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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아기 예수와 시메온의 만남, 루카 2,2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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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1-02-04 조회수4,194 추천수1

‘만남과 관계’로 본 루카 복음 - 루카 2,25-32


아기 예수와 시메온의 만남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맺는다. 그 가운데 많은 이가 주님이신 예수님과 만나며 진한 기쁨과 감동을 체험했을 것이다. 앞으로 루카 복음서에 나타난 ‘만남과 관계’를 중심으로 묵상하고자 한다. 등장하는 인물들과 예수님의 만남과 관계를 바라보며 우리와 그분의 만남도 새롭게 하고자 한다.

 

 

의인 시메온

 

예수님 탄생 40일 뒤 그의 부모는 그를 하느님께 봉헌하고자 예루살렘의 성전에 갔다.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은 하느님이 계시는 이스라엘 백성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장소로 아기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첫 출발지며 목자들과 동방박사들이 아기 구세주를 경배하였던 곳이다.

 

이 도시에 ‘들어줌, 성취’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시메온이 살고 있다. 성경 저자는 시메온을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25절)라고 표현한다. ‘의롭다’는 것은 율법을 잘 지킨다는 뜻이며, ‘독실하다’ 함은 루카 복음에서 신앙인의 의무를 준수하는 데 특별히 신중함을 표현한다. 같은 표현을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부모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루카 1,6). 이들의 공통점은 하느님 뜻에 순명하는 이들로 경신례에 성실하며 하느님의 약속을 신뢰한다는 것이다.

 

곧 이들은 주님의 가난한 이로서 ‘아나빔’의 신앙을 상징한다. 의롭고 독실한 시메온은 그 자신의 구원이 아닌 이스라엘의 위로, 곧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에 관심이 있었다. ‘위로’는 고통이 전제되는 상황으로 구원과 해방을 뜻한다. 여기서 우리는 유다 지파의 메시아가 오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시리라는 희망과 이민족의 억압으로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짐작할 수 있다.

 

 

성령의 역사하심

 

아기 예수님과 시메온의 만남에서 성경 저자는 세 번에 걸쳐 성령의 역사하심을 강조한다(25.26.27절). 성령은 일시적으로 잠시 오신 것이 아닌 시메온의 삶의 여정에 머물러 계시는 분으로, 능동적인 실재로 나타난다. 성령께서는 그에게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주셨으며 구세주를 만나도록 그의 영혼을 움직이셨고 그를 성전으로 이끄셨다. 그렇다면 시메온은 예언자인가? 성경 어디에도 그런 표현을 찾을 수 없다. 성령께서 먼저 시메온에게 주님을 뵐 것이라는 은총을 주셨고, 시메온은 그것을 희망하였다.

 

시메온은 희망하던 구세주를 성전에서 만난다. 시메온이 우연히 성전에 간 것이 아니라 성령께 이끌려 간 것이다. 처음에 그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아기 예수님을 보았을 때 마침내 깨닫게 되었다. 아기 예수님 또한 율법을 이루고자 부모에 의해 성전에 오게 되었다. 곧 율법과 성령은 하느님의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과 시메온을 만나도록 이끌었다.

 

마침내 시메온은 아기를 두 팔에 안는다. 아기를 보는 순간 두근거리는 그의 심장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방실방실 웃는 아기 예수님의 얼굴에서 고대하던 그리스도를 보는 시메온! 그분이 그의 희망을 성취하신 이스라엘의 위로자이심을 깨닫는다. 감격한 시메온의 마음을 어떻게 형언할 수 있겠는가?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그 감격을 표현한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주셨습니다”(29절). 이 고백은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창세 15,15)과 야곱이 아들 요셉을 다시 찾았을 때 한 말 “내가 이렇게 너의 얼굴을 보고 네가 살아있는 것을 알았으니, 이제는 기꺼이 죽을 수 있겠구나.”(창세 46,30)를 생각하게 한다.

 

 

시메온의 찬미

 

아기 예수님이 주님이신 그리스도임을 깨달은 시메온은 기쁨에 겨워 찬미가를 부른다. 이 찬미는 5세기부터 교회의 성무일도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불리는 기쁨의 노래가 되었다.

 

찬미의 처음, 시메온은 주님을 부르며 자신은 종으로 표현한다. 이는 시메온이 얼마나 절대자이신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는 삶을 살았는지를 알게 한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주셨습니다”(29절). ‘이제야’라는 표현은 시메온의 기다림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는 것과 이제 메시아적 구원의 시간이 도달했음을 알려준다. 시메온은 메시아이신 그리스도를 뵘으로 평화로이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음을 고백한다. 이 평화는 이미 예수님 탄생 때 천사들이 선포한 평화이다(2,14).

 

다시 말해 아기 예수님의 탄생은 이 세상에 평화가 도래했음을 뜻한다. 시메온은 그의 팔에 안긴 아기 예수님을 통해 이 평화(구원)를 보고 있다. 이제 시메온은 더 이상 구원을 기다리지 않는다. 이미 그의 팔 안에 하느님의 위로, 곧 구원이 있기 때문이다(구원의 완전한 실현은 예수의 십자가상 죽음과 부활로 이루어진다.)

 

시메온이 체험한 평화는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 평화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즈카르야의 예언(루카 1,79)이 실현되었음을 가리킨다. 그러기에 시메온은 모든 이가 보기를 갈망(루카 3,6)하는 구원을 보았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30절). 도래한 메시아의 구원을 볼 수 있는 시메온은 복이 있다. 루카 복음 10,23-24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고 말씀하셨다.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은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에게 준비된 것이다(31절.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 - 새 성경에는 ‘민족’으로, 200주년 성서는 ‘백성’으로, 공동번역 성서는 ‘만민’으로 표현하였다.). 루카는 백성(λαο?)이라는 단어를 이스라엘 사람에게만 사용하고(사도 4,25), 이방인에게는 민족(εθνο?)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사도 15,14; 18,10). 이것은 32절에서 명확히 나타난다. “다른 민족(εθνο?)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λαο?)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그러나 루카는 31절에서 예외로 민족이라는 단어 자리에 백성이라는 단어를 복수로 사용함으로써 하느님의 구원은 아기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백성(루카 1,17)들을 향한 것으로, 곧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 민족 모두를 포함한다 하겠다(이사 52,10; 에제 29,27). 시메온은 하느님께서 메시아의 빛을 이방인들에게 비추어 당신을 알게 하며 그들을 어둠에서 구원의 빛으로 이끄심을 알게 되었다(이사 49,6; 42,6).

 

이방인들을 위한 계시의 빛이신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영광이다(이사 46,13). 시메온은 자신만의 구원을 바라지 않고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지만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울타리를 넘어 모든 백성에게 구원을 주신다. 예수님은 구약이 준비하고 약속된 도달점이며, 구원의 역사 안에서 중심이시며, 하느님의 한 백성으로 형성된 모든 민족에게 확장된 구원의 출발점이시다.

 

 

새김 - 이 복음말씀을 읽으면서 시메온이 많이도 부러웠다.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는 그의 올곧은 삶과 하느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는 나를 부끄럽게 했다. 그러나 특히 더 부러웠던 것은 그의 삶의 여정에 성령께서 함께하셨다는 것이다. 성령은 그의 삶을 이끌어오셨고, 그의 삶 마지막에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를 뵙는 은총까지 주셨다.

 

하느님의 현존이 계시는 성전에서 성령께 이끌리어 한 아기로 오신 구세주를 뵙는다는 것! 오랜 시간 기다리고 열망하여 온 분이기에 결코 낯설지도 충격적이지도 않게 당신을 드러내신 구세주! 커다란 감격과 찬미로 응답하는 시메온!

 

하느님의 은총은 무상으로 우리에게도 주어진다. 그러나 누구나 시메온처럼 성령의 은총 안에 머물러있는 것은 아니다. 그 열쇠는 은총을 받아들일 빈 그릇이라 여겨진다. 시메온은 그리스도를 뵙고자 끊임없이 자신을 비우고 깨어 준비하였기에 그 희망을 보았다. 내가 나 자신을 비우지 못할 때 그분은 내 안에 머물고 싶어도 내 삶 안에 역사하실 수가 없다.

 

나 자신을 성찰해 본다. 빈 그릇을 준비한다면서 손 가득히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것을 움켜잡고 있지는 않은지! 차고 넘치게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깨닫지 못하고 자판기에 동전을 넣고 내가 넣은 것만 고집하지 않는지! 성탄시기를 보내면서도 이미 우리에게 와계신 분을 두고 다른 것을 찾고 있지 않는지!

 

우리의 하느님은 아마도 어린 시절 달리기를 할 때 출발선에 서서 ‘준비, 땅!’ 하는 소리에 뛰어가듯이 당신 은총을 준비하고 계시다가 빈 그릇을 내밀 때 얼른 달려오시는 분이 아닌가 싶다.

 

기도 - 시메온 위에 머물러 계셨고 그의 삶을 이끄신 성령이시여, 제 삶을 당신께 의탁하오니 순간순간마다 당신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깨달으며 의롭게 살 수 있는 은총을 내려주소서.

 

* 박미숙 레지나 - 성모영보수녀회 수녀. 교황청립 성서대학에서 성서학을, 글라렛티아눔에서 수도신학을 공부했다.

 

[경향잡지, 2011년 1월호, 박미숙 레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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