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사도들의 서간: 로마서 (1) 하느님의 의로움과 믿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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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3-07-01 | 조회수4,171 | 추천수1 | |
[사도들의 서간] 하느님의 의로움과 믿음 - 로마서 (1) 로마서는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에서 가장 많이 읽고 연구해 온 책입니다. 이 책은 바오로 사상을 가장 체계적으로 잘 정리하고 있기 때문에, 바오로 신학의 결정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호와 다음 호, 두 번에 걸쳐 로마서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주제제안과 논증 바오로는 다양한 수사학적 기교를 사용해 자신의 생각을 설명하고 논증합니다. 특히 로마서에서는 주제제안(propositio)과 논증(probatio)이라는 방식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체계적으로 전개합니다. 곧, 자신이 다룰 주제가 무엇인지 미리 알려주고(주제제안), 구약성경 구절을 근거로 들거나, 아니면 철학적 논증 방식을 통해 해당 주제를 논증해 나갑니다. 로마서의 경우는 주제제안 단락만 뽑아보아도, 바오로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실제 바오로는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편지 전체의 주제를 미리 제시하고 있는데(1,16-17), 그 주제는 바로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모두 율법이 아니라, 하느님의 의로움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리스인’은 ‘유다인이 아닌 모든 사람들’을 말하는데, 따지고 보면 우리 역시 그리스인 가운데 한 부류입니다. 로마서는 편지 서두에 제시된 하느님의 의로움과 믿음이라는 대주제를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다루고 있습니다. 먼저, 1-4장에서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모두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점을 논증하고 있고, 5-8장에서는 세례를 통하여 율법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희망을 얻게 된 그리스도인들에 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9-11장에서는 모든 민족들과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에 관해 다루고 있습니다. 12장 이후의 내용들은 그리스도인의 삶과 관련된 다양한 교훈들입니다. 이번 호에서는 1장에서 4장까지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인간의 불의와 하느님의 진노 유다인들은 불의로 진리를 억누르는 이방인들에게 하느님의 진노가 떨어지리라 기대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방인들이 하느님의 법규를 알 수 있었음에도 그 법규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오로도 이 점을 인정합니다(로마 1,18-32). 하지만 바오로는 유다인 역시 하느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유다인 역시 율법을 안다고 말하지만, 이방인처럼 그 율법을 어기기 때문입니다(2,1-29). 그렇다면 유다인들에게는 왜 할례와 율법이 주어진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의 죄와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3,1-8). 곧,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모두 하느님 앞에서 죄인임이 드러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죄인임이 드러난 우리는 그 누구도 하느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습니다(1,18; 1,18-3,20의 주제를 알려주는 구절).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느님 편에서의 구원뿐입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날 것입니다. 하느님의 의로움 바오로는 율법과 상관없이 하느님의 의로움이 나타났다고 전합니다(3,21-22; 3,21-4,25의 주제를 알려주는 구절). 그러면 바오로가 생각하는 하느님의 의로움은 무엇이겠습니까? 창세 15장을 보면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땅과 자손을 약속한 뒤 그와 계약을 맺으십니다. 하느님과 계약을 맺으려고 아브라함이 짐승들을 반으로 쪼개놓자, 연기 뿜는 화덕과 타오르는 횃불이 쪼개놓은 짐승들 사이로 지나갑니다(15,17). 이 장면은 마치 고대 임금들 간의 계약 장면 같습니다. 당시 임금들은 서로 계약을 맺으면서, 계약을 어기는 자가 쪼개놓은 짐승들처럼 될 것이라고 선언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과 아브라함의 계약에서 흥미로운 점 한 가지는 그 짐승들 사이로 지나간 것이 오직 하느님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은 그곳을 지나가지 않습니다. 이 말은 땅과 자손에 대한 약속을 지켜야 할 의무가 오직 하느님에게만 있다는 말입니다. 결국 하느님은 아무 조건 없이 땅과 자손을 약속하셨고, 또 그 약속을 지키겠다고 계약까지 맺은 것이 됩니다. 그래서일까요?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보시고 진노를 내리시려다가도, 당신 약속을 기억하시며 그들을 용서해 주십니다. 당신의 약속을 끝까지 지키시기 위함이지요. 계약을 지키는 이만이 참으로 정의로운 이라고 할 때, 하느님의 의로움은 결국 하느님의 자비와 직결됩니다. 착한 일하면 상을 주고, 나쁜 일 하면 벌을 주는 방식의 의로움이 아니라, 죄로 가득 찬 당신 백성을 용서해 주는 그런 의로움입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났다는 말은 바로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모두의 죄를 용서하셨음을 뜻합니다. 사실,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가 없다면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그분 약속의 자녀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화됨 바오로는 이 하느님의 의로움, 곧 그분의 용서와 자비를 믿어야만 의로워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음으로써, 은총을 받아 거저 의롭게 됩니다(3,21-31). 사실, 창세 15,6에서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전이었고, 또 율법이 이스라엘에 주어지기 전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창세 17장에 가서야 할례를 받고, 모세가 율법을 받은 것은 탈출기에 가서입니다. 바오로는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우리 역시 율법과 할례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의로움을 믿음으로써 의로워진다고 강조합니다(4,1-12). 하느님께 모든 것을 내어 맡김 요즘 우리 모습을 보면 너무 자신만만한 것 같습니다. 하느님이 없어도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프면 병원에 가면 되고, 힘들어서 스트레스가 쌓이면 여가생활을 하면 됩니다. 미래를 위해 보험이나 연금을 들면 되고, 이 모든 것을 이루기 위해 돈만 있으면 됩니다. 이런 우리 삶에 하느님이 들어설 자리는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로마서는 분명히 밝힙니다.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 결코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고 말입니다. 물론 우리의 노력이 아무 필요도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노력하지 않아도 하느님이 알아서 다 해주실 것이라는 말도 아닙니다. 다만 인간의 힘만으로 모든 것을 이루려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의로움을 믿고, 그분께 모든 것을 내어 맡기는 이들만이 참된 행복을 누릴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율법과 할례로 대변되는 사람의 능력만 믿는 이에게는 결국 하느님의 진노만 주어질 뿐입니다. (다음 호에 계속) * 염철호 사도 요한 - 부산교구 신부. 로마 교황청립 성서대학에서 성서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부산대학교에서 언어학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현재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신약성경을 가르치고 있으며, 역서로 「최고의 성지 안내자 신약성경」(바오로딸, 2012년)이 있다. [경향잡지, 2013년 6월호, 염철호 사도 요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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