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인물] 성경 속의 인물: 사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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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2-10-03 | 조회수3,136 | 추천수1 | |
[성경 속의 인물] 사울 (1) 사울은 이스라엘의 첫 임금이다. 그에 대한 기록은 사무엘기 상권 9장에 처음 나온다. “벤야민 지파에 속한 ‘키스의 아들 사울’은 잘생긴 젊은이였다.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 그처럼 잘생긴 사람은 없었고 키도 모든 사람보다 어깨 위만큼은 더 컸다”(1사무 9,1-2) 분명 그는 꽃미남이었다. 게다가 보통 사람보다 큰 체격을 소유하고 있었다. 고대사회에서 그런 신체조건이면 대부분 군인의 길을 걸었다. 훗날의 사울 역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지만 일생을 ‘필리스티아(블레셋족)’사람들과 전쟁을 하면서 보내야했다. 사울이 성경에 등장하는 이야기는 두 가지다. 이것은 서로 다른 전승(傳承)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다시 말해 두 가지 사료(史料)가 전해져왔다는 것이다. 첫 번째는 제비뽑기를 통해 등장하는 사울이다. 두 번째는 아버지의 명을 따라 암나귀를 찾으러 다니다 예언자 사무엘을 만나 ‘기름부음’을 받는다는 내용이다. 제비뽑기로 왕이 되었다는 전승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잘 반영한다. 판관시대부터 이스라엘은 ‘12지파 연합체’로서 존속해오고 있었다. 이민족의 잦은 침입에 그들은 지파별로 힘을 합쳐 대항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군사력을 좌지우지 하는 왕의 선택은 모든 지파가 참여하는 조건이어야 했다. 제비뽑기 외에는 대안이 없었던 것이다. 사울이 왕으로 선택되는 ‘역사적인 사건’을 주관한 사람은 물론 사무엘이다. 그런데 사울은 전혀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인물에서 발탁된다. 당연히 불평이 많았다. “이 친구가 어떻게 우리를 구할 수 있으랴?”(1사무 10,27) 하면서 노골적으로 반발했다. 하지만 사울은 묵묵히 받아들인다. 능력을 드러낼 기회를 기다린 것이다. 마침내 실력을 입증할 기회가 왔다. ‘야베스 길앗’에 살고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암몬족에 포위되어 항복할 처지가 되었다. 소식을 접한 사울은 즉시 군대를 소집하여 암몬군을 무찌른다. 하느님의 영이 그와 함께 있었던 것이다. 야베스 사람들은 감격했다. “사울 따위가 우리 임금이 될 수 있겠느냐? 하던 자들이 누굽니까? 그런 자들을 죽여 버리겠으니 우리에게 내주십시오.”(1사무 11,12) 분위기는 완전히 사울에게로 기울어졌다. 사무엘은 백성들과 함께 ‘길갈’에 모여 주님께 제물을 바치며 사울을 임금으로 공식 선언한다. 사울은 히브리말 ‘솨울’에서 왔다. ‘묻다, 질문하다’라는 동사의 과거형이다. 희랍어로 옮기면 ‘바울로스(바오로)’가 된다. ‘사도 바오로’의 원래 이름도 사울이었다. 그런데 그는 로마 시민권을 갖고 있었기에 로마식 이름도 함께 사용하였다. 그것이 바오로(바울)이었다. [2008년 12월 14일 대림 제3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삼천포본당 주임신부)] [성경 속의 인물] 사울 (2) 사울은 평생 전쟁을 치렀던 인물이다. 판관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역할은 군사적 방어에 있었다. 당시 군인들은 지파별로 뽑았고 모두가 지원병이었다. 사울은 이들을 규합해 ‘필리스티아(블레셋족)’ 사람들과 싸웠고 결국은 ‘중앙 고원 지대’에서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사울의 왕위는 오래가지 못한다. 사무엘은 다윗을 몰래 선택하고 그에게 기름을 부었다. 두 번째 임금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사무엘기 상권’에는 두 가지 전승(傳承)이 섞여있다. 첫 번째는 전쟁터에서 사울이 제사장처럼 제사를 드린 일이다. 그 일은 사무엘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군사들의 사기가 떨어지자 사울은 스스로 번제물을 바치며 군인들을 격려한 것이다.(1사무 13,9) 사무엘은 화를 내며 사울의 왕위를 위협했다. 두 번째는 사울이 ‘전투의 원칙’을 지키지 않은 일이다. ‘아말렉’과의 싸움에서 그들을 섬멸한 뒤 모든 소유물을 없애라는 예언을 듣는다. 물론 이 예언은 사무엘이 전해준 것이다. 그런데 사울과 그의 군사들은 튼튼한 소와 건강한 양들은 아까운 생각에 없애버리지 않았던 것이다.(1사무 15,9) 이 일이 있은 뒤 사울과 사무엘은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된다. 하지만 사울에겐 여전히 사무엘의 도움이 필요했다. 지파들의 지지를 위해선 그의 중재가 절실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무엘은 종교적 재가를 철회하며 사울의 후퇴를 압박하다 숨을 거둔다. 어수선한 시국을 틈타 필리스티아인들이 다시 이스라엘을 공격해왔다. 상황은 어려웠다. 내분으로 군사력은 약화되어 있었고 결정타를 가할 군대도 없었다. 하지만 쇄도해 오는 적을 방치할 수는 없었다. 사울은 ‘길보아 산’ 위로 군대를 집결시키고 직접 전투에 나섰다. 사무엘기 상권은 사울의 최후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사울이 무기병(부관)에게 명령하였다. “칼을 뽑아 나를 찔러라. 그러지 않으면 할례 받지 않은 저자들이 나를 찌르고 희롱할 것이다.” 그러나 무기병은 두려워서 찌르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사울은 자기 칼을 세우고 그 위에 엎어졌다. 무기병도 그렇게 죽었다.(1사무 31,4) 사울은 다윗과의 관계에서 옹졸한 사람으로 표현되고 있다. 정신착란증을 의심케 한다. 하지만 그는 군사적 영웅이었다. 숱한 전투에서 엄청난 역량을 드러냈고 부하들을 격려하는 탁월한 능력도 지니고 있었다. 필리스티아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지만 필리스티아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정복하는 것을 끈질기게 막아냈다. 그를 끝까지 추종했던 ‘야베스 길앗’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사울의 주검을 수습한다. 필리스티아인들의 ‘벳 산’ 요새 성벽에 달려 있던 사울과 세 아들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지낸 것이다. 그리고는 이레 동안 단식했다. 사울과의 의리를 지킨 것이다. [2008년 12월 21일 대림 제4주일, 12월 25일 예수 성탄 대축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삼천포본당 주임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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