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퍼옴]최고령 미사반주자-목동성당 최봉구 할아버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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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곽일수 | 작성일2001-05-12 | 조회수1,369 | 추천수8 | 반대(0) 신고 |
우연히 평화신문을 읽다가 내용이 좋아 교우님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서 옮겨왔습니다. 원문은 아래를 클릭하면 나옵니다. http://www.pbc.co.kr/news/read.cgi?board=spr&y_number=578&nnew=2
발행호:626호 발행일:20010513 2001/5/11(금) 09:38
[삶-믿음 소망 사랑] ’최고령 미사반주자’ 목동본당 최봉구(레오)옹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인생이 아름다운 이유는 황혼이 있기 때문이고, 황혼이 아름다운 것은 자신을 마지막까지 불사르는 열정이 있기 때문이다.”
서울 목동본당의 최봉구(레오)옹도 이 말이 썩 잘 어울리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다.
올해 나이 일흔 다섯, 인생의 황혼에 접어들었지만 음악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열정과 반석 같은 믿음은 그를 교회에서 활동 중인 수많은 미사 반주자 가운데 ’최고령 반주자’라는 명예를 안겨주었다.
전직 고등학교 음악교사 출신인 그는 주일 새벽이면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나 기도를 바치고는 곧바로 집을 나선다. 주일 새벽미사 반주를 위해서다. 목동본당에서만 올해로 벌써 5년째 미사 반주를 하고 있는 그는 새벽 공기를 들이키면서 성당에 나가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아직沮?열정을 바칠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확인한다.
이른 새벽 아무도 나오지 않은 텅 빈 성전에 들어서면 그는 묵상에 잠긴다. 묵상을 통해 지향하는 바는 단 하나. 자신이 반주하는 음악이 신자들의 신심을 키우는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길 간절히 바란다.
“음악이 오히려 신자들의 묵상과 기도를 방해하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가능한 그들이 미사의 장중한 분위기 속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건반 하나하나 누르는데 온 신경을 씁니다.”
오랜 세월 해온 반주지만 그는 오르간 앞에 앉으면 반드시 마사지로 손을 푼다. 만에 하나 반주도중에 건반 터치가 매끄럽지 못한 경우를 대비해서다. 전문가다운 철저한 준비자세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주일 새벽미사 뿐만 아니라 장례미사 반주도 그의 몫이다. 인생의 종착역인 죽음이라는 엄숙함을 지켜보면서 자신이 지금 하는 일에 대한 소중함과 죽는 날까지 후회 없는 삶을 살리라는 마음을 되새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 일을 봉사라고 여기지 않고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신앙을 가지지 못했다면 음악활동도 학교 교사생활을 끝으로 마침표를 찍을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강원도 춘천의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자연스럽게 신앙을 알게 됐고, 음악을 좋아했던 아버지 덕분에 당시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피아노 같은 악기를 접했던 것이 음악을 업(業)으로 삼게 된 동기가 됐다. 그 덕에 그는 춘천 죽림동성당에서 오르간 미사반주도 하게 됐다. 춘천사범에 진학해서는 일본인 음악교사로부터 체계적인 피아노지도를 받았고, 해방되던 45년부터 한국전쟁전까지 서울과 춘천을 오가며 서울음악전문학교(서울 음대 전신) 김원복 선생으로부터 사사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피아니스트의 꿈을 키워갔다.
그러나 그의 꿈은 한국전쟁 발발과 동시에 물거품이 됐다. 난리통에 더 이상 교습 받을 수 있는 여건이 안되자 꿈을 접고 고향 춘천에 눌러 앉아 교편을 잡았다. 이때 그는 메조소프라노 김청자씨, 피아니스트 윤금희씨 등을 지도하면서 음악의 틀을 잡아주었다.
그 후 서울에 올라온 그는 동북고·선린상고·혜원여고 음악교사로 재직하면서 난리통에 접어야 했던 피아니스트의 꿈을 학교에서 다시 펼쳤다. 비록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교육자로서 희열도 느꼈다.
평범한 교사로 살아오던 그가 ’엉뚱한’ 길에 들어선 것은 70년대 중반.
덜컥 학교를 그만두고 서울 오류동에 음악학원을 냈다. 자신이 생각하는 음악세계를 펼쳐 보고 싶은 생각에서 문을 열었지만 뜻대로 되질 않았다. 다소 스파르타적인 교습방법에 불만을 품은 학부모가 늘면서 원생이 급격히 줄었고 문을 닫아야 될 상황에 처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삶의 축이었던 신앙에 대한 믿음도 옅어져 갔다. 집안 살림도 기울었다. 설상가상으로 어렵사리 지인의 소개로 광성고 교사에 부임했지만 병명도 잘 모르는 호르몬 계통의 병을 얻어 2개월간 사투를 벌이는 시련을 겪었다. 그때 그는 인생의 덧없음을 느꼈다.
’인생이란 이렇게 고달프고 외로운 것인가.’
그런 그에게 삶의 의미를 되찾아 준 것은 신앙이었다.
“병명도 모른 채 투병생활을 하던 어느날 어느 성당에서 자원봉사를 나온 신자들이 안수기도를 해 주더군요. 그렇게 고통스럽던 몸이 날아갈 것처럼 가벼워지고 편안해지더라구요. 그 후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건강이 회복되고 자리를 털고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그때 비로소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섭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병석에서 일어나자 마자 성당을 찾았다. 하느님을 멀리한 지난날을 뉘우치며 고해성사를 보기 위해서다. 그러나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주체하지 못 할 정도로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지난날에 대한 회한과 하느님 자녀로 다시 태어났다는 만감이 교차했기 때문이다.
그의 음악적 재능은 딸 근희(글라라)씨에게로 이어졌다. 로마에서 성음악을 전공하고 귀국한 근희씨는 얼마 전까지 명동성당에서 미사반주를 했다. 그 아버지에 그 딸인 셈이다.
언제까지 미사반주를 하겠느냐고 묻자 그는 이런 얘기를 들려줬다.
“몇 년 전 파리 노틀담성당을 찾았을 때 ’루이스비에르네’라는 오르가니스트가 앉았던 의자를 본적이 있습니다. 성당 관계자에게 물어 보니까 루이스비에르네는 죽는 순간까지 오르간을 연주하다 숨을 거두었다더군요. 과연 그 사람처럼 될지는 모르겠지만 저 역시 이 세상 끝나는 날까지 연주하다 하늘나라로 가고 싶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오르간과 함께 하고 싶다는 그는 은퇴를 모르는 영원한 현역이다. 【김정호 기자 jhkim@pbc.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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