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앞으로의 수난음악회를 생각하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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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봉섭 | 작성일2000-04-17 | 조회수1,336 | 추천수14 | 반대(0) 신고 |
사실 이런 글을 쓸 것인지, 그냥 편하게 잊어버릴 것인지 퍽이나 고민하였습니다... 아래 글들에서 언급된 지난 토요일의 마태수난곡 연주는, 사순절이 절정으로 치달아 가는 가운데 주님의 수난을 더욱 마음 깊이 묵상하도록 돕고자 한 좋은 시도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뜻에 걸맞지 않게 부족한 점이 많았는데, 그런 것까지 제가 이야기한다는 것이 잘 하는 일인지 확신이 서질 않았던 것입니다. 게다가 함께 하신 성가 가족들께서 워낙 선하시고 성격 좋으신 것 때문인지, 아래 글들에도 쓴 소리는 거의 없고 말입니다. 무식한 사람이 용감하다고, 아마추어로서 부족함이 많은 저입니다만 앞으로도 이런 시도들이 있을 것이며 또한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외람되나마 이 글을 쓰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미래의 보다 나은 수난음악회를 기대합니다.
(1) 들어가기 전에 - 마태수난곡의 간단한 설명
바흐의 역작인 이 곡은 마태오 복음 26장 1절부터 56절까의 내용을 주된 가사로 하여 작곡되었습니다. 성지주일과 성금요일에 입체적으로 복음을 낭독하는 것과 비슷하게, 복음사가(evangelist)가 해설 부분을 노래로 하며 예수님과 베드로, 유다, 빌라도 등의 말은 또 다른 독창자가 해당 부분에서 노래하고, 여러 사람(제자들, 대사제들 등) 또는 군중의 역할을 합창(Chor-이번 연주의 경우 아퀴나스합창단)이 노래합니다. 이렇게 복음 자체를 읽는 중간 중간에,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현재의 우리 자신이라 생각해도 좋을 것입니다)의 애통함, 감사와 통회 등의 기도가 독창과 합창으로 연주됩니다. 물론 이 가사는 마태오복음에 없습니다. 이것이 4명의 솔리스트에 의한 레시타티브와 아리아, 그리고 합창단(이번 연주의 경우 연합합창단)에 의한 코랄(Choral)입니다. Choral의 경우는 회중의 역으로 동성적(homophonic)이고 비교적 단순한 짜임새로 되어 있지만, Chor는 대단히 극적이며 다성적(polyphonic)인 짜임새도 많이 등장하는 어려운 곡들로 되어 있습니다. 복음사가와 예수, 기타 역은 복음서(원곡은 독일어 텍스트)의 내용 그대로에 복잡하지는 않지만(거의 syllabic) 상황과 감정을 잘 표현해야 하는 노래가 붙어 있습니다. 반주는 소규모의 관현악으로 되어 있습니다. 대단히 많은 연주진을 써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지만, 바흐 당시에는 몇십 명 정도의 소규모 연주진이 동원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연주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곡입니다. 깊은 해석의 도입과 곡에 영혼을 불어넣는 정도 이전에, 연주진이 단순히 음정과 박자를 잘 맞추기 위해서만도 많은 연습이 필요할 것입니다.
(2) 음악회 진행 형태
15일의 음악회는 처음에 연주자와 관객 전원이 성가집 116장을 같이 부르고, 다음 마태수난곡 1부, 휴식, 마태수난곡 2부가 진행되었으며, 다시 전체가 일어나 121장을 함께 부름으로써 막을 내렸습니다. 이 행사가 단순한 음악회가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기를 함께 듣고 느끼는 모임임을 생각할 때 좋은 구성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원래 노래로 하게 되어 있는 복음서 부분은 모두 낭독으로 하였습니다. 팜플렛에 ’연주시간을 단축하기 위한 것 말고도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라 설명되어 있습니다. 역시 이 행사의 성격을 생각할 때, 보다 나은 가사전달을 위해 필요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 날의 템포(많은 부분에서 오토 클렘페러와 별다르지 않았던)를 생각할 때, 모두 노래했다면 세 시간 한참 더 넘게 걸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낭독 역시 관객들의 묵상을 도와야 하므로 빨리 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잘못 기억한 것이 아니라면 몇몇 다 카포 아리아(A-B-A 구성)에서 A-B만 연주하였는데, 거기서 더 큰 시간단축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합당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견도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서 부분에 대해, 원곡에서는 복음사가가 테너이고 예수님은 그보다 낮은 바리톤이며, 기타역은 배역에 맞게 여러 음높이의 사람이 부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레고리오 성가의 전통과도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 날 복음사가는 저음이고 예수님은 완전한 테너였으니, 원곡의 분위기와 반대가 되었습니다. 물론 그런 새로운 분위기도 좋았지만, 노래로 할 것을 말로 하는 것이므로 낭독자의 톤도 생각하면 더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사용한 텍스트에 있어서, 전곡을 최병철 선생의 우리말 개사 악보로 연주하면서 낭독 역시 그 가사를 사용하였습니다. 원래 번역하는 경우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노래와 가사를 잘 일치시키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가사가 복음 내용이고 잘 번역된 우리말 성서가 있더라도, 노래에 맞추기 위해서는 적당한 다른 말을 붙여야 하는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예컨대 예수님의 대답 "그것은 네 말이다" (또는 "당신이 그렇게 말했구려" 등으로 번역.)가 독일어로는 세 음절의 "Du sagest’s."로 되어 있으니, 번역 가사 역시 세 음절의 "그렇다"라는 직접적인 표현이 붙어 있습니다. 비슷한 뜻이지만 뉘앙스는 상당히 다릅니다. 하지만 노래가 아니라 말로 할 경우에는 그래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현재로서는 공동번역 또는 200주년성서보다 나은 우리말 번역을 찾기 어렵다고 볼 때, 낭독 부분이라도 매일미사의 수난복음처럼 우리말 성서를 토대로 하였으면 더욱 좋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실수로 보이는 것이 좀 있었습니다. 제 57곡 레시타티브가 ’여인’의 말로 적혀 있으며 말로 낭독되었는데, 이것은 복음서 내용에 없는 것으로 제 58곡 소프라노 아리아에 부속된 부분입니다. 말로 낭독하면 빌라도 앞에서 한 여인이 예수님을 당당히 변호한 사실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되며, 당연히 다른 부분과 마찬가지로 소프라노 솔로가 노래했어야 합니다. 추가로, 대사제 가야파가 ’가야피’로 오기되었고, 낭독자도 그것을 바로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등등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앞뒤에 관객이 함께 성가를 바친 것이나 복음서를 천천히 감정을 살려 낭독한 점 등 전체적인 구성의 아이디어는 앞으로도 좋은 참고가 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3) 연주에서의 문제
이번이 제가 마태수난곡을 실연으로 들은 첫 기회였습니다. 우리 나라의 현실이 어렵다는 것을 생각하여 레코드에서 듣는 명연만큼은 기대할 수 없었다 해도, 코랄을 부르는 연합합창단을 제외한 연주진은 다 전공자인데다 특히 교회음악을 위해 모였다 하므로, 많은 기대가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떤 연주를 통해 수난복음을 더욱 마음에 와 닿게 할 것인지, 또 요새 원전연주 붐이 매우 거센 가운데 어떤 식으로 해석하고 어떤 소리를 낼 것인지도 관심이 갔습니다. 그러면서 오래간만에 레코드도 두어 번 듣고 갔습니다.
기대 가운데 첫 곡의 시작... 그러나 첫음부터 화음이 불안하고 각 악기가 나오는 박자도 불안하더니, 이윽고 한 주자(되도록 정확한 개인은 지칭하지 않겠습니다)가 아예 엉뚱한 곳에서 자기 독주를 시작하였습니다. 놀랍게도 열 마디를 훨씬 넘어 그 긴 전주가 거의 다 가도록 독주는 계속되어, 현대음악에서나 들을 법한(?) 불협화음이 계속되었습니다. 합창이 들어올 위치를 맞추기에도 불안한 가운데 겨우 노래가 시작되었는데, 소리는 풍부했지만(rich) 음이 자꾸 떨어지더니 거의 반음 가까이 떨어지기도 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연주자 각각이 박자상의 위치를 맞추지 못해서 불안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거의 모두가 악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자기 음 내기에 바빠서 지휘자를 보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첫 곡 후 낭독, 이어 코랄에서 겨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묵상에까지 이를 수 있었습니다. 곡 자체가 동성적이라 박자가 보다 쉽게 안정될 수 있기도 했지만, 연합합창단은 각 팀별로라도 연습이 상당히 되었고 스스로의 마음도 곡에 담고 있었던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곡이 이어지면서 합창(Chor)과 독창이 계속되었는데, 독창자는 초반 무슨 일인지 역시 음이 떨어지고, 심지어 어떤 독창자는 두어 마디를 몇 단계 조옮김(?)해서 부르기까지 하였습니다...
전체적으로 보아서 아퀴나스 합창단은 비교적 연습이 된 것으로 보였습니다. 음이 떨어지던 것도 진행되면서 어느 정도 안정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작품이 길어서인지 곡에 별로 익숙해지지 못해서 지휘에 충분히 집중하지 못하였고, 발성 자체는 좋아도 이 곡에 맞는 소리였다고 하기에는 이견의 여지가 많으며, 결국 이 음악 속에 담긴 의미와 감정까지 전달할 만큼 마음을 담아 내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였습니다. 독창하신 분들 역시 뒤로 가면서 상당히 안정되었습니다. 특히 오페라만 하려 하는 현실에서 이런 음악에 잘 맞는 소리를 지닌 한국인 테너를 본 것은 매우 반가웠습니다. 그리고 그 챔버오케스트라... 개중 열심히 준비한 분들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두 번이라도 맞춰 보고 올라간 것 맞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아니 전곡을 몇 번 들어 본 적이나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얼마나 곡을 모르면 어떤 주자는 엉뚱한 데서 시작해서 끊지도 않고 몇십 마디를 연주했으며, 어떤 때는 악기가 제 때 나오지 않아 곡을 중간에 끊고 다시 시작해야 했는지... 또 얼마나 맞추어 보지 않았으면 베이스 한 사람의 반주를 위해서 지휘자께서 보면대를 두드리며 박자를 맞춰 줘야 했는지... 자기가 맞는지 틀리는지 몰라 눈치보는 소리를 내는 경우는 다반사였습니다. 오르간이 아무리 고군분투하고 지휘자가 이끌어 가려고 눈물겨우리만치 노력해 봐야, 맞출 여력이 없는 것을 어쩌겠습니까? 이번의 경우 오르간만으로 반주했더라면 훨씬 나았을 것입니다.
성의부족... 전공자들의 연주에서 프로정신을 기대한 것이 잘못이었습니까? 정녕 프로라면 그런 상태에선 밤새 몇 번이라도 맞춰 보았어야, 그럴 상황마저 안되면 각자 레코드라도 듣고 곡에 익숙해졌어야 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예정보다 30분이나 늦게 시작한 것도 연주자들이 늦게 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결국 7시에 맞춰 왔던 관객들은 10시 30분에야 연주회의 마침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음악을 잘 모르는 보통 관객들은 바흐의 이 명곡이 그런 불협화음들로 이루어진 줄 알고 갔을지도 모릅니다. 팜플렛에 "단순한 음악회가 아니기 때문에 참석하시는 분들께서는 노래하는 사람들의 음악성에 신경을 쓰지 마시고 눈을 감으시고 기도하는 마음으로..."라 적혀 있습니다. 어쩌면 이 말은 문제를 미리 보신 박신부님의 애타는 마음을 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음악회나 기타 행사가 있을 때 사소한 잘못을 찾기보다는 그 전체의 의미와 감동을 느끼려 하고, 그래서 문제 많은 음악회를 보고도 즐거워하고 기뻐한 적 많습니다. 하지만 성음악이란 그 내용을 좀더 아름답고 가슴에 와 닿게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연주진끼리 적당히는 맞아야 가사를 살릴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틀리더라도 마음이 가득 들어 있으면 또 모르지만, 이렇게 계속 불안해서는 연주자도 마음을 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가사를 보고 내용을 생각하며 기도하신 분들이 계셨던 것으로 보이니, 참으로 복된 분들이며 또한 존경스럽습니다. 솔직히 저는 그러고 싶었지만 실패했습니다. 단, 코랄 정도가 나올 때만은 겨우 마음을 추스리고 잠시나마 묵상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 때의 연주자들은 대부분 비전공이었지만 신앙을 가졌으며 나름대로 성실히 준비한 분들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다시금 앞날의 이런 행사를 위한 교훈을 발견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런 곡에서 어느 정도라도 앙상블을 이루기 위해서는, 전문가들이라도 많은 연습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번의 경우 단 한 번도 전체가 모여 전곡을 연습한 적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김건정님 책에도 있듯이 오히려 비전문가들은 열심히 연습을 하지만, 전공자 그룹과 협연하는 경우 별로 맞춰 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굳이 많은 연주자가 있고 구색을 다 갖춰야만 좋은 연주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대로 앙상블을 연습할 여건이 되지 않을 듯하다면, 기획단계에서부터 과감히 포기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바흐 곡같은 경우 많은 사람은 요하지 않지만 앙상블 훈련은 매우 많이 필요하므로 특히 그럴 것입니다. 그리고 설령 조금 부족하더라도, 신앙을 가지고 있으며 성음악의 의미를 이해하고 성실히 연주에 임할 수 있는 연주진을 모아야 할 것입니다. 성음악이란 단순히 좋은 음악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담아 연주해야 하며, 그럼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이 주님께로 끌어 올려지도록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사실 우리 현실에서 성실히 준비할 사람을 찾기도 어려울 것이며, 더군다나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는’ 이런 음악회의 의미를 살리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정말 부족하다면, 믿지도 않을 사람을 끌어 모으지 말고 안에서 신앙있는 전문인을 키워 가야 할 것입니다. 좋은 성음악이 신자 공동체에 주는 영적 이익이란 실로 지대하기 때문입니다.
잘 모르는 비전공자로서 주제넘은 글을 쓴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에서는 쓴 소리도 있어야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도움이 되리라 믿은 제 마음을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앞으로 보다 많은 점을 고려하여 사람들에게 더 큰 영적 도움을 주는 기회가 많기를 다시금 바랍니다. 끝으로 수고하신 많은 분들께 인사 전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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