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경] 성경과 도덕 해설: 십계명은 무엇을 위하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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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2-06-04 | 조회수4,825 | 추천수1 | |
[성경과 도덕 해설] 십계명은 무엇을 위하여? 초등학교 어린이들이 첫영성체 찰고를 할 때에도 십계명은 외웁니다. 그걸 보면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십계명이 중요하기는 중요한 모양입니다.
하지만 실제 우리 삶과 십계명은 거리가 멀게도 느껴집니다. 고해성사를 준비하려고 양심성찰을 할 때에도, 십계명을 살피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나는 그렇게 중요한 계명을 깨뜨릴 정도로 큰 죄는 짓지 않았다고 전제하고 시작하지요. 뺑소니 사고를 내면 벌금이 얼마라는 걸 제가 외워야 할까요? 죽을 때까지 한 번도 어기지 않을 계명들이라면 무엇 하러 그렇게 어렸을 때부터 배워야 하는 걸까요? 아니면 혹시, 우리가 십계명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십계명의 한계와 매력 십계명은 구약성경의 법전 안에서도 중요한 위치들에 놓여있어서, 헌법과 같이 중요한 기본 규정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십계명에 별로 관심이 가지 않는다는 것이 그저 미지근한 신자의 게으름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도 나름 근거를 제시할 수 있습니다. 가장 크게 눈에 띄는 것은, 십계명이 주로 무엇을 하지 말라는 금령들로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가끔 지하철에서 짜증이 납니다. 에스컬레이터에서는 뛰지 말라 하고, 승강장에서는 무리하게 승차하지 말라 하고, 열차에 오르면 신문을 두고 내리지 말라 합니다. 지하철 한두 번 타는 것도 아닌데 아침부터 잔소리하는 것 같습니다. 십계명도 그렇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더구나 이러한 금령들은 대개 외적인 행위들을 규제할 따름입니다. 자질구레한 금령들이 많은 곳일수록, 마음의 지향 같은 것은 무시되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십계명은 이유 없는 잔소리가 아니라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계약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전에 보았던 것처럼 그 계약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심으로써 베풀어주신 자유와 구원을 보존하려고 주어진 선물이었습니다. 십계명의 첫 구절은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낸 주 너의 하느님이다.”(탈출 20,2)이지요. 그런 해방의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들은 인간을 옭아매기 위한 것일 수 없습니다. 그럼 이 계명들이 우리에게 가르치려고 하는 것일까요? 십계명의 새로운 번역 십계명이 오늘 우리에게도 살아있고 의미 있는 것이 되게 하려면, 단순히 고대 히브리어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계명 하나하나가 어떤 가치를 지켜내고자 하는 것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부분은 하나씩 살펴보아야 할 것들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처음의 세 계명은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다룹니다. 이 계명들은 금령으로 되어있지 않고 긍정적인 명령으로 되어있어서 이들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째 계명은 한 분이신 절대자를 경배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신명기에서 말하는 것처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는”(신명 6,5) 데에까지 이르러야 하는 것이기에, 어디까지 지켜야 한다고 한계를 그을 수 없는 무한한 가치입니다. 또한 이것은 의무만이 아니라 신앙의 자유나 권리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다음으로 하느님의 “이름”에 관한 둘째 계명은,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그분의 사명을 존중할 것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드러내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며 하느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안식일에 관한 셋째 계명은 시간의 거룩한 차원을 존중할 것을 요구합니다. 시간을 몽땅 세속적인 가치들을 추구하는 데에 써버리지 않는 것, 하느님의 영역을 인정하는 것이 이 계명에 속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주일을 지키도록 하는 것은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중요한 권리이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을 위한 시간과 자유를 가질 수 있는 것, 그리고 노동을 멈추고 휴식과 여가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요구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일곱 가지 계명은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추구해야 할 가치들을 말해줍니다.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은 가정에 대한 존중을 말합니다. 어린 자녀들은 부모의 보호를 받고 노부모들은 자녀들의 존경과 지원을 받는 것, 이것은 개인과 사회의 안정된 삶을 위하여 필요합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것은 생명의 가치를 한없이 존중해야 함을 말해줍니다. 모든 생명은 태어날 권리를 가져야 하고 또 존중을 받아야 합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길러준다는 것은 분명 우리도 날마다 노력해야 할 부분입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것은 부부의 결속을 보호해야 한다는 뜻이어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과 함께 현대사회에서 무너져가고 있는 가정의 중요성을 말해줍니다. 또한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는 것은 다른 사람의 명예를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마지막 두 계명은 어떤 가정이나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을 존중하고 다른 사람의 것을 그대로 그에게 보존해 주라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어느새 약간 지루해졌지요. 한마디로 말하면 이 계명들은 우리가 추구하고 보호해야 할 가치들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그 우선순위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제는 양심성찰이 달라집니다. 적극적인 태도로, 과연 나는 얼마나 이러한 가치들을 추구하며 살았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가치들의 우선순위 또 한 가지 중요하게 부각되는 것이 가치들의 우선순위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각각 무엇인가를 최고 가치로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저는 이것이, 사람들이 각자 기다란 자를 하나씩 땅 위에 세우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한 방향으로 막대자를 세워놓고 - 그 방향은 서로서로 다릅니다. - 조금씩 위로 올라가려고 노력합니다. 누구나 가치를 추구한다는 것은 똑같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삶이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무엇을 그 잣대로 삼느냐, 곧 무엇을 추구해야 할 가치로 여기느냐에 달려있을 것입니다. 안식일 문제를 예로 들어봅시다. 하루를 더 일해서 돈을 벌 것이냐, 아니면 하느님께 하루를 드릴 것이냐 하는 선택은 가치 척도에 따라 달라집니다. 물론 이 말을 절대화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주일에 일을 하는 사람들도 사실 많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가치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의 불가피한 필요의 문제이고, 달리 말하면 바로 안식일 계명이 수호하고자 하는 그 가치를 존중하지 않는 사회의 문제입니다. 그런 경우를 제외하면, 모든 선택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가치를 우선하는지를 드러냅니다. 여기에서 세속적인 가치 척도는 하느님보다 인간을, 때로는 인간보다 경제를 앞세우기도 하지만(그래서 다른 사람을 주일에도 일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십계명은 인간을 하느님 아닌 다른 어떤 가치에 예속시키지 않는 해방의 도덕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양도할 수 없는 인권은 오직 하느님의 주권에 종속되는데, 그것은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이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것은 그의 생명이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이 수호하고자 하는 다른 모든 가치들 역시, 우리가 그것을 존중하는 것은 하느님의 주권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국가가 멸망하면 법률도 효력이 정지되겠지요. 우리는 하느님의 다스리심을 인정하기에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완성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십계명이 추구하고자 했던 가치들을 완전하게 드러내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특히 마태오 복음 5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인간의 속마음까지 온전히 계명에 일치되기를 요구하시며 하느님의 완전하심에 이르기를 추구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완전하심. 이것이 십계명이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추구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겉으로 어떤 행동을 하거나 하지 않는 것, 특별한 대죄를 짓지 않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의 가치 기준을 내 삶의 잣대로 삼아 하느님의 완전하심을 닮아가는 것이 십계명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것”으로서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삶의 길이고, 그것은 커다란 악을 피하라는 최소한의 요구가 아니라 하느님의 완전하심에까지 이르러야 하는, 어쩌면 드높은 별과 같은 이상입니다. * 안소근 실비아 - 성도미니코선교수녀회 수녀. 교황청립 성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가톨릭대학교와 한국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성서 히브리어를 가르치고 있다. 주교회의 천주교용어위원회 총무이다. [경향잡지, 2012년 5월호, 안소근 실비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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