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사순제5주일]라우다떼복음묵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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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봉섭 | 작성일2000-04-09 | 조회수652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이런 저런 저의 사정도 있고 당장 성가홈페이지 개편작업의 일부도 맡고 있지만, 오래간만에 이번 주 복음묵상 준비를 자청하였습니다. 제가 부족한 탓에, 일상 중에서 조금만 해이해져도 금방 제 마음이 자꾸 주님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합니다... 시간이 꽤 드는 일이지만, 복음묵상 준비는 많이 묵상하며 잠시나마 멀어졌던 주님을 가깝게 뵙는 은총의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번주 잠원동 라우다떼성가단 복음묵상시간에 드릴 말씀입니다.
00. 4. 9. 사순 제 5주일
제1독서 예레 31,31-34 (나는 새 계약을 맺고 잘못을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제2독서 히브 5,7-9 (복종하는 것을 배우신 예수께서 영원한 구원의 주관자가 되셨습니다.) 복 음 요한 12,20-33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준비 및 진행 : 이봉섭 바오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이제 사순시기가 그 절정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사순 제 5주일입니다. 다 같이 요한복음 12장을 펴 주십시오. 오늘 말씀은 12장 20절에서 33절까지입니다.
<복음읽기> 명절 때에 예배를 드리러 올라 왔던 사람들 중에는 그리이스 사람도 몇이 있었다. 그들은 갈릴레아 지방 베싸이다에서 온 필립보에게 가서 "선생님, 예수를 뵙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필립보가 안드레아에게 가서 이 말을 하고 두 사람이 함께 예수께 가서 그 말을 전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이 큰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존하며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있는 곳에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같이 있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높이실 것이다." "내가 지금 이렇게 마음을 걷잡을 수 없으니 무슨 말을 할까? ’아버지, 이 시간을 면하게 하여 주소서’ 하고 기원할까? 아니다. 나는 바로 이 고난의 시간을 겪으러 온 것이다. 아버지,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소서." 그 때에 하늘에서 "내가 이미 내 영광을 드 러냈고 앞으로도 드러내리라" 하는 음성이 들려 왔다. 거기에 서서 그 소리를 들은 군중 가운데는 천둥이 울렸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천사가 예수께 말하였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것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희를 위해서 들려 온 음성이다. 지금은 이 세상이 심판을 받을 때이다. 이제는 이 세상의 통치자가 쫓겨나게 되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나 높이 들리게 될 때에는 모든 사람을 이끌어 나에게 오게 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예수께서 당신이 어떻게 돌아가시리라는 것을 암시하신 말씀이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당신이 어떻게 돌아가시리라는 것을 암시하신 말씀이었다." 오늘 말씀 안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고 계십니다. 지난 주 복음에서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아들을 시켜 구원하려는 것이다.(요한3,17)"라고 하신 말씀대로,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돌아가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 영광을 위해 굳이 돌아가셔야 했는가? 예수님께서는 그 죽음을 밀알이 땅에 묻히는 것에 비유하십니다. 이것은 그냥 죽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죽음을 넘어서서 훨씬 더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한 것입니다. 그 반면, 밀알이 묻히지 않으면 일단은 그냥 잘 지내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물론, 그 스스로 영원하지 못하기 때문에 얼마 후엔 그냥 덧없이 사라져갈 것입니다. 살려고 하는 것이 결국 죽는 것이며, 죽는 것이 사는 것이라는 참으로 심오한 진리를 우리는 듣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 오너라."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도 그분을 따라서 그렇게 밀알과 같은 죽음을 거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이미 죽었습니다. 마침 잠시 전에 우리가 영세식에 참여해서 성가를 봉헌했지요. 세례의 원래 형태는 물 속에 잠겨졌다가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죽었다가 새롭게 살아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세자는 마귀와 그 행실과 유혹에 대해서 "끊어 버립니다"라고 선언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과 떨어져 죄에 물들었던 자신의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세상 속에서 이런 일 저런 일 하면서 자꾸 우리 마음이 주님한테서 멀어지고, 죽고 없어졌어야 할 모습이 자꾸 되살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나를 죽이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모습보다, 나를 살리고 내 뜻을 살리려고 하는 모습이 오히려 더 많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남을 대할 때나 단체 안에서 만날 때나 마찬가지입니다. 당장 내가 편하고, 내 자존심이 사는 것이 먼저 보이니 말입니다. 기도와 전례보다 그렇게 필수적이지도 않은 내 일을 더 우선하기도 합니다. 신심 행사나 성가대 모임에서도 주님의 길을 찾기보다 당장 나에게 즐거운 애프터에 더 관심을 쏟기도 합니다. 성가 연습을 할 때에도 그 노래를 기도로 바치면서 보다 나은 봉사가 되도록 노력하려 하기보다, 당장 내 몸에 즐거운 것을 먼저 추구하기도 합니다.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던 중에 제 다음날 스케줄에 대해서 묵상하고 있기도 하고요. 예를 들자면 끝도 없겠습니다... 그러는 중에, 우리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고 하신 주님께선 우리의 무관심에 안타까워하시면서 다시 외롭게 고통받고 계신 것은 아닌지 생각합니다. 2천년 전 사람들의 몰이해 속에 외로이 수난의 길을 걸어가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께서 부르시는 생명의 길은 ’죽음으로써 사는 길’이기에 항상 손해보는 것으로 보입니다. 때로는 가벼운 어려움일 수도 있고, 어떤 경우 너무나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되거나 심지어 정말 생명에의 위협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그런 경우에 항상 자신있고 용감할 수만은 없습니다. 심지어 예수님도 한 인간으로서 수난을 앞두고 큰 소리와 눈물로 기도하고 간구하셨다고 합니다(제 2독서). 인간의 의지와 힘만으로 가기는 어려운 길이기에, 그렇게 우리는 더욱 주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피할 수 없는 고통이라면 그 고통과 맞서서 그것을 넘어설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기를 청해야 하겠습니다. 그 길이 많은 열매를 맺는 생명의 길임을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있는 곳에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같이 있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높이실 것이다."
이제 잠시 스스로 묵상하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지금 나는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 나에게 있어서 사는 길과 죽는 길은 무엇인지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또는 오늘 말씀으로부터 느끼는 다른 점들에 대해 묵상하셔도 좋겠습니다.
(2분간 묵상) 주님, 저희가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 죽음으로써 사는 생명의 길을 용감히 나아가도록 힘과 용기를 허락해 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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