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위대한 선교사 사도 바오로21: 결박된 바오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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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1-07-08 | 조회수2,969 | 추천수1 | |
[동녘에서 서녘까지 위대한 선교사 사도 바오로] (21) 결박된 바오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체포돼 로마로 끌려가다
- 작가노트 : 무시무시한 폭풍과 난파 속에서 카이사리아에서 로마로 가는 여정은 얼마나 힘든 항해였을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난파한 배가 몰타 섬에 도착했을 때는 독사가 바오로 사도의 손을 무는 사건이 일어나지만 사도는 아무런 해도 입지 않는다. 뱀에게 물려도 아무 해를 입지 않는 바오로 사도, 난파 속에서도 주님께 의지하며 로마로 향하는 바오로와 협력자들, 로마 군사들과 죄수들이 탄 배를 그렸다.
주후 58년 오순절, 바오로 사도는 세 번째 선교여행을 완수하고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도와 협력자들을 큰 기쁨으로 맞았다.
다음날 바오로는 자신의 협력자들과 함께 예루살렘 주교 야고보 사도와 사제들이 있는 교회를 찾아가 헌금을 기탁했다. 바오로와 협력자들이 모금 조직을 통해 자신들 교회에서 모은 성금이었다.
야고보 사도에게 헌금 기탁
전엔 우상숭배자였던 아시아와 유럽 교회 신자들은 대부분 유다인들로 이뤄진 모(母)교회에 감사하는 마음과 함께 사랑의 연대를 표명하며 경제적으로 곤경에 처한 예루살렘 신자들과 고통을 함께 나눴다. 이어 바오로가 만방에서 이뤄진 선교 사업을 통해 주님께서 이방인들 가운데서 행한 모든 것을 설명하자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을 찬양했다.
예루살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일부는 유다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예전 유다교인들이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바오로가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준 율법을 무시한다고 들었고 또 실제로 그렇게 믿고 있었다.
이러한 의혹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사제들은 바오로에게 오순절을 기해 유다 그리스도인들 중 네 명을 데리고 성전에 올라가 정결 예식을 실행하도록 충고했다. 그러면 모두가 전에 예수와 사도들이 다닌 성전을 존중하는 바오로를 공공연히 다시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바오로는 항상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유익하게 할 것인가를 자신의 목표로 삼았기에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유다인들을 얻으려고 유다인들에게는 유다인처럼 되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1코린 9,20-22).
바오로는 자신을 중상하는 형제들을 진정시키고자 그 제안을 받아들여 성전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여기에서 하가보스의 예언대로 이뤄졌다. 에페소에서 예루살렘으로 명절을 지내기 위해 돌아왔던 히브리 광신자들이 바오로를 알아보고 대중을 선동하며 그에게 대적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 사도를 죽이려고 때리기 시작했다. 이에 예루살렘 치안을 맡고 있던 로마 군대 천인대장이 자신의 휘하 백인대장과 군사들을 데리고 와서 바오로를 유다인들에게서 빼내 진지 감옥에 가뒀다.
사도행전 21장 34절에서 26장 마지막 절까지 루카는 바오로가 처음 예루살렘과 카이사리아에서 2년 동안 구금당한 것에 관해서, 바오로의 생애 동안 벌어진 유다인들 음모에 관해서, 유다인 수석사제들과 원로들, 온 의회 앞에서, 그리고 로마 총독 펠릭스 앞에서 바오로가 했던 변론에 대해서, 그 후임인 포르키우스 페스투스 총독과 헤로데 아그리파스 왕에게 했던 바오로의 마지막 변론에 대해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헤로데 아그리파스 2세(이전에 같은 이름의 다른 왕이 있었기에 아그리파스 2세로 부른다)는 팔레스티나 북부의 왕이었다. 그의 부친은 제베대오의 아들이자 요한의 형인 야고보 사도를 참수했고, 바오로 사도를 예루살렘에서 투옥시킨 헤로데 아그리파스 왕이다. 그의 증조부는 예수가 탄생했을 때 베들레헴에서 탄생한 아기들을 모두 죽였다.
로마 시민으로 황제에게 상소
그러한 가문 출신에게서 바오로는 정의로운 재판을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페스투스 총독이 유다인들의 환심을 사고자(사도 25,9 참조) 예루살렘에서 그를 재판하도록 유다 의회에 바오로를 넘겨주려는 것을 알아차렸다. 바오로는 이럴 경우 유다 의회에서 사형선고를 받을 것이 분명함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로마 시민으로서 권리를 이용해 자신을 로마 황제 법정으로 상소해주기를 요청했다. 그는 페스투스 총독에게 말했다. "나는 유다인들에게 아무 불의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만일 내가 불의를 저질렀거나 사형을 받아 마땅한 짓을 하였다면, 죽기를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나를 고발하는 내용에 아무 근거가 없으면, 아무도 나를 저들에게 내어 줄 수 없습니다. 나는 황제에게 상소합니다. 그러자 페스투스는 고문들과 상의하고 나서 '당신은 황제께 상소하였으니 황제께 갈 것이오'하고 대답하였다"(사도 25,10-12).
로마법에 따르면 로마 시민이 황제에게 상소하면 어떠한 법정도 그를 재판한 뒤 유죄를 선고하거나 무죄로 석방하는 것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없다. 그래서 아그리파스 왕은 자신이 무죄임을 증명한 바오로의 명쾌한 변론을 경청하고 나서 페스투스 총독에게 말했다. "저 사람이 황제께 상소하지 않았다면 풀려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사도 26,32). 왕의 이러한 의견에 따라 페스투스 총독은 네로에 의해 확실히 무죄로 판결이 내려지게 될 고발장을 작성했다.
사도행전 27장은 폭풍과 난파 속에서 카이사리아에서 로마로 가는 바오로의 이송 경유지를 기술했을 뿐 아니라 고대인들의 항해에 관해 저술한 매우 귀중한 가치를 지닌 정보 기록서로도 유명하다.
주후 60년 9월 어느 날 아침, 카이사리아 부두에는 로마 병사들의 투구와 창이 보였다. 이들은 로마 대극장에서 서로 죽일 때까지 잔인한 결투를 벌이게 될 팔레스티나 죄수들을 호송키로 했고, 그 배에 바오로도 함께 태워 로마로 호송하기로 했다. 그들을 호송할 황제 친위 부대장은 율리우스라는 사람으로 처음부터 바오로가 로마로 재판을 받기 위해 끌려가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사도를 존중해줬다. 그래서 바오로의 친구와 제자들이 작별인사를 하러 왔을 때, 율리우스는 그들 중 루카와 티모테오, 아리스타르코스 등 세 사람에게만 바오로를 수행하도록 허용했다.
바오로는 무엇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이 멀고 먼 해상여행이 얼마나 힘든 고난을 뜻하는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더욱이 이번 여행은 영어(囹圄)의 몸이 돼 항해하는 여정이었다.
폭풍과 난파 겪으며 로마 도착
그러나 바오로는 불행 속에서도 고난 받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었고, 그들을 정신적으로 도와줄 수 있었으므로 위안을 받았다. 그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로 향한 길을 찾게 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바오로는 일행에게 닥친 무시무시한 폭풍 속에서 사랑으로 용기를 북돋아주었으며, 몰타(Malta) 섬에 배가 정박했을 때는 그들에게 구원을 베풀었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신으로 여겼다. 어떻게 달리 설명할 수 있을까?
섬에서 독사가 손을 물었을 때 바오로는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고, 후에 그들을 초대해 대접해준 이 섬의 수령인 푸블리우스의 아버지가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워있는 것을 보고 그를 위해 기도하고 안수해 고쳐줬다.(사도 28,3-6 참조)
많은 고난을 겪은 후 마침내 일행은 로마에 도착했다. "형제들이 로마에서 우리 소문을 듣고 아피우스 광장과 트레스 타베르내까지 우리를 맞으러 왔다"(사도 28,15). 바오로는 그들을 보자 감격스러워하며 이 감동적 만남에 대해 주님께 감사를 드리고 용기를 얻었다.
백인대장 율리우스는 로마에 도착하자 죄수들을 병영으로 넘겼다. 하지만 바오로에게는 그를 지키는 군사 한 사람과 함께 따로 개인 집에 머물러도 좋다고 허락했다.
[평화신문, 2011년 7월 3일, 글 소티리오스 트람바스 대주교, 그림 정미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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