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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물] 성경 속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 모세와 뽑힌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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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4-09-21 조회수2,557 추천수1

[성경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 모세와 뽑힌 이들



모세는 왜 주님 부르심을 뿌리칩니까?


그가 다섯 번에 이르기까지 주님 부르심에 응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첫째로, 모세 스스로 소명에 응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이집트 파라오 왕국의 대군에 맞설 수도 없었으며 또 그들 손아귀로부터 소수민족 이스라엘을 이끌어낼 용기가 도무지 없었던 것입니다. 큰 바위 앞에 놓인 자그만 조약돌처럼 그렇게 무력하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이렇게 모세는 자신에게 민족 해방자로서의 자격이 도무지 없다고 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언자 예레미야의 소명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예레미야는 앞이 깜깜했습니다. 예레미야는 다음과 같이 부르심을 거절합니다. “아, 주 하느님 저는 아이라서 말할 줄 모릅니다.”(예레 1,6) 그때 주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를 달래며 그에게 용기를 북돋워주십니다. “‘저는 아이입니다.’ 하지 마라. 너는 내가 보내면 누구에게나 가야하고 내가 명령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말해야 한다. 그들 앞에서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주리라.”(예레 1,7-8)


또 다른 거절 이유는 무엇입니까?


모세는 자신을 선택하여 파견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도대체 그분이 누구시기에 그를 뽑아 자신에게 엄청난 임무를 맡기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모세가 체험했던 하느님은 불타는 떨기, 뜨겁게 달아오르는 불 속에서도 검불 같은 떨기나무가 사그라지지 않고 신나게 타오르는 모습을 본 것이 전부였습니다(탈출 3,3-6). 그러니 모세가 아무리 믿음이 강하다 해도 이 야훼 하느님만 믿고 그분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었겠습니까? 모세는 망설이고 또 망설였습니다. ‘야훼 하느님이 나를 이끌고 정말로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킬 수 있을까? 강대국 이집트의 파라오 손에서 해방시킬 수 있단 말인가?’


떨기는 어떤 나무입니까?


떨기 또는 떨기나무는 엄격한 의미의 나무와는 구별됩니다. 관목(灌木)에 속하는 떨기나무는 우리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시덤불 정도로 생각하면 좋습니다. 떨기(나무)는 ‘한 떨기 백합화’ 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무더기로 핀 꽃들이나 풀 종류를 가리킬 때 이르는 식물이름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이제까지 ‘꺼지지 않고 불타는 떨기, 또는 사그라지지 않고 신나게 타오르는 가시덤불 속에 계신 하느님’ 안에서 별다른 강한 느낌을 가질 겨를이 없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보아도 불타는 떨기나무 속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야훼 하느님이 좀 놀랍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자신이 들어온 이집트 왕국의 태양신 ‘레’에 견주어 볼 때 약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또한 인류를 비롯하여 온갖 식물과 동물, 하늘과 땅과 바다를 지어냈다고 소문난 바빌론 제국의 신 ‘마르둑’에 비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부터 들었던 것입니다. 사정이 이쯤 되니 모세가, 위풍당당한 피라미드를 앞세운 파라오의 거대한 세력에 맞서기에 역부족임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느님 모습을 요약해주는 구절을 꼽으라면?


탈출기의 하느님은 다음 구절에서 명료하게 드러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 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하여, 그 땅에서 저 좋고 넓은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족과 히타이트족과 아모리족과 프리즈족과 히위족과 여부스족이 사는 곳으로 데리고 올라가려고 내려왔다.’”(탈출 3,7-8)


탈출기의 하느님은 어떤 신입니까?


탈출기 곧 성서가 계시해주는 야훼 하느님은 약자를 구해주는 분으로 계시됩니다. 그분은 파라오처럼 약자를 잡아다가 노예로 삼아 그들의 피땀을 바탕으로 거대한 피라미드를 건설하는 제2 바벨탑의 건설주가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연약하고 힘없는 약자의 신음소리를 무시한 채 자신의 부만 챙기는 가진 자의 주님이 아니었습니다. 뭇 백성을 짓누르는 가운데 자신의 막강한 권력을 휘둘러대는 군주의 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모세의 눈에 뜻밖의 신이었습니다. 이집트 파라오처럼 뭇 민족들 눈에, 겉보기에 화려하고 장엄한 피라미드를 배경으로 하는 막강한 신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모세가 망설였던 것입니다. 그는 내심 겉으로 화려하고 막강한 화력을 지닌 신을 좇았던 것입니다. 탈출기가 보여주는 야훼 하느님은 고통 받는 백성을 보살피시며 연약한 인간을 돌보시는 신입니다. 힘과 권력을 바탕으로 삼는 강자의 신이 아니라, 오히려 불의 속에서 신음하는 이들을 돌보시는 자비의 하느님으로 계시됩니다.


모세가 언제 부르심에 응답합니까?


소명에 사실상 다섯 번이나 거절한 모세가 주님 부르심에 따르겠다고 명확히 답한 경우는 적어도 탈출기 안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어쩌면 주님 부르심에 대한 모세의 직접적이고 명시적인 응답이 없다는 것이 탈출기의 특성이기도 합니다. 그분 부르심에 선뜩 응답하기 힘든, 아니 소명에 응할 수 없는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대답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준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탈출기의 하느님은?


그분은 고통 받는 이들 한 가운데에서 그들과 함께 머물며 그들의 대변자요 피난처가 되어주십니다. 탈출기의 하느님은 고통과 시달림 속에서 그분께 울부짖는 이들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이요 그러한 고통과 굴레 속에서 그들을 이끌어내 해방시켜 구원으로 이끄시는 분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사람들이 주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답해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주 하느님께서는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 하고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있는 나다.” 라는 말은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는 분이란 뜻입니다. 이는 그분이 곧 만물의 근원이며 창조주시라는 뜻입니다.


모세의 소명 거절에 주님께서는 어떻게 응답하십니까?


파라오를 정점으로 한 이집트 민족에 대한 선교의 소명을 받은 모세가 두려워 떨며 다음과 같이 정중하게 주님께 거절 의사를 표합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낼 수 있겠습니까?”(탈출 3,11) 이에 주님께서 용기를 북돋워주시며 응답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이것이 내가 너를 보냈다는 표징이 될 것이다.”(탈출 3,12)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가 어떤 분이신지를 똑바로 알리는 일이 최우선 과제였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파라오에게 가서 말하였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백성을 내보내어 그들이 광야에서 나를 위하여 축제를 지내게 하여라.'”(탈출 5,1) 이집트 임금 파라오에게 주 하느님이 누구신지 알리는 일은 오늘날의 용어를 빌리면 곧 선교입니다. 마태오 복음서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도 같은 말씀으로 제자들을 격려하시며 세상 뭇 민족의 복음화를 위해 파견하십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나에게 다다랐다. 나는 이집트인들이 그들을 억누르는 모습도 보았다.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라.”(탈출 3,9-10) 마태오 복음에 따를 때, 모세에게 나타나셨던 주님께서 약자들 가운데 그들과 함께 계십니다. 나아가 신약의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굶주리고 고통에 시달리는 이들과 동일시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 25,40.45)


모세와 뽑힌 이들...


‘훌륭한 이들이 많은데 왜 내가 사제로 뽑혔을까?’ 가끔씩 떠오르는 생각입니다. 강당이 없어서 저희 집에서 공소를 치르던 시절이었습니다. 풍수원 본당 주임 신부님께서 판공이 되면 사흘씩 저희 집에 머물다 가셨지요. 여섯 살 적에 그분이 저게 사제의 꿈을 심어주셨습니다. 봄 판공을 마치고 저를 안아주시면서 ‘공소집 아들 참 잘 생겼다.’고 하시더니 가을 판공 때는 ‘얘 신부되면 좋겠어!’ 하셨습니다. 그분 말씀 덕분에 동네 어르신들이 제게 ‘가별(가브리엘)이는 신부된데’ 하시면서 늘 용기를 불어넣어주셨습니다. 본디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곁에서 용기와 힘을 북돋워주시는 분들 덕분에 자격이 생겨나고 능력이 커진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 옛날 모세를 뽑으신 주님께서 오늘도 제 곁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탈출 3,12)고 말씀하시면서 아론 같은 협조자를 보내주시기에 늘 용기와 힘을 얻는 것이 아닐까요?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2년 12월호, 
신교선 가브리엘(신부, 인천교구 작전동성당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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