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RE:5039]율리아나 축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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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정연록 | 작성일2003-08-13 | 조회수1,299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율리아나’로 찾아보니 4분이 계시네요... 어떤 분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성바오로딸 홈페이지에서 찾았습니다...
<성녀 율리아나 02월 16일 순교자>
캄파니아의 쿠매에서 막시미안 황제의 박해 때 성녀 율리아나는 자기 부친으로부터 모진 매를 맞고 그 다음에는 그녀와 결혼을 바라던 집정관으로부터 또다른 고문을 받았다. 그후 감옥에서 넘실거리는 불꽃으로 고문을 받다가 305년 경에 순교했다.
<성녀 율리아나 06월 19일 동정녀>
프로렌스의 팔코니에리 귀족 출신인 동정녀는 "성모 마리아의 종" 라는 수도회를 창립했다. 성녀는 극기와 고행의 모델이었다. 71세때 중퇴에 빠졌을 때 영성체 허락이 금지되었지만 그러나 성녀는 성체를 영할 것을 간절히 원했다. 하는 수 없이 사제는 그 가슴위에 흰 포를 깔고 그 위에 성체를 모시어 놓았다. 성인은 경건히 예수님을 흠숭하면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때는 1941년 6월 19일이었다.
<성녀 율리아나 04월 05일 신비가>
1258 신비가 코르닐롱산
플란데르 리에쥬 교외 러틴느에서 태어난 그녀는 5세 때에 고아가 되어 코르닐롱산의 수녀들의 도움을 받고 성장하였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환시를 경험하였는데, 그때마다 주님께서는 성체를 공경하는 축일이 없다고 지적하셨다. 그후 그녀가 수녀가 되었고, 1225년에는 원장으로 선출되면서부터 자신의 환시 내용을 기초로 축일을 만들려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런 저런 오해도 많았고 제재를 당하였으나, 마침내 리에쥬의 주교가 교구내에 "주의 성체 축일"을 도입하였다(1246). 그러나 그 주교가 사망하면서부터 그녀를 반대하는 기운이 일어나, 율리아나는 자기 수녀원에서 쫓겨났다. 그후 나무르의 씨토 수도원에 피난처를 마련하였으나, 이곳마저 헨리 2세의 군인들이 파괴하였다. 그녀는 일생동안, 성체 축일 제정과 그 축일의 보급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성녀 율리아나 05월 13일 신비가>
그녀가 잉글랜드 노르위치의 성 율리안 성당벽 외곽에서 은수자가 될때까지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1373년, 그녀는 16 차례나 계시를 경험하였는데, 이때마다 탈혼 중에서 그리스도의 수난과 성삼위에 대한 계시를 경험하였는데, 이때마다 탈혼 중에서 그리스도의 수난과 성삼위에 대한 계시를 받았으며, 그후 20년 동안이나 계속하여 위의 두 신비를 묵상하였다. 그 결과는 "하느님의 사랑, 강생, 구속, 죄, 보속 그리고 하느님의 위로" 등에 관한 계시록이다. 이것은 영문학에서도 매우 중요시하는 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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