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전례음악 토착화에 대한 생각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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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강수근 | 작성일2004-08-16 | 조회수1,755 | 추천수15 | 반대(0) 신고 |
전례음악 토착화에 대한 생각1 + 찬미 예수님! 뜻하지 않은 제 글에 많은 분들이 당혹해 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로서는 이번 기회에 평소에 가지고 있던 생각을 계속 나누는 것이 미래 한국 성음악의 균형적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먼저 소중한 의견을 나누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우선 밝혀두고 싶은 것은 자칫 저를 오직 국악만 알고 그것만을 고수하려는 외골수적인 국악주의자가 아닌가 하는 의심은 거두셔도 좋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교회 전통음악을 사랑하고 거기서 많은 영신적 유익을 얻을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성가를 듣고 자란 사람이고, 청년시절 성가대 지휘자였으며, 미국에 있을 때는 뉴욕 퀸즈 성당의 지휘자를 맡기도 했었습니다. 아울러 전례에 대한 강의를 광주 성 음악원에서 하기도 했고요. 즉 전례나 전례음악에 대하여 이론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부끄럽지 않을 만큼 잘 숙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문적인 공부도 했고요. 성음악에 대해 음악적인 해석도 남들하는 만큼은 할 줄 압니다. 그러니 저를 아주 성음악에 무식한 국악주의자라는 색안경을 끼고 보지 않으셔도 되겠습니다. 사실 저는 수도원에 입회하기 전까지 국악을 전공한 전문연주자였습니다. 그러나 수도원에 입회하면서 음악을 놓았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하느님을 따른다는 생각에서였고, 거기에는 제 인생의 가장 소중한 부분 중의 하나였던 음악도 포함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뜻하지 않게 국악미사곡을 작곡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수련장 신부님의 권고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이 미사곡이 그렇게 놀라운 반응을 보일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었습니다. 여기저기서 강의 요청이 있었지만 학생신분이던 저는 다시 수도생활에 정진하여야 했고, 서품을 받은 이후에는 광주 명상의 집에서 피정지도를 해야 했습니다. 이 기간에 다달이 국악성가를 배우고 싶다는 교우들의 요청으로 국악성가 배움터를 시작한 것이 제 첫 번째 성음악 활동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필요에 따라 이런저런 곡들을 한 두곡씩 써 나가기 시작하면서 국악성가의 절대부족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994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다시 성음악을 공부할 기회를 얻게 되면서 무엇이 제 소명인가를 조금씩 깨닫게 되었습니다. 즉 한국 성음악 토착화의 밑거름이 되는 것이 바로 제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임을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1998년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다시 광주에서 원장 일과 피정지도 일을 하게 되었고, 곁붙여 국악성가 한소리 합창단이라는 교구차원의 성가대 지휘를 맡아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제 소명을 좀 더 뚜렷이 인식하게 되었고, 이 소명을 이루려면 교회전통음악을 좀 더 심도 있게 공부하여야겠기에 수도회 장상과 형제들에게 청을 넣어 아주 어렵게 작년에 다시 공부를 하러 로마에 오게 된 것입니다. 저에 대한 소개는 이쯤 해두고 우선 여러 반응 중에서 특별히 학구적인 의견을 제시하신 소순태님의 노고에 감사를 드리고, 거기에 대한 몇 가지 의견을 첨부하고자 합니다.
1. 라틴어 미사경문의 사용과 교육에 대하여 : 원칙적으로는 찬성합니다. 그러나 일상적인 사용을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그것은 좀 무리지 싶습니다. 사도신경에 대해서는 노래로 바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1시간 안에 주일 미사를 끝내야 한다는 생각이 사제들이나 신자들 의식 안에 굳게 자리 잡고 있어 시간적인 제약에 쫒기기 때문이지요. 이 점은 앞으로 함께 풀어나가야 할 숙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기도는 제시하신 다른 전례문 보다 더 상위에 속하는 일급성가로서 우선적으로 노래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생활성가”나 “국악성가” 라는 용어에 대하여 : 이것은 직접적으로 용어사용에 대한 의견을 제시한 것이기에 여기 그 부분을 인용합니다. 그러나 비록 (작곡된 곡의 장르와는 무관하게) 용도가 전례용으로 작곡한 곡이라 하더라도 성교회의 미사전례에 적합한 "성"음악으로 인정을 받기 위하여서는 성교회의 교의가 담긴 ""성"음악의 정의"를 공히 만족하여야 함. 그러므로, "생활성가"라는 표현과 마찬가지로 "국악성가"라는 작위적인 표현의 무분별한 사용은 되도록 삼가는 것이 바람직 할 것임. 제가 이 부분을 몇 번 거듭해서 읽어 보았지만 말뜻을 잘 알아듣지 못하겠군요. 다시 한번 무슨 요지의 말씀인지를 자세히 설명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냥 제 입장에서 설명을 드린다면, 그레고리오 성가나 다성음악은 왜 그렇게 부르지요? 그리고 그 명칭은 무엇을 상기시키나요? 성가에 이름이 붙는 것은 그 특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 아닌가요? 그래서 이 명칭들에는 하자가 없다는 생각인데요. 혹시 다른 좋은 이름이 있으면 대안을 제시해 주시지요.
3. 영어 번역본 대조에 대하여 : 아주 좋은 착상을 하셨네요. 그런데 원문 대조를 하시려면 라틴어본을 제시하셔야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게 원본이거든요. 그러니까 영문본이 더 정확한지 한글본이 더 정확한지는 원문인 라틴어본 대조를 통해서 밝혀야 합니다. 아무튼 여기서의 전제는 영어본은 정확하고 한국본은 오역이 많다는 것인데 이 점에 대해서는 제가 잘 모르겠네요. 저 역시 라틴어본을 보질 않아서... 어쨌든 제가 관심 있는 부분은 토착화에 관해 피력하신 부분인데요, 그 근거로 제시하신 글을 읽어 보았지요. 이 글은 미국의 Musicians in Catholic Worship 이라는 잡지에 Dr. Carroll 이란 분이 게제한 세편의 연재글 중 마지막 글이더군요. 제목은 “Bells and Whistles, Guitars and Tambourines” 이구요. 이에 앞선 두 편의 글에서는 미국 전례 안에서 솔리스트들과 오르간 연주자들이 사라지는데 대한 안타까움의 글을 썼구요. 이 글들의 요지는 미국 교회 안에서 우리와는 정 반대로 토착화의 현상이 일반화되어 교회전통음악이 사라져가는 역현상이 심화되므로 이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그리고 잘못된 방식의 토착화에 대해 비판하는 취지의 글이라 생각됩니다. 그 근거로 박사는 토착화의 근거가 되는 전례헌장 119항을 제시하면서 여기 제시된 "mission lands" (한국어본에서는 포교지방으로 번역)는 미국을 말함이 아니고 “수도배관이나 전기시설 조차 갖추지 못한”낙후된 지역을 일컫는다고 (소순태님은 이를“선교 극한 상황의 경우”를 일컫는다고 설명)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캐롤 박사의 견해는 잘못된 것입니다. 어떤 근거, 특히 교회문헌을 제시할 때는 신중하게 연구하여 제대로 된 해석을 내려야지 그렇지 않으면 이와 같이 큰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문헌에서 말하는 포교지 또는 선교지라는 용어는 엄밀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박사의 견해처럼 아프리카 오지 등의 미개발 지역을 일컫는 말이 아닙니다. 한국주교회의 홈페이지에서 검색란에 “선교”나 “포교” 또는 “인류복음화성”이라는 단어를 입력하면 교황청 기구에 대한 설명 중에서 다음의 정보를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결정에 의하면 “선교 활동은 교회의 내적 본질 자체에서 흘러나옴이 명백하니 선교 활동은 교회의 구원의 신앙을 선포하며 교회의 보편적 일치를 확장함으로써 완성하며, 교회의 사도 계승을 실천케 하며, 교회의 성성을 증거하고 전파하며 증진시킨다. … 교회로부터 파견된 복음의 전파자들이 온 세계에 가서 복음 전파의 임무와 아직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백성들과 집단에 교회를 부식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독특한 사업을 선교라고 하며, 일반적으로 성청에서 승인된 일정한 지역에서 실행되고 있다”(선교교령, 6항). 인류복음화성에 소속된 지역은 유럽 남동부와 아메리카의 몇몇 지역, 아프리카의 거의 전지역, 필리핀을 제외한 동아시아 지역, 오스트레일리아 일부 지역을 제외한 뉴질랜드와 오세아니아 지역이다. 바로 이 인류복음화성(예전에는 포교성이라 부름)에 소속된 모든 지역을 선교지역, 또는 포교지역(mission lands)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국은 포교지역에 속하며, 당연히 전례헌장 119항은 우리나라 성음악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지역의 구분은 전례력에도 차이를 두게 합니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는 10월 1일을 “아기예수의 동정학자 성녀 데레사 대축일”로 지냅니다. 그 이유는 성녀 데레사가 모든 선교지역(포교지역)의 주보성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 유럽에서는 이 날이 대축일이 아니고 기념일일 뿐입니다. 이것은 전례적으로 한국이 아직 선교지역(mission lands)임을 드러내는 명확한 표징아니겠습니까? 이 참에 부언해두고 싶은 것은 교회문헌을 연구함에 있어서 그야말로 작의적 해석은 금물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공의회 문헌은 수개월, 또는 수년에 걸친 토론과 학문적 토대를 바탕으로 작성된 것이기에 그 뒷 배경에 대한 연구 없이는 제대로 그 말뜻을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특히 토착화와 관계해서는 참으로 민감한 문제였기에 아주 열띤 토론이 있었고, 한 단어, 한 단어를 전례위원회 주교님들이 엄밀하게 토의하고 검토하여 의미심장하게 작성된 것입니다. 제게 지금 자료가 없어 그 근거를 제시할 수 없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회의록을 신학 도서관에서 찾아보시면(아직 한국말은 없을 것이라고 봅니다. 영어본이 있을 것입니다.) 회기별로 토의의 진행과정과 문헌의 결정과정을 공부하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선교 극한상황"을 표현하는 말인 "mission lands"와 "전례음악의 토착화"를 동일시 할 수는 없으므로, "전례음악의 토착화"를 연구할 때에 참고로 하는 것은 좋으나 "전례음악 토착화"의 당위성을 설명할 때에 이 자료에 전적으로 기대는 것은 상당한 무리가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라고 하는 소순태님의 결론은 잘못된 정보를 인용한 잘못된 생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히려 이 전례헌장 119항이야 말로 성음악 토착화의 헌장인 것입니다. 이 규정이 없다면 지금 전세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토착화는 모두 무효가 되는 것이구요. 4. 전례음악 토착화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에 대하여 : <그리고 바티칸 제 2차 공의회 문헌에서도 여러 차례 언급하고 있듯이, 합당한 전례음악으로서 어느 누구도 그레고리오 성가나 다성음악만을 고집하지는 않습니다.그러나 다음의 자료에 의하면, "전례음악의 토착화"와 관련하여 일정 수준 이상의 부정적인 시각이 약 20년 전부터 국내 가톨릭 음악계에 있어 왔음 또한 사실인 듯 합니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자료를 제시하셨습니다. 이런 자료를 제공해 주셔서 참 고맙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사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이 바로 이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참 이상하지요? 토착화라고 하면 당연히 그래야지라고 생각해야 할텐데, 왜 회의적인 분위기가 될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 의식 때문입니다. 지금 형성되어 있는 전례음악에 대한 고정관념이 그 외의 다른 생각들이 들어설 수 없도록 만드는 철옹성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전에는 이런 생각을 미쳐 못하고 그저 나름대로 열심히 하다보면, 그리고 세월이 흐르다 보면 절로 자리가 잡히고 사람들도 자연스레 토착화에 관심을 가지겠거니 하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더군요. 오히려 갈수록 토착화에 대해 부정적인 논리가 득세를 하더군요. 그래서 이제부터는 마냥 침묵할 것이 아니라 토착화에 관한 저의 생각을 여러분과 나누고 무엇이 토착화의 바른 길인지를 함께 찾아보려는 것입니다. 전례음악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이 토착화에 앞장서야 바르게 토착화를 이룰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우선 토착화에 대한 개념부터 생각해보지요. 무엇이 성음악의 토착화 입니까? 항간에 회자되고 있는 토착화의 개념부터 정리해야 그 순서가 맞을 것 같습니다. 대개 이런 이론들이 제시되고 있지요.
1. 성음악 토착화는 교회전통음악을 잘 배우고 들여와서 우리 전례 안에서 신자들이 이를 잘 받아들이도록 교육하여 정착시키는 것이다.
2. 성음악 토착화는 국악을 우선시하여 교회음악을 모두 국악으로 바꾸는 것이다.
3. 성음악 토착화는 교회전통음악과 국악을 접목시켜 한국인의 심성에 맞는 전례음악 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위의 세 가지 논리 중에 어느 것이 토착화의 의미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을까요? 우선 1번은 토착화의 개념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논리는 “토착화”라는 용어보다는 “이식” 또는 “수용”이라는 단어가 더 잘 어울리는 개념입니다. 2번 역시 토착화의 개념을 잘못 인식한 경우입니다. 국악은 우리 음악의 뿌리이긴 하지만 전례음악에 막 바로 도입하는 데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국악이 가톨릭전례와는 관계없이 형성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교회의 오랜 음악전통을 일방적으로 무시하는 것은 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3번이 그 중 가장 올바른 개념이며 교회에서 권장하는 바일 것입니다. 여기서 도출되는 결론은 성음악 토착화를 위해서는 교회전통음악과 국악을 접목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성음악인들이 배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적으로 참 어려운 일입니다. 음악을 공부하는 이들은 알겠지만 어느 한부분만 배우고자 해도 거의 평생이 걸리는 힘든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차선책으로는 교회전통음악을 공부한 이들과 국악을 공부한 이들이 마음과 힘을 합쳐 함께 노력하는 방법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열린 마음이 필요하지요. 물론 이것 역시 어려운 일입니다. 서로의 생각이 많이 차이가 있을 테니까요. 그러나 토착화에 대한 뚜렷한 의식이 수반된다면 그 어려움을 넘어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교류와 협력이 잦아지다보면 서로의 좋은 점을 토대로 하여 토착화 작업의 발판을 마련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진정 음악을 사랑하고 이해하는 사람은 어느 음악에서든지 그 음악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음악에 대한 깨달음은 자신의 음악세계를 새롭게 도약시켜 줍니다. 중요한 것은 그 필요성에 대한 의식입니다. 물론 우리는 전례음악이라는 특별한 장르에 봉사하고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합니다. 그런데 그 특별성이라는 것이 편협성으로 드러나게 되면 거기에는 더 이상 선택의 여지나 여타의 가능성이 없어지게 됩니다. 이 점을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 교회음악 역사를 보면 그레고리오 성가에서 다성음악으로 넘어갈 때 이런 위기가 있었지요. 단순한 그레고리오 성가에서 발전한 다성음악이 너무 지나치게 복잡해지자 교회(트렌트공의회)에서는 다성음악을 금하려고 합니다. 이때 팔레스트리나라는 위대한 성음악인이 잘 정돈된 다성음악을 선보여 이 조치를 무마시킵니다. 그것이 저 유명한 마르첼루스 미사곡(Missa Papa Marcelli: 마르첼루스 2세 교황에게 헌정된 미사곡으로 6성부로 되어있으며, 1562-1563에 작곡함) 입니다. 만일 이 때 그가 없었다면 다성음악은 금지되었을 것이고, 지금 교회에는 그레고리오 성가만 남아 있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지금 우리가 최상의 가치를 부여하는 교회 전통음악의 일부도 한때는 교회의 반대에 부딪혔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새로운 시도는 항상 남용의 위험이 수반되며, 그 때문에 반대에 부딪히게 되고, 거기서 정화의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같이 성음악은 어느 한순간에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수세기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의 노력의 결실을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이지요. 토착화와 관계해서 이점은 아주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새로운 의식, 새로운 도전 없이 새로운 성음악도 없다는 것입니다. 몇몇 사람들이 지금 이런 의식을 가지고 어렵게 토착화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권고대로 그 가르침에 충실하면서. 그런데 어떤 이들은“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근다”는 우리 격언대로 “장”에 대한 열정 보다는 “구더기”에 대한 염려와 걱정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습니다. 걱정하지 말고 장을 담그게 두면 좋지 않을까요? 함께 담그면 더욱 좋고요. 구더기는 나중에 건져내면 되지요. “장 담그면 안돼. 구더기 낄까 무서우니까.”라고 괜한 걱정을 하면서 굳이 장 담그는 사람들 기죽일 건 없지 않겠습니까? 그동안 한국 성음악의 역사가 빈한하긴 했지만, 다행히도 이제 많은 이들이 성음악 발전을 위해 노력해온 결과 서서히 그 꽃을 피우기 시작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다행한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열악한 환경에서도 성심껏 성음악 진작을 위해 애써주신 선배 신부님들, 수도자들, 교수님들, 그리고 성심껏 성가대를 맡아 수고해주시는 지휘자, 반주자들과 성가대 임원들, 보이지 않는 수고 속에서 이 싸이트를 운영해 주시는 분들, 새로운 악보들을 지속적으로 발굴해 주시는 분들 등등 두루두루 모든 분께 정말 마음으로 깊이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 모든 노력의 방향이 서양음악 일색으로 치닫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직 우리 성음악인들이 미처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결국 토착화는 요원해지지 않겠습니까? 저는 많은 분들의 이런 노력들 안에 우리 성가에 대한 목마름도 좀 반영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보는 것입니다. 한국의 성미술 분야를 한번 생각해봅시다. 그 쪽은 토착화의 방향으로 상당한 진척을 이루고 있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토착화를 염려하는 논리보다는 토착화를 실현해내는 쪽에 더 무게가 가 있기 때문 아닙니까? 그런데 왜 성음악 분야에서는 토착화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주저하는 것인지 바로 그 점이 안타까운 것입니다. 언제까지 망설이기만 할 것입니까? 이제 성음악 분야에서도 점차적으로 토착화에 대한 의식이 확산되어 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무언가 방향을 모색해야하지 않겠습니까? 2000년대의 한국교회의 성음악 상황이 앞으로 100년, 200년, 500년, 1,000년 후에도 고스란히 대물림 된다면 그것은 비극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 신앙 후손들에게 적어도 부끄럽지 않은 성음악의 유산을 물려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엇을 유산으로 남겨주고 싶습니까? 물론 교회의 전통 성음악도 여전히 남겨 주어야지요. 그러나 그것이면 족하겠습니까? 한국적인 성가는 없어도 좋겠습니까? “아, 그래. 우리 성가도 필요하지”하는 쪽으로 의식을 바꿀 필요가 정말 없는 건가요? “아니야, 우선 급한 것은 교회전통 성음악의 보급이야. 토착화는 그것으로 충분해.”라는 의식을 가지고 마냥 가면 언제쯤이나 토착화가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한번쯤 진지하게 한국교회의 성음악에 대한 자신의 의식을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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