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마르코 복음서 다시 읽기7: 예수님의 참가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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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1-02-02 | 조회수5,487 | 추천수1 | |
[마르코 복음서 다시 읽기] (7) 예수님의 참가족
3,31-35 읽기
지난 호에서는 3,13-19을 읽으면서 제자들의 정체성과 사명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제자들의 정체성은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고, 그들의 사명은 ‘예수님의 일을 계속하는 것’이다. 마르코 복음서의 주요한 등장인물인 제자들의 긍정적 모습을 살펴보고 있는 우리가 이번호에서 함께 읽을 본문은 3,31-35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공동체가 새로운 의미를 띠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함께 그 의미를 찾아 나서 보자.
“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 그들은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다. 그분 둘레에는 군중이 앉아 있었는데, 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① 단락 나누기
3,13-19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열둘’을 세우신 장소는 산이다. 그 후 20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집으로 가신다. 그 집에서 일어난 사건은 35절까지 계속된다. 그리고 4,1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호숫가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신다. 그런데 3,21에 따르면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선다. 그들은 3,31에서 무대 전면에 등장한다. 그리고 21절과 31절 사이, 즉 22-30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베엘제불에 관해 논쟁하신다. 따라서 예수님의 친척들이 구체적으로 등장하는 31절부터 새 단락이 시작됨을 알 수 있다. 이 단락은 35절까지 계속된다. 그리고 4,1에서 장소가 바뀌고(호숫가) 새 단락이 시작된다.
② 본문 자세히 읽기
단락의 첫머리에서 새로운 등장인물인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소개된다. 그들은 예수님을 나자렛으로 다시 데려가기 위해 찾아왔다. 그래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다. 예수님의 친척들은 집 밖에 서 있고, 예수님께서는 집 안에 계신다. 또 예수님 둘레에서 그분의 말씀을 듣는 이들도 집 안에 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친척들은 그분과 함께 있지 않고, 말씀도 듣지 않고 있다. 이 장면은 예수님과 친척들 사이의 갈등을 암시한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지 않으며, 오히려 그분을 밖으로 나오게 하여 그분의 사명을 방해하려 한다.
32절에서 예수님 둘레에 앉아 있던 군중이 친척들의 방문을 그분께 알린다. 여기서 친척들이 밖에서 찾는다는 사실이 다시 언급된다. 예수님 둘레에 있던 사람들은 그분과 함께 있고 그분의 말씀을 듣는다. 그들은 우선 예수님의 제자들이다. 특히 3,13-19에서 세워진 ‘열둘’이다. 동시에 그 군중에는 그분의 가르침을 듣는 모든 사람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놀라운 질문을 하신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33절) 그분께서는 친척들과의 갈등을 피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혈연관계에 거리를 두신다. 사실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에게는 혈통과 가족 관계가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차원의 관계를 제시하신다. 이러한 예수님의 태도는 당시 상황에서 엄청난 도전이며 혁명적 시도이다.
3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신다’. 마르코 복음서에서 동사 ‘둘러보다’는 여섯 번 사용되는데, 예수님의 행동으로 다섯 번 표현된다(3,5.34; 5,32; 10,23; 11,11).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시는 장면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치유 행위를 하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노기를 띠고 그들을 둘러보신다(3,5 참조). 그러면서 율법의 안식일 규정 뒤에 숨어 있는 사람들의 익명성과 폭력성을 폭로하신다. 또 어떤 부자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거절한 후(10,17-22 참조)에 예수님께서는 주위를 둘러보시며(10,23 참조) 제자들에게 하느님 나라와 부자에 대해 말씀하신다.
이번 호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주위에 앉아 있던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그들이 누구인지 한 사람씩 살피시고, 당신과 그들의 관계를 확인하신다. 이와 같이 그분께서는 당신 주위에 있는 이들에게 중대한 선언을 하시기 전에 먼저 그들을 둘러보신다. 예수님의 이러한 행동을 통해 우리는 마르코 복음서의 소명 사화(1,16-20; 2,14 참조)에서 제자들을 부르기 전 먼저 그들을 보셨던 행동을 떠올릴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중요한 행동이나 말씀을 하실 때 먼저 그들을 ‘보신다.’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34ㄴ-35절)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새 가족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이것은 혈연관계가 아니라 예수님을 중심으로 그분과의 친교(communion)에 바탕을 두어 형성된 새로운 공동체(community)를 의미한다. 하느님의 뜻은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다. 따라서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그분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에 이르는 길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듣고 있던 이들을 둘러보시고, 그들이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새 가족은 우선 그분의 제자들이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그분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이들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제자들의 공동체를 새로운 가족이라고 표현하셨다.
그런데 본문에서 예수님의 새 가족은 제자들뿐 아니라 더 넓은 차원으로 열려 있다. 즉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는 누구나 새 가족의 구성원이 된다.
[성서와 함께, 2011년 1월호, 송창현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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