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생활성가>> 4 - 作爲的 용어의 한계 및 극복을 위하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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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소순태 | 작성일2004-04-22 | 조회수2,789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추가 안내: 아래의 글을 읽으신 후에, 최근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성음악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주신 친필서신(클릭하세요) (바로가기 주소: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gospelbbs/-/a/5576/ )을 꼭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독자들의 편의를 위하여 부족한 제가 우리말로 번역을 해 보았습니다. (오늘(2004년 4월 25일) 번역 초본이 완료된 상태이며 휴식을 좀 취한 뒤에 오역을 줄이기 위하여 한 번 더 훓어 볼 생각입니다.) 특히, 어떠한 기준을 만족하여야 "Sacred" Music ("성"음악) 이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한지에 대하여 교황님께서 자상하게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 찬미 예수님!
아래의 제 5552 번의 게시글 (아래의 첨부글1)에서 질문의 형식으로 "생활성가"라는 용어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에 대하여 드린 글에 대한 여러분들의 답변을 넉넉하게 한 일주일 정도를 두고 기다려 보았습니다. 일찍 충실한 답변을 해 주신 최태형 안셀모 형제님(대학 94학번(?), http://www.selmo.org 참고)께 먼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사실은 형제님의 답변글을 읽고는 충실하게 답해 주신데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과 함께 “이런 분들이 계시니 앞으로도 아주 심각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겠구나..” 하는 저 나름대로의 안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답글을 즉시 드릴까 하다 다른 분들의 답글 또한 읽고 싶은 생각에 좀 더 기다리기로 하였었습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한 점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다른 분들께서 답변을 별로 주시지 않기에, 오늘 (2004-04-18일 (참고: 13시간 늦음)) 주일 오후에 (김정식 로제리오 형제님의 글을 전혀 읽지 못한 상태에서) 지금 읽고 계신 이 글을 다 써놓고는, 좀 더 알아보기 위하여 당일 밤 늦게사 최태형 형제님께서 주신 정보를 바탕으로 하여 제가 직접 나서서 나름대로 인터넷 공간을 더 찾아보았습니다. (주: 아래의 첨부글 2, 및 3의 김정식 로제리오 형제님 글을 반드시 잘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중요한(?) 글들이 자라나는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이 쉽게 접할래야 접할 수도 없는 곳의 게시판에 덩그러니 실려 있기만 하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이제 더 이상의 답변을 주시는 분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 글에서는 주로 최태형 형제님께서 주신 답글 내용 및 김정식 로제리오 형제님의 글의 내용을 감안하여, 어떻게 우리가 중지를 모아 접근을 하면 이러한 “작의적 의미”를 담고 있는 용어의 사용으로부터 빚어지는 혼란을 극복할 수 있을까에 대하여 함께 고민해 보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여태까지와 같이 어정쩡한 상태로 봉합을 해 둘 것이 아니라, 이제는 가능한 한 실질적인 해결책을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나.. 하는 저의 바램이 또한 여러분의 바램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도 해 보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보편성 유지를 위하여 우리가 고려하여야 할 일반적인 것들 (가볍게 읽으시거나 그냥 건너 뛰셔도 될 것입니다..^^). 세대간 혹은 입장이 다를 수밖에 없는 분들 간에 공통분모를 찾아야 하므로, 대충 다음의 세 가지 정도를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1-1. 듣는 이의 정서 주로 자라나는 청소년 및 낭만적인 멋을 아시는 분들의 정서에 대하여 일정 부분이상 우리가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파괴적인 음악보다는 건설적이고 따뜻하고 친근감을 주는 부드러운 음악을 원하시는 분들의 입장이겠죠. 물로 이러한 부분에는 듣는 이의 정서를 고려하는, 소위 말하는 세속적인 Entertainment에 해당하는, 요소가 어느 정도는 가미가 될 것입니다.
1-2. 작곡/작사가들의 창작의욕 지속 및 고취의 필요성 컴퓨터, 인터넷, 휴대폰을 포함한 생활여건 및 주변 환경의 변화에 적합한 혹은 걸맞은 음악을 작곡/작사 하시려는 분들의 창작 의용의 지속적인 활성화를 또한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곡을 듣고 싶어도, 이런 저런 혼란 때문에, 아무도 그러한 곡들을 쓰시려고 하지 않게 된다면 결국에는 우리 모두에게 불행한 일일 것이기에. 특히, 사제의 길을 걸어가지 않으면서도 주님의 복음 말씀을 음악에 담아 선교하기 위하여 모든 희생을 감수 하면서도 불철주야 창작의욕에 불타 노력하시는 분들에게 우리가 더 많은 관심과 현실적인 배려를 해 드려야 함은 새삼 다시 강조하거나 더 말씀드릴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1-3. 성교회 사제들의 입장 주님께서 말씀으로 세우신 성교회를 유지 및 발전시켜 나가야 하는 사제들의 입장 또한 우리가 충분히 이해하여, 온 몸과 정신을 다 바쳐서 주님의 가르침에 따른 인류구원사업을 수행하고자 수고하시는 사제들을 우리가 정성을 다하여 도와 드려야 하는 측면 또한 깊이 고려하여야 할 것입니다.
2. 전번의 게시글과 이 게시글을 쓰게 된 동기 한 4 - 5년 전에 이곳 성가 게시판에서 "생활성가"에 대한 논의가 진행이 된 줄로 알고 있습니다만, 서로가 납득하지 못한 부분이 그래도 남아 있었기 때문인지 지금까지 인터넷 공간 여기 저기를 살펴보아도 그러한 대화와 논의의 결과가 구체적으로 반영된 흔적을 찾아 볼 수는 없던 차에, 오히려 지금까지도 여전히 입장이 다른 분들 사이에 지속적으로 평행선을 긋기만 하고 있는 듯 하는 느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지난 번 어느 본당 청년성가대원의 하소연이 계기가 되어 이곳에서 논의가 다시 시작된 셈이었으며, 그 이후에 곧 바로 최근에 서울 평협에서 전례음악 봉사자들을 위한 세미나를 주관하시는 등 한층 나아진 방향으로 문제 해결을 위하여 시도하는 단계에 이르게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누어 주신 자료의 내용이 비추어 볼 때에, 이번의 서울 평협 주최 세미나에서 국악 미사음악 보급을 추진하시는 분들(사제 포함)의 참여는 눈에 돋보이는데 비하여 "생활성가"의 보급을 추진하시는 분들의 참여는 조금은 미흡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며, 또한 일부 발표 자료에서 국내의 교회음악이 성교회 내에서 (i) 전례성가 (ii) 복음성가 (iii) 생활성가 의 세 가지로 이미 공식적으로 분류가 되고 있는 것으로 기정사실화 하고 있는 듯한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도 있는 비교표를 보고는,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저이지만, "이건 아닐텐데.." 하는 생각과 함께, “안되겠다..” 하는 생각도 들어 외람되이 전번의 글을 올리게 되었었습니다.
빠르게 핵심으로 접근하기 위한 첫 번째 조치로서 전번의 게시글에서 질문의 형식으로 문제점을 지적하였으나, 가능하면 아무 것도 모르는 분들께서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답변을 구하고자 동시에 노력하였기에, 단순히 저의 미숙함 때문만이 아니라, 전번의 게시글 내용에 조금은 어색한 부분도 없지 않아 있었던 점에 대하여 너그럽게 이해하여 주셨으면 합니다. 사실은 그냥 두루뭉실하게 여쭈면 듣게 될 대답 또한 두루뭉실할 것이기에, 좀 더 구체적인 답변을 듣기 위한 조치로서 변별력을 높이기를 좀 하였었습니다만, 이러한 것이 세속의 어떤 특정인을 염두에 두고 비난하거나 비판하기 위한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하오니 이러한 부분과 관련하여 혹시라도 마음이 상하신 분 혹은 오해하신 분들께서는 바다와 같은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여 주시면 참으로 고맙겠습니다.
또한 전번의 글을 쓰면서 가장 고려하였던 점은 많은 분들로부터 여러 가지 견해를 담은 답글을 받고자 하였으나, 아마도 저의 필력의 한계로 인하여서인지 극소수의 분들께서 답글을 주셨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답변을 주신 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특히, 과거에 다른 교우님께서 하신 질문에 대하여 주신 답변 보다는 이번에 주신 답글이 한층 더 구체적인 최태형 안셀모 형제님께 거듭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2-1. 전번의 게시글 내용 중에 지적하지 않으신 부분은 동의하는 것으로 간주 꼭 그렇지 아니한 견해를 가진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만, 일단 "분명히 하여야 할 것을 분명히 하는 의미"에서, 전번의 게시글 중에서 여태까지 다른 분께서 지적하지 아니한 부분에 있는 내용에 대하여서는 일단은 공감 혹은 동의를 하는 것으로 간주하면서 이 글을 씁니다. 이러한 논의는 무슨 수학 문제를 푸는 것도 아니므로, 물론 나중에라도 수정하거나 정정하여야 하는 부분이 있으면 언제든지 바로 잡아져야 할 것입니다.
2-2. 지적하신 내용은 최대한 수용 그리고 최태형 형제님께서 구체적으로 지적해 주신 부분은 (제가 볼 때 전혀 그런 것으로 보이지 않으나, 설사 조금의 하자가 있다 하더라도) 평소에 생활성가 분야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분께서 모처럼 해 주시는 산 증언에 해당하므로, 우리는 가능한 한 말씀하신 그대로를 경청하고 또 수용하여야 할 것입니다. 물론, 어느 한 본당에서, 예를 들어, 청년 미사를 주관하시는 사제께서
(i) 간혹 한 번씩(Occasionally) "생활성가"로 미사를 봉헌하도록 허락하는 것과 (ii) "생활성가"의 미사 봉헌을 정례화(Canonize) 하도록 허락하는 것이
그 문제의 심각성에 있어 완전히 다른 수준인 것을 간과하는 듯한 부분이 있는 듯 하나, 이것 또한 요즈음과 같은 인터넷 기반 개방 세상에서는 우리가 상식의 선에서 다 분별할 수 있을 것이기에, 가급적이면 지금까지 "생활성가"를 열심히 해 오신 분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수용하려는 개방적인 자세를 유지하면서 이글을 써 보았습니다.
3. 말이 만드는 거짓형상 (작위적 용어의 한계) - 문제의 시작 전번의 게시글에서 지적하였습니다만, 제가 판단하기에 “생활성가”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 발단이 바로 용어 그 자체에 있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를 너무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사실이 아닌 강조 그 자체로부터 막연한 무엇을 추측하게 되어 결국에는 우리들이 생각지도 못한 우를 범하는 경우가 있게 되겠는데, 아마도 "생활성가"라는 합성어의 경우가 바로 이 경우가 아닌가.. 하는 깊은 우려를 하게 됩니다.
주: 이러한 의도는 “생활성가”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김정식 로제리오 형제님의 글에서 아주 짧게 “성가라고 이름하였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신 데서도 조금은 찾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참고: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cmusic_pdsmulti/-/a/363/ 편의를 위하여 아래에 첨부하였으며, 첨부글3을 찾아내어 읽기 전에 이 글의 작성을 거의 완료하였습니다).
그러나 최태형 안셀모 형제님께서 주신 말씀에 의하면, 김정식 로제리오 형제님께서 "생활성가"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셨고 (주: 아래의 첨부글3에서 김정식 형제님께서 70년대 말이라고 하시는군요) 또 김정식 형제님께서도 “생활성가”로 부르는 것 보다는 “생활가요”로 부르는 것이 좋지 않았나..라는 말씀도 하셨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처음에는 세속적인 음악의 한 형태를 표현하기 위하여 “생활성가”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판단됩니다만, 그러나, 세월이 한 25년 정도 (거의 한 세대) 흐르다 보니 이러한 단어를 만드신 분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또 설상가상으로 이 용어의 생성과 관련한 배경설명 혹은 용어의 의미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잘 접할 수 없고 하여서인지, 예를 들어, 그냥 인터넷 접속을 통하여 "생활성가"라는 단어부터 처음 접하게 되는 청소년들에게 있어서는, 이 단어 자체가 주는 강조 때문에, "생활성가"가 이미 성교회의 "성가"의 반열에 오른 줄로 착각을 하게 되는 점을 확실하게 지적하고자, (최태형 형제님께서 주신 처음 답변글을 읽고는) 이러한 내용을 전번 게시글의 본문에 추가하면서, 듣기에는 상당히 거북할 수도 있는, “... 작위적인 합성어"라는 표현으로 게시글의 제목을 변경하였었습니다. 즉, 용어 자체에 지나친 수준의 무한한 생명력을 인위적으로 불어 넣었던 것이 이제까지 문제를 일으키고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 것입니다.
4. 세속 음악의 분류와 교회 음악 분류에 있어 이러한 작위적 용어로 인한 겹침의 문제 - 문제의 증폭 및 발전
사실, 제가 느끼고 있는 문제의 핵심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이렇게 무한한 생명력을 가진 그래서 어쩌면 부적절할 수도 있는 작위적 용어를 성교회의 안팍 여기저기에서 한 25년 (거의 한 세대) 정도 다들 자의반 타의반 많이 사용하다 보니, "생활성가" 환경 혹은 이에 준하는 환경에서 청소년기를 보냈을 일부 젊은 사제들마저도 이제는 아주 자연스럽게 혼돈을 하시는 것 같아 문제의 심각성이 더 커지고 있는 듯한 이 부분.. 이런 추세로 한 30년 정도의 더 세월이 흐르면, 아마도 별다른 이의 없이 "생활성가"가 한국의 천주교회에 또 하나의 미사 전례 음악 (그레고리오 성가나 전례용 다성음악과 같이)으로 자리를 잡게 될까요? 그러나 “이런 장기적인 시도가 통할까?..” 혹은 “이렇게 진행되는 것은 아닌데..” 하는 우려와 의구심이 강하게 들어 전번의 글을 게시하였던 것입니다.
예를 들면, 개인적으로 제가 잘 아는 자매님 중에는 나이 35세에 이르기 까지, “예쁜 녀석이 암컷일 것”이라는 어린 시절의 막연한 고정관념 때문에, 빨갛고 예쁜 벼슬을 가진 장닭이 암컷인 줄로 착각하고 지낸 분도 계시더군요. 이와 같이 한 번 인식을 잘못하여 고정관념화 하고 나면 다음에 바로 잡는 것이 매우 힘들어지기에, 특히 오감으로 직접 느낄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개념 혹은 의미를 담은 용어를 정의할 때는 우리가 각별히 유의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주로 청소년 미사에서이겠지만 여태까지의 “생활성가”와 관련하여 발생한 최근의 모 본당 청년성가대 해산의 문제 등을 살펴보면, 매우 우려스럽게도 이러한 "미사 전례 음악으로 인정받기 위한 적극적인 공세"가 청년성가대원들에 의하여 구체적으로 표출되는 등 등 일단은 일정 수위 이상에 도달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청년 미사에서의 “생활성가”로 인한 아픔이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요?
어느 본당에서건 어버이 성가대 혹은 장년 성가대의 지휘자가 “생활성가” 혹은 “복음성가”에 속하는 곡을 영성체 특송으로 자주 올리고 하면 얼마 못가서 그만 두거나 아니면 짤리고 하는 것을 저도 더러 보아 왔습니다.
이것 또한 "생활성가"라는 단어를 두고서,
생활성가 = (생활 = 세속적) + (성가 = 비세속적)
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므로, 가톨릭 성교회가 추구하는 신앙적 보편성의 결여 요인이 단어 속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청년 미사와 장년 미사의 분위기의 차이로 인한 괴리감 때문에, 나이가 30대 중반에 들어서도 결혼할 생각은 않고 여전히 청년 미사에 참석하는 젊은이들.. 혹시 “생활성가”가 가지고 있는 (바람직하지 않은) 매력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해서, 기성세대인 우리가, 또 어떤 면에서는 신앙의 선배인 우리들이, 그동안 “생활성가”가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하여 알고는 있었으나 좀 방치하지는 않았던가 하는 반성을 하면서 다음의 제안을 해 봅니다.
5. 문제 해결을 위한 몇 가지 제안 부족한 자이나 나름대로 다음의 제안을 해 보았습니다. 더 나은 방안이 있으신 분께서는 언제든지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5-1. 평신자로 구성된 일원화된 대화 창구의 설정 및 상호이해의 폭을 넓히자 (서울 평협 주관?)
여태까지는 이러한 창구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만 일단 “생활성가” 영역에서 활동 중인 분들을 포함한 평신자들이 모여서 일정수준 이상의 대화가 진행되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서울 평협측에서 주관해 주시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5-2. 세계화를 대비한 미래 지향적인 명칭 변경 이 부분은 부족한 저의 제안이오니, 더 나은 명칭이 있으면 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5-2-1. "생활성가"는 "가톨릭 생활가요"(혹은 "가톨릭 CCM")로, 영어명은 "Catholic Life Song of Korea" (혹은 Catholic CCM of Korea)
(최대형 안셀모 형제님께서 말씀해 주신) “생활성가”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하셨다는 김정식 로제리오 형제님의 견해를 십분 반영하여 이렇게 제안해 봅니다. 그리고 만약에 우리나라에서 “생활성가”라는 세속적 음악 장르를 독자적으로 개척하기 시작하였다면 이것 자체가 또한 매우 의미가 있는 일이므로, “생활성가”라는 세속적 음악 장르의 특징과 그 범위에 대하여서도 연구하는 분들도 계셔야 할 것입니다.
5-2-2. 가톨릭 성향의 "복음성가"는 (개신교측과는 달리) "가톨릭 복음가요"로, 영어명은 "Catholic Gospel Song of Korea" (혹은 Gospel Song of Korea)
우리의 교리와 교의가 개신교 측과 다르기에, 가톨릭 성향의 복음성가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 이러한 제안을 해 봅니다.
5-3. (시급한 조치) “생활성가” 및 “복음성가”의 역사 및 소개에 관한 표준화된 글을 작성하여 복음성가 및 CCM 관련 대다수의 천주교 성향의 국내 홈페이지의 초기화면에서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조치.
개인적으로 가장 시급한 조치가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며, 누군가가 진작에 이러한 조치를 하였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너무 많습니다. 가톨릭 CCM 분야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최태형 안셀모 형제님께서 이 일을 추진하여 주시면 단시일 내에 잘 진행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여, 특별히(?) 최 형제님께 이 부탁을 드립니다. 음.. 아마도 제가 전번 게시글에서 드렸던 질문보다 더 어리석은 질문을 하시는 분들은 이제 없을 것이기에, 이번에 논의된 것들을 종합하여 정리하면 될 것으로 생각 됩니다.
5-4. 국악 미사곡 창작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자. 사실 세계화란 우리 고유의 것을 발굴하여 밖으로 나아가는 것을 뜻하기도 하므로, 어쩌면 서구적이라 할 수도 있는 기존의 “생활성가” 영역에서 활동하신 분들께서도 우리의 민족정서가 담길 수밖에 없는 국악 미사곡의 창작 및 보급에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5-5. 각 본당의 청소년 미사 (청소년 교육분과 등의) 유관 부처에서는 "가톨릭 생활가요"로 시작한 청소년들에게 교회음악인 "가톨릭 성가"로의 입문 과정을 청소년 교육과정에 잘 반영하여 꾸준히 교화하도록 한다.
사실, 이 부분이 그 동안 잘 되어 왔더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겠지요.. 아마도 청소년들을 선교하여 성교회로 이끌어 들이는 일에 다들 너무 바쁘다 보니, 이들에게 미사 전례음악에 대한 제대로 된 교육이 상당히 부족하였던 모양입니다.
6. 결언 과거와 마찬가지로 미사전례에 합당한 음악은 세월이 가면서 당연히 늘어 날 것입니다. 즉, 꼭 어떠한 장르에 속하는 음악에서만 반드시 미사전례에 합당한 음악이 나와야 한다는 그러한 시기는 아마도 지나간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국악 미사곡들이겠죠..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미사전례에 적합한 음악작품을 만드는 창작활동은 “생활성가”라는 특정한 용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 것이기에, 이 글에서는 “생활성가”라는 용어가 교회음악 창작활동에 미치는 긍정적인 면 (혹은 있을 수 있는 부정적인 면)에 대하여서는 전혀 언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한없이 부족한 불초소생이지만 굳이 이번의 글들에서 제가 노력하였던 점이 있다면, “최근에 들어와 우리나라 천주교 교우 (및 사제)들 간에 교회음악과 관련하여 증폭되고 있는 착각 혹은 혼란의 뿌리가 바로 ”생활성가“라는 작위적(作爲的) 합성어 그 자체가 아닌가 하는 지적 (위의 제 3절 및 제 4절), 그리고 이 문제의 원만한 해결을 위한 몇 가지 제안(위의 제 5절)”일 것입니다.
끝으로 충실한 답변을 통하여 “생활성가“에 대하여 이해를 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신 최태형 안셀모 형제님께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드리면서 이만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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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첨부글 2 ----------------------------------------------------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cmusic_pdsmulti/-/a/362/ 의 내용입니다. 최 태형 형제님 덕택에 찾아 냈습니다..^^
---생활 성가의 역사 (김정식 로제리오 형제님) (게시일: 2002-05-17)
생활성가란 가톨릭 교회에서 기존에 불리우던 전례성가 이외의 새로운 노래들을 일컫는다.개신교회에서는 찬송가,복음성가,CCM 등으로 분류되어 있지만 ,가톨릭에서는 분류를 하지않으며, 굳이 분류를 한다 하더라도 모호한 면이 많다.
「생활성가」라는 용어는 전혀 다른 뜻과 용도로 이미 그 전부터 쓰여져 왔지만 지금과 같이 교회음악의 한 장르로 처음 공개적으로 사용했던 김정식에 의하면, 생활성가란 한 마디로 ’삶 속의 찬미(Hymnes In Life)’라고 정의된다.
전례성가로 신앙생활을 다 표현하거나 채워낼 수 없었던 대다수 신자대중들의 정서를 대변하여 새로운 노래를 만들어 내었고, 이것들이 젊은이들과 수도자들을 중심으로 불리우다가 전례에까지 도입 활용되었다.
이런 생활성가의 시작이 어디인가를 가늠하는 것은 쉽지않고 별 의미도 없다. 기독문화의 오랜 전통을 지닌 서양에서도 복음성가의 시작이 어디인지를 구분짓고 정의하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혹자는 영국에서 시작되었다 하고 다른 이는 미국의 흑인영가에서 발전하였다 하나 현재 쓰이는 노래중에 어떤 장르의 효시를 따지느냐에 따라 달라질 터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의 현실도 다르지 않다. 이문근 신부님께서 1960년대에 <가톨릭 문학>이라는 잡지에 기고하신 글을 보면 ’교회 음악에 쟈스(아마도 쟤즈)를 도입하는 것에 대하여’라는 제목하에- ’어떤 장르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고 그 음악을 부르고 듣는 이로 하여금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동경하게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중요하다’-라고 하신 말씀을 보면 그 당시부터 생활성가와 같은 대중성가의 필요성이 대두된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래도 굳이 거슬러 따져 보자면 아마도 그 직후인 60년대 말부터 광주교구 살레시오 수도회의 원선오 신부님과 윤선규 신부님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분은 당시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유럽에 번지고 있던 새세대 운동(Gen Movement)에서 양산된 새로운 노래들(’젠성가’로 불리웠음)을 번안하여 교회내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보급하였고 자연스럽게 연주와 편곡에 능하셨던 원선오 신부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창작성가를 만들어 함께 보급하셨다. 다만 광주교구라고 하는 지역적 여건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제대로 평가되지 않고 있고 당연스럽게 자리매김도 안되고 있다고 본다.
이보다 조금 늦게 부산교구에서 수원교구로 옮겨와 사제가 되신 이종철 신부님께서 새로운 성가를 많이 만드셨고, 서울 교구 몇 개의 성당을 통해 보급되었다. 메리놀회 조영호 수사님께서는 이상으로 언급된 두 분의 새노래를 중심으로 외국번역곡을 합하여 ’가톨릭 공동체의 성가집’을 내게 되는데, 이것이 전례성가집 이외의 새로운 노래집으로는 최초라 여겨지므로 굳이 생활성가라 명명하지 않았더라도 아마도 생활성가의 효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무렵 바오로딸 수도회에서는 외국곡을 번안하여 몇 개의 음반을 내 놓았는데, 음반으로 본다면 이 또한 처음이 될 터이나, 비공식으로 녹음하여 세상에 돌아다닌 젠노래 음반과 시기적으로 누가 더 우선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후 이러한 노래들이 70년대를 이끌어 주다가, 70년대 말쯤에 본격적인 창작생활성가들이 나오게 되는데, 그것이 김정식의 노래들이다. 대학가요제를 통해 일반 대중들에게 알려진 그는 이 시기에 이 해인 수녀님의 시에 곡을 부쳐 당시 마땅히 부를 노래가 많지 않았던 수도자들과 신학생들을 중심으로 보급되었다.
이 시기는 우리나라 개신교회에서도 ’사랑’ ’이 시간 주님께’ 등 국내 작곡가들에 의한 복음성가가 탄생되던 때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서 전례 밖 성가의 시작은 개신교회와 가톨릭 교회가 같은 때라고 보아야 한다.
80년대 초반에 성령쇄신 봉사회에서 활동하던 권오륜, 가나안 찬미그룹에서 많이 불려진 노래들(대부분 성모신심을 찬미하는)을 만들었던 이필호등이 활동하였는데, 1984년에 당시 신학생이었던 권오륜은 미래의 교회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라는 신념으로 가톨릭 맹인선교회 내에서 활동하던 ’글로리아 찬미선교단’과 김정식을 접목하여 ’가톨릭 생활성가 찬미회’가 생겨나게 되었고, 이후 이 단체에 의하여 최초의 공식 창작생활성가 음반과 책이 ’김정식 로제리오 생활성가’라는 이름으로 나오게 된다.
이후 80년대의 교회내에서는 이들이 발표한 노래들과 서울,광주(뒤이어서 수원)의 신학교 학생들이 만들어낸 창작 노래들이 교회 안에서 활발하게 불리워졌고 80년대 말 ’파리 그레고리오 성가대’의 초청으로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김정식은 바오로 딸 수도회의 요청으로 함께 협력하여 음반을 만드는 과정에서 김정식의 권유로 ’창작성가 공모’를 하게 된다.
공모후 입상곡은 음반으로 제작되어 보급되었고 3년간 이 일을 한 후에는 신상옥이 뒤를 이어 이 일을 하게 된다. 물론 신상옥은 이 일 외에도 자신의 창작곡들과 기존의 공동체 성가나 개신교 복음성가들을 바오로 딸 수도회와 협력하여 음반으로 제작하였고, 교회안에서 좋은 반응을 얻어서 생활성가라는 장르의 대중화에 많은 기여를 하게된다. 이 일 외에도 신상옥은 서울대교구 교육국,CCK 와 협력하여 ’청소년성가집’을 발간하는 일을 하게되었고 이 책 또한 교회내에 생활성가를 보급하는 데에 큰 공헌을 했다.
90년대에 들어오면서 평화방송이라는 매체를 통해 생활성가의 보급은 새로운 활로를 찾게 되었고 이후 많은 생활성가 가수와 작곡가들이 세상에 나왔지만, 오랜동안 우리나라에 잔존해온 방송국과 대중가수라는 도식적인 악순환 고리의 모순과 방송이라는 매체가 지닌 역기능의 한계를 다는 극복해 내지 못한 상황이고 ’기쁜 소식’만을 담아 부르게 되는 생활성가의 순수성과 아직은 부조화속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생활성가라는 장르가 마치 방송꺼리를 채워주는 정도 이상은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런 현실속에서 생활성가가 교회 미래의 희망이라는 신념을 가진 박종인PD의 개인적인 노력으로 ’PBC 창작성가제’가 탄생되었고 올해로 3회 째를 맞이하면서 주위의 많은 후원과 호응을 끌어내는 데는 얼마간의 성공을 거두었지만 본래의 목적인 좋은 생활성가의 발굴과 보급에는 만족할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김정식 로제리오 kimrogeri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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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성가의 현황과 바람직한 방향의 모색 (김정식 로제리오 형제님) (게시일 2002-05-17)
1.생활성가의 현황
현재의 생활성가는 가톨릭교회의 위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80년대 이후 교회는 급격한 양적팽창으로 외형을 갖추는 데 너무 치중하였고, 산업사회의 뒤를 이은 신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물결을 타고 급격하게 물질 중심으로 세속화 되어갔다. 이런 흐름의 후유증으로 교회는 교회 본래의 소명인 복음의 가치를 많이 벗어나게 되었고, 세속과 뚜렷하게 구분되는 진리를 보여줄 수 없다는 데에 희망을 잃고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갔다. (교회공동체에서 활동하고 있다 하더라도 실제적으로는 교회를 떠나간 것으로 보여지는 사람이 많다는 뜻)
그러나 새로운 신자들은 얼마든지 생겨나므로 교회는 겸손을 잃고 교회의 참주인인 일반 신자들에게 심지어 오만불손 해지기까지 해서 교회 공동체를 세우신 그리스도의 뜻이 빛을 바래가고 있고 많은 이들이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은 절망쪽에 더 가깝다고 본다.
이러한 교회 모습의 영향으로 생활성가 또한 세속의 대중문화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 빛이되어 주기 보다는 세속 대중문화에 이끌려 가는 양상이라고 보여진다. 심지어는 대중문화에서 볼 수 있는 ’스타의식과 우상주의’로까지 번질 기로에 서 있다.
2.바람직한 방향의 모색
우리는 무조건적으로 서양의 것을 긍정하고 다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먼저 시작하여 앞서 가는 교회라면 참고하여 본받을 것은 본받는 것이 중요하다.
유럽의 교회 노래중에 모두가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는 TAIZE 노래이다. 여기에는 ’스타의식’도 ’우상주의’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온 세계의 신구교 신자들이 다 즐겨 부르고 있고 심지어 교회나 신앙공동체가 아닌 일반 생활공동체에서조차 공공연하게 불리워진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한 두 사람이 부르는 것을 듣고 있도록 만들어지지 않고 모두가 함께 부를 수 있게 쉽고 단순하게 만들어졌다는 점과,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그리워하게(믿지 않는 이에게조차) 한다는 점일 것이다.
그레고리안이 오늘날까지 사랑받는 이유도 똑같은 것이다. 우리는 걸핏하면 청소년이나 젊은이들이 부를 노래가 없다고 입을 모으는데, 그렇다면 어린이와 노인들이 부를 노래는 있는가? 중년이나 장년들이 부를 노래 또한 있는가? 없다. 그런데 왜 청소년을 위한 노래만 만들어야 하는가? 청소년이 미래교회의 주인이라는 것쯤은 안다. 그러나 복음이 언제 주인만을 섬기라 했는가? 좋은 노래는 모든 이가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함께 부를 수 있어야 하는데 TAIZE 노래가 그렇다는 것이다.
청소년이 부를 노래가 없다며 모든 창작성가들은 대부분 청소년이 부를 수 있게 되어있는 현실의 구도는 대중문화의 판박이이다. 어떤 어른이 새로운 창작생활성가를 함께 부를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 대중문화의 수용자가 청소년이라고 낙점한 것은 상업매체의 수작에 불과한데 우리 교회문화마저 그 수작에 발맞추는 것처럼 여겨진다. 물론 요즘 청소년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들이 잘못되었으니 거부하자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세대를 아우러서 함께 할 수 없는 노래라면 생활성가의 바람직한 틀은 아니라는 점이다.
또한 세속음악을 거부하자는 것이 아니라 수용하면서도 세속음악에서는 느낄 수 없는 뚜렷한 감흥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성가라고 이름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세속 대중노래에도 영향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장르나 스타일 문제가 아니라 ’영성적인 삶에의 동경’을 느끼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불려질 성가는 우리 정서를 잘 살려야 한다는 점도 꼽고 싶다. 이제 세계가 국제화시대로 돌입하여 가장 자기다운 것이 아니면 살아남기 힘들다. 전통가락만을 차용하자는 뜻이 아니라 한국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우리다운 정서를 가락으로 잘 담아내어 주어야 한다는 뜻이다.
가사내용에 있어서는 최근 세계 사태에서 잘 느꼈듯이 기독교도 선교일변도의 일방주의는 이제는 설 자리가 없다. 공존해야 하고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삶으로 눈길을 돌려야 한다. 이른바 사회의식인데, 복음안에서 사회의식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복음이라는 어원 자체가 해방을 예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방이 필요한 곳이 우리가 살고있는 사회 속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데 ’찬양과 경배’(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일변도로 흐른다거나 선교의식만을 고취시키는 노래는 예전에 비해 사회의식이 많이 고취되어 있는 신자대중의 고른 지지를 받기 힘들다.
여기서 아우구스티노 교부의 ’예술창작론’을 잠시 언급하고 싶다. 교부는 예술창작이 이루어 지는 신비를 Revelation-Inspiration-Illumination 의 과정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를테면 ’신의 계시가 있고 그 계시에 의해 예술창작인이 감흥(감응)을 얻게 되며 이 두 가지가 내적조망을 이루어내는 순간에 창작이 이루어진다’라고 하셨는데 필자는 생활성가 창작인들은 기본적으로 소명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보고 이 시대에 내리실 하느님의 계시가 곧 바로 우리가 처한 현실에 대한 사회의식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본다.
특별히 21세기를 맞이한 우리 한국 사회의 현실 속에서 아직도 어둡고 소외된 곳으로 여겨지는 ’인권회복과 환경보전’에도 눈길을 돌려 교회 내에서 뿐 아니라 교회 밖 세상 사람들에게도 기쁜소식과 해방의 기쁨을 알리고 나누어야 할 것이나 아직 우리의 생활성가는 교회 내에 머물러 있는 것 같은 안타까움이 크다. 이것은 외국의 경우(가스펠과 CCM)와 견주어서도 그렇다.
교회의 입장을 살펴보자면, 우선 교회는 생활성가라는 장르가 사목활성화의 좋은 매체라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에 앞서 ’성직자 중심의 교회’라고 불려지는 우리 교회는 ’사목’이라는 것이 성직자,수도자,일반신자들이 어우러져 함께 하는 것이라는 사실도 인식하지 못한 채 ’사목’이란 성직자가 평신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직분으로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대세여서, 대부분 일반신자들인 생활성가 가수나 작곡가들을 ’사목의 동반자’로써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목 동반자’ 대우는 고사하고 전문인 대우를 받는 것도 어렵다.
그리하여 교회내의 행사에서도 공공연하게 일반 상업가수들을 활용하고 있다. 이 문제는 교회 매체도 단단히 한 몫을 거들고 있다. ’아무리 인기가 절정인 가수라 해도 방송국에서 싼 출연료로 부르면 와야한다’는 약점을 십분 활용하여 꼭 필요하지만 오히려 돈은 더 들여야 하는 인기없는 생활성가 가수를 ’사목의 동반자’로써 활용하기보다, 한 순간의 여흥이나 끌어낼 수 있고 사람들을 많이 꼬여들게 도와주는(이점은 곧 바로 ’우상주의’로 연결됨) 상업가수를 부른다고 하는 너무나도 비복음적인 태도 앞에서 생활성가 관계자들의 설 곳은 어디에도 없는 현실이다. 그러므로 그런 일에 번번히 상처받은 몇몇 생활성가 가수는 상업가수처럼 변절되어 갈 수 밖에 없다고 본다. 살아남기 위해서...그것도 아니면 눈치 빠르게 처음부터 상업가수 흉내를 내든지.
여기서 미래의 전망을 살펴보자면, 이 또한 교회의 입장변화와 무관하지 않아서 교회가 복음적인 모습으로 달라지지 않는 한 생활성가 관계자들의 입장이 나아질 전망은 전혀 없다. 거의 절망적이다. 다만 우리가 그럼에도 소명의식을 갖고 살신성인의 정신과 순교자 정신으로 애를 쓰고 노력한다면 우리 모두가 원하는 바람직한 복음노래, 좋은 생활성가를 만들어 낼 수는 있다. 그리고 이런 일은 곧바로 만들고 부르는 자신에게 우선적으로 기쁜소식이 되어줄 것이고, 이처럼 열악하고 척박한 상황 속에서도 ’가뭄의 단비’를 기다리는 많은 의인들(영적인 삶을 동경하는)의 갈증을 채워줄 수 있을 것이다.
김정식 로제리오 kimrogeri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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