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가대가살려면 내가죽어야(수정추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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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종설 | 작성일2002-08-23 | 조회수966 | 추천수10 | 반대(0) 신고 |
정영일 형제님의 화두에 이경우 형제님등 여러 우리의 사랑하는 가족들이 아름다운 생각을 실어 주셨다. 어느 성령이 아주 충만한 사제가 계시느데 그분은 주일보다 평일이 더 바쁘시단다. 왜냐하면 피정 지도등으로 국내는 물론 해외에까지 소문이나 날아 다니시고, 거기서 잘나가던? 의사 교우는 그분을 쫓아 외국에서 귀국해 시골 생활을 하면서 기쁨을 느끼고 있다는 기사를 접하므로서 난 아직 만나보진 못했어도 그분의 열렬한 팬으로 그강론 청취할 주일을 기다린다. 같은 주제의 "말씀"들에 대한 수많은 사제의 강론을 우리는 신앙의 년조많큼 들어 왔지만 대부분 신부님들의 "강해" 말씀은 이교의 목사(일명 먹사라고 비하 하기도함)들 처럼 신도의 뇌리와 마음을 사로잡지 못한음 우리 인지상정으로 느끼는 바인데 이분 많큼은 도입부 부터가 다르다. 평이 하면서도 느낌이 팍팍 와닿는 말씀이 나를 돌아보며 읊조리게하는 재주가 비상하시다. 개신교가 번창한데는 목사들의 세뇌에 가까운 마음을 휘어잡음에 안주머니 깊숙히 감춰둔 "쩐"을 신자들이 은혜 받았다고 아낌없이 쏟아 놓음도 한몫을 할것이다. 이 성령이 충만하신 신부님께서 강론중에 우리 거루한 교회의 "조직(공동체)"에 관한 말씀을 가끔 하신다. 그분의 표현대로 "뒤집어지는것"에 대한 성찰의 말씀이다. 이 글의 주제로 뽑은 죽어야 산다는것은 이 불확실한 세속의 시국에대해 떠도는 화두 이기도 하지만 우리 공동체에도 어김없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본당이고, 레지오도, 또는 여타 사도직 단체에 있어 잘나고 똑똑한 인사가 넘칠수록 그 조직은 거덜나고 만다는 요지인 것이다. 왜? 이런 이율 배반적인 말따위가 씨가 먹히는 세상일까? 그건 자기만 잘나고 "내가 또는 나만이"라는 교만의 집합체가 일을 그르치기 때문이고 개별적으론 퍽 우수하나 뭉쳐놓으면 그걸로 끝장 내버리는 민족성?도 작용함이다. 이제것 성가 활성화에 대한 답은 여러 곳에서 제시되었고 그에대한 답도 다나온편이다. 교구차원 본당차원 사제나 지도자들의 관심도 구성원들의 실력(열의)등등, 그러나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매야 보물인데 그 꿰매는 과정이 순탄치가 않다. 본당이나 사제등의 관심도가 덜해도 각 구성원 자신이 희생과 봉사의정신 시간과 돈을 내것으로 갹출해 열심히 이것도 주님 사업에 제물 드림으로 생각하고임해 어떤 작품을 이룬다면 그 기적?에 등돌릴자 누구이겠는가? 나이가 많던 적든 성가를 가꾸어 나가는 지도자(지휘)를 신임하고 자존심 상해도 무조건 따르고 변함없는 동참(들락날락하지않고)을할때 성령께선 역사하시는 응답을 주실것이다. 그 지도자가 나보다 못한 실력에 경력도 비록 일천할지라도 ... 그리고 지도자는 그 신뢰와 노력에대한 무한 책임을 주님과 단원에게 져야됨은 물론이다. 요즘은 지휘자도 무슨 학원의 강사나 연예인 밤무대 뛰듯 여러탕으로 소득증대를위해 확대 재생산하는 경향도 엿보이는데 그것은 조직의 활성화엔 긴말 없이도 걸림돌로 작용할수도 있을 것이다. 지도자도 자기 희생과노력 없이는 존재 가치가 상실되며 그런 지도자가 이끄는 공동체는 불행을 헤메게 되는것이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조국의 현실을 보면 얼마나 지도자를 잘/ 못 만날때를 절실하고 있는것이 아닌가! 옛날엔 음악을 전공하는 학교도 드물었고 배고플때라 한가하게 그거 해가지고는 성공하기가 어려워 교회의 지휘자는 학교 음악 선생님이 주로 하신걸로 안다. 또 성가대 구성원도 주로 고등학교 정도의 학생였으니 말도잘듯고 교과 과정의 음악 시간도 충실하니 거의 벨칸토 수준의 발성으로 성가를 부르니 목소리도 활기차고 어떤 면에선 정영일 발다살형제님 말씀맞다나 지금 교중미사 부르는 소리보다 음색도 더뛰어나고 잘한지도 모른다. 그러다 그놈의 일류병에 입시 지옥이 닥치매 음악시간은 엿사먹고 대신 국,영,수따지다 그야말로 "Santa Lucia"는 몰라도 이정연이란 애의"반" 같은 발성을 좋아하니 교회에서도 청소년 취향에 "생활성가"라는 틀의 발성이, 정통 성음악에 가까히 가는길은 멀어지고 생기있게 부를 젊음이 딴짓하니 "아줌마" 부대가 "교중미사"의 Main으로 부상한것이 아닌가 한다. 지금도 "서울 가톨릭 합창단"의 여성 파트 소리와 여타 본당의 방송미사 여성파트 소리를 비교해보면 그 밝기 생동감을 느낄수 있을것이다. 명동합창단은 음악 전공에 수준이 높아서고 딴데는 그많 못해서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고 필자가 터득한 음색의 구분엔 "명동"쪽은 아마도 "미혼"의 목소리가 많을 것이다. 6.25한국 전쟁직후 장수철이란분이 전쟁 고아들을 뫃아 가르쳐 "선명회 어린이 합창단"이라고 상당히 질높고 유명한 공동체가 있었다.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 불쌍한 고아들이 이룩한 노래패가 잘되고 윤학원인가 뭔가하는 지휘자가 이끌게 됐을때 예의 그 졸부들이 제자식 거기에 끼어 넣으려 꽤나 설쳐댓다고 들은 기억이 생각 나기도한다. 필자가 성가를 지도할때 난 종종 그 선명회 얘기를했다. "고아도 가르치고 닦으면 저리 훌류안 노래패가 되는데 이 격세지감의 환경에 그만 못하면 되겠냐고 ..."
Latin어 발음은 여러번 언급되었지만 적어도 미사곡 전례 양식의 기도문은 발음은 통일 시켜줘야 되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전통 미사곡의 신경(CREDO)은 니체아 콘스탄티노플 신앙 고백으로 이뤄졌으면며 Gregorian Chant에서 Misae Di Angeli(천사미사)에서는 Credo(3)을 주로 채택하는것 같다.
요즘 개창용 미사에선 신경을 "사도신경"을 염경으로 바치지만 혹 Vatican "성탄자정미사"에 참례할땐 상기의 그레고리안 미사와 Credo(3)을 외워두는것도 유용하리라.
60년대 명동 대성당에서 "혼배미사"가 있을때 정영일 형제 년배의 단원의 성가봉사 레퍼터리는 "천사미사곡"과 축가로는 거의 의례히 지금의 성가 179번(당시43번인가) "평화의주시며 믿는자의 위로여 ... 불과같은혀와 뜨거운 입술로 ..." 지금것보다 훨 감동적인 가사로 신혼 부부의 영성을 더욱 빛냈으리라.
우리 혼연일체의 희생과 노력으로 주님을 찬미하길 바라며 ... 알렐루야 주 예수님!
저희를 도와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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