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요한 복음: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습니까? | |||
---|---|---|---|---|
이전글 | [성경] 성경과 도덕 해설: 우리는 주님의 것 |1| | |||
다음글 | [지리]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3: 나자렛 |1| | |||
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2-03-23 | 조회수4,302 | 추천수1 | |
[요한 복음 안에서 예수님의 친구 되기]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습니까? 니코데모 이야기를 읽으면 두 가지 측면에서 흐뭇한 미소와 감사의 마음 이 든다. 하나는 니코데모가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엉뚱한 질문을 했지만 나중에 예수님의 참된 제자요 친구가 되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이 얼마나 그에게 하늘의 선물을 알게 하고 그것을 주려고 하시는지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니코데모가 예수님을 방문하다 바리사이인 니코데모는 최고의회 의원이며 존경받는 종교지도자 랍비다. 그런데 그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다. 아마 주위 동료들을 의식해서거나 아직 영적 어두움 속에 거닐고 있음을 표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니코데모는 예수님을 스승이라고 부르며 예수님이 행한 표징들이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고백한다. 그는 표징을 보고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참된 친구로 만들려고 더 근본적인 말씀을 하신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그리스 말 ‘아노텐’은 ‘위로부터’와 ‘다시’라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는 아노텐의 이중 의미 가운데 하나만 생각하고, 이미 늙은 사람이 어떻게 어머니 배 속으로 돌아가 다시 태어날 수 있는지 반문한다. 이에 예수님은 다른 말로 설명하신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과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이 같은 뜻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설명하려고 예수님은 바람의 비유를 사용하신다. 사실 그리스 말 ‘프네우마’는 ‘바람’과 ‘영’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성령은 바람처럼 자유롭고, 어디든지 갈 수 있으며, 변화시키는 힘을 갖고 있다. 창문을 꼭 닫고 바람을 막으면 시원한 바람을 만날 수 없는 것처럼 성령께도 마음을 굳게 닫고 있으면 성령의 은총을 받을 수 없다. 그래도 그는 이해하지 못하고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 의아해한다. 예수님은 “너는 이스라엘의 스승이면서 그런 것도 모르느냐?”고 질책하신다.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다 “물과 성령으로 태어난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물과 성령이 분리되어 물로도 태어나고 성령으로도 태어나는 두 종류의 탄생이 아니다. 그리스 말을 보면 “물과 성령”이 함께 작용한 하나의 탄생, 곧 성령으로부터의 탄생을 의미한다. 예언자들도 메시아 시대에 위로부터 ‘성령’이 부어질 것이라고 예언했고(이사 32,15; 요엘 2,28-29),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을 새롭게 하려고 그들의 마음을 씻어줄 ‘물’로써 묘사되었다(이사 44,3; 에제 36,25-26). 그러한 사실은 성서학자이며 스승인 니코데모가 이해했어야 하는 것이다. 세례성사에서도 물은 보이지 않는 성령의 역할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은 들어 올려져야 하고, 그를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하느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은 같은 의미인가? 그렇다. 둘 다 구원을 뜻하는 용어다. 그런데 요한 복음에서 신기하게도 “하느님 나라”라는 용어는 니코데모 이야기에서 두 번 나오고(3,3.5), 그 뒤 “(영원한) 생명”으로 바뀌어 표현된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 자신이나 하느님의 통치를 뜻하지만, 장차 언젠가 들어가는 나라로 생각된다. 반면에 “생명”은 지금 이 순간에도 영생을 산다는 의미가 강조된다. 그래서 요한 복음은 예수님을 믿어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이라고 하면서, 예수님 때문에 유다 회당에서 쫓겨나더라도 이미 생명을 얻었기에 견뎌낼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요한 복음에서 강조하는 영원한 생명이란 하느님과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깊이 알고 일치하여 살아가는 것이다. 복음서에 여러 표현들이 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1,4).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주셨기 때문이다”(5,2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6,54).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17,3). 니코데모는 위로부터 다시 태어났는가?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엉뚱한 질문만 하다가 니코데모는 무대에서 서서히 사라졌다. 그래서 3장만 읽으면 니코데모에게 걸었던 기대가 무너지고, 그가 정말 위로부터 새로 태어났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7장과 19장을 읽어보면 그가 위로부터 다시 태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니코데모는 7장에서, 유다인들 사이의 분쟁에서 예수님을 율법대로 처리할 것을 요구하다가 동료들에게 거절을 당한다. 예수님을 변호해 주고 싶었지만 아직 큰 용기가 부족했다. 그 뒤 그는 예수님의 장례식에 값비싼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32kg이나 가져와 공개적으로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를 바름으로써 애도를 표현한다. 이는 예수님의 참된 제자요 친구가 되었음을 고백하는 것과 같다. 이런 행위에는 대단한 용기와 믿음이 필요하다. 그의 행동이 최고의회에 알려질 경우 의원직을 박탈당할 수도 있고, 또는 시신에 손을 대어 부정을 타면 축제예식에도 참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니코데모가 마지막에 예수님의 제자요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들일 것이다.”(12,32) 하신 예수님의 말씀 덕분이다. 그리고 니코데모가 예수님을 처음 만난 뒤 빛으로 나아가려고 부단히 노력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니코데모 이야기를 여러 번 읽고 묵상하다가 그의 일생은 예수님이 하신 다음 말씀에 그대로 녹아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구절은 처음에는 숨어있는 그리스도인이었지만 나중에는 대낮에 공개적으로 예수님의 장례를 치름으로써 예수님 말씀을 증언하는 그의 삶의 모습임을 깨닫게 되었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3,20-21). 필자에게도 어둠의 순간이 있었고, 빛줄기를 볼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이 구절에서 힘을 얻곤 하였다. 예수님의 친구 되기 니코데모를 친구로 만들려고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는가? 예수님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한다고 하신다(3,11). 하늘에서 듣고 본 것을 계시하시는 것이다. 친구가 되려면 먼저 말을 건네야 하듯이 예수님도 니코데모에게 말씀을 건네고 소통하신다. 예수님은 영적 탄생과 성령이라는 하늘의 선물을 갖고 인간들을 친구로 만들려고 하늘에서 내려오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니코데모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그분의 말씀은 성령을 한량없이 받은 하느님 말씀이기 때문이다(3,34). 그 뒤 예수님은 하늘의 일을 말씀하신다. 곧 사람의 아들은 들어 올려져야 하고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아버지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아들 손에 내주셨으며,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하셨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느님으로부터 오신 분이고 종말론적인 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친구가 되려면 예수님이 행하는 표징만 보고 감탄하고 놀라워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분임을 명확히 알고, 그분의 숨결, 영의 움직임을 깨달아야 한다. 하느님의 영은 인간을 변화시키신다. 우리가 해야 할 몫은 마음을 열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믿는 것이다.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파악하기 힘들듯이 하느님의 영과 우리가 연결되어 있는지 알기 위해 우리는 늘 깨어있어야 한다. 우리는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가? 개신교 신자들은 “그렇다.” 하고 대답하지만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글쎄요?”가 대부분이다. 필자도 그랬다. 그러나 요한 복음을 통해 이미 우리 안에는 하느님의 생명의 싹이 자라고 있음을 믿게 되었다. 요한의 첫째 편지의 저자도 “내가 여러분에게, 곧 하느님의 아드님의 이름을 믿는 이들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1요한 5,13)이라고 썼다. 기도 니코데모에게 성령의 선물을 주시어 당신의 제자와 친구가 되게 하신 주님, 저희에게도 정결한 물을 뿌려 새 마음과 새 영을 넣어주십시오. 저희의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주소서(에제 36,26 참조). 그리하여 아버지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 * 이혜자 인덕마리아 -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수녀. 교황청립 성서대학에서 석사학위, 로마 그레고리오대학에서 성서신학 박사학위(요한 복음 전공)를 받았으며, 현재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출강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2년 3월호, 글 이혜자 · 그림 조수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