little attention is to be given to inner communications. 1. 착각과 허상의 위험이 있다. 유한한 우리들이 진짜 성령을 맞이하는 순간에도 악마의 방해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개인적 성향과 취향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왜곡할 수 있다. 2. 하느님의 개인적 계시에만 얽매인 나머지 자신의 일상적 의무를 소홀히 할 수 있다. 3. 하느님 계시의 핵심은 무한한 하느님에 관한 이해를 돕는 것이다. 기도 중에 들은 어떤 말이나 사상에 집착하는 것은 무한한 하느님을 망각하고 특정 일부만 신경 쓰는 것이다. 4. 자신이 계시 받은 것에 대해서 자만심과 허영심이 생길 수 있다. 5. 내적 계시는 그 근원을 분별해야 한다. 악마는 무한하지 못하므로 자신의 능력을 충실한 신자를 몰락시키는데 집중하지 이미 자기 사람이 된 이들에게 집중하지 않는다. 6. 하느님은 단지 지시로서 사람들을 도와주지 않는다. 성령을 만난 것으로 이미 자신이 인식할 수 없는 많은 은혜를 얻은 것이다. 은총을 받기 위해 계시에 매달릴 필요는 없다. IV. Use of reason as a source of light. 하느님은 일상적인 일은 일상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는 것을 기대한다. 다리가 부러지면 우선 병원으로 가라는 것이다. V. A divine message needs human approval. 예수님은 자신이 직접 만난 사도 바오로를 예루살렘으로 보내어 다른 사도들에게 인정받도록 하였다. VI. Competent spiritual direction 자신이 받은 계시에 대해 확실히 하느님과 교황님에게 일치하고 있는 유능한 영적 지도자의 도움을 구해야 한다. 만약 좋은 영적 지도자를 못 만나면 계시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 것이 좋다. VII. Growth in faith 성령을 만나면 우리의 믿음은 더욱 자라게 된다. 성령으로 인도되는 사람들의 특징 I. moral behavior (도덕적 행위, 품성) 1. God-Directedness. 그들은 언제나 하느님 안으로 가려고 한다. 2. New Love. 모든 이와 올바른(하느님이 원하는 것이 바로 올바른 것임) 일에 관하여 조건없는 사랑을 준다. 3. Cross-Asceticism. 그들은 고행과 어려운 일을 기피하지 않는다. 4. Frugality. 검소하게 산다. 5. Uncluttered Freedom. 세상의 일과 물질에 얽매이지 않는다. II. doctrinal criteria (교리에 관한 조건) 6. Sound Doctrine 그들은, 베드로를 우두머리로 한 12 사도가 세워서 지금까지 유지된 교회에서 발표한 전통 교리에 일치한 주장을 핀다. 7. At Odds with the Prevailing Spirit of the World 하느님은 인기 있는 분이 아니다. 하느님이 원하는 것은 세상의 유행과 관계없다. 그들의 주장 역시 세상의 분위기와 무관하거나, 상반되기도 한다. III. communal criteria (공동체의 조건) 8. Unity 성령이 이끄는 공동체는 일치된 공동체이다. 그 공동체 안에서 다양한 주장이 있을 수 있지만 서로 모순되는 대립된 주장이 있을 수 없다. 9. Obedience Freely Given. 성령이 이끄는 공동체는 자신의 지도자들의 말을 충실히 따른다. 지도자의 가르침을 묵상하고 잘 생각하여 올바르게 생각되는 방향으로 복종한다. 다만 명백히 죄를 행하도록 하는 지시(예를 들어 확실한 악의에서 비롯된 십계명 위반)는 복종해서는 안된다. 올바른 신학은 예언적이다. 1. Prophetic theologians are called and sent by the Lord. 신학자들은 교도권에 복종해야한다. 주님의 대리자이신 교황님의 지시에 복종한다. 2. Prophetic theology does not court popularity. 구약에서 진정한 예언에 대한 흔한 반응은 탄압이었다. 현재도 이는 바뀌지 않았다. 사람의 취향을 따르는 말은 하느님의 말과 관계없다. 3. Prophetic theology is committed to something definite and sure. 교회 교리에 모순이 있을 수 없다. 하느님을 찾아가는 길들은 그 것 모습은 다를 수 있지만 그 방향과 목표가 다를 수 없다. 4. Prophetic theology is faithful to its tradition. 하느님을 따르는 이들은 하느님이 세운 로마의 주교 교황님이 이끄는 이 "만인에 공통되는"(Catholic) 교회의 오랜 전통을 지킨다. 5. Prophetic theology is prayerful.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는 기도 없이 찾을 수 없다. 신학자는 자신의 말이 아닌 하느님의 말을 찾아야 하므로 교회의 가르침에 일치하여 객관성을 확보해야 하며 기도를 통해 자신의 개인적, 상대적 생각과 하느님의 보편적, 객관적인 가르침을 분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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