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 언제 하느님이 나타나십니까?
엘리야의 승리 다음에 무엇이 뒤따릅니까? 예언자 엘리야는 카르멜 산에서 바알 예언자 450여명과 대결하여 대승을 거둡니다(1열왕 18,20-40). 그러나 승리의 기쁨을 누릴 겨를도 없이 엘리야는 멀리 달아나야 했습니다. 바알 숭배의 원흉 이세벨이 엘리야에게 선전포고를 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내일 이맘때까지 그대의 목숨을 그들의 목숨과 한가지로 만들지 못한다면, 신들이 나에게 벌을 내리고 또 내릴 것이오.”(1열왕 19,2ㄴ)
누가 진짜 신입니까?
지금까지 ‘누가 진짜 신이냐?’는 물음을 놓고 카르멜 산에서 대결하여 엘리야가 대승을 거둠으로써 그가 증거하는 하느님이 진짜 신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1열왕 18장). 그러나 이제부터는 ‘어느 편이 진짜 종교냐?’가 화두로 등장합니다(1열왕 19장).
어느 편이 참된 종교입니까?
엘리야는 이세벨의 분노를 피해 유다 땅 끝자락에 있는 브에르 세바를 거쳐 광야로 달아납니다. 본디 히브리어 ‘엘리야’는 ‘야훼가 나의 하느님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바알 종교의 도전에 맞선 엘리야가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이세벨의 협박 앞에 야훼 신앙이 좌절할 위기에 놓인 것입니다.
위기에 처한 엘리야는 그분께 무엇을 부탁드립니까?
그는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바알 종교에 맞서, 바알 신앙인들 앞에서 야훼만이 진짜 신이요 참 하느님이심을 힘차게 증거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싸리나무(로템/rotem) 아래 주저앉아 그저 죽기만을 간청합니다. “주님, 이것으로 충분하니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1열왕 19,4) 그러고 나서 예언자는 싸리나무 아래 누워 잠에 빠집니다.
그 다음은?
절망은 희망을 부릅니다. 바로 그때 주님의 천사가 타나나 예언자를 흔들어 깨웁니다. “일어나 먹어라. 갈 길이 멀다.”(19,7) 천사의 도움으로 새로운 힘을 얻은 엘리야는 밤낮으로 사십 일을 걸어 하느님 산 호렙에 무사히 도착하여 어느 동굴에 발을 들여놓습니다.
무슨 동굴입니까?
수백 년 전에 벌써 모세가 하느님을 뵙던 바로 그 동굴입니다. 거기서 모세는 그분의 얼굴은 볼 수 없고 등만을 볼 수 있었습니다(탈출 33,21-23). 동굴은 숨는 곳이니 그 속으로 들어가 머문다는 이야기는 곧 쫓기는 이가 불안 속에 잠시 피신해있음을 뜻합니다. 동굴은 불안, 좌절, 절망의 장소요 그런 때에 피신하는 곳입니다.
그 동굴에서는 무슨 일이?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무능력의 수렁에 처했을 때, 저 깊은 곳 내 힘으로는 도저히 빠져나올 엄두도 못내는 구렁에 빠졌을 때, 바로 그때 예언자는 그분 음성을 듣게 됩니다. “엘리야야,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아니 영원하신 분께서 바로 그 한밤중에 당신께서 뽑아주신 사람 거룩한 사람을 찾아오십니다.
지금 엘리야의 마음은?
그는 한마디로 불안에 떨어야 했습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갈팡질팡 갈필을 잡지 못하는 상태에서 동굴로 피신했을 뿐입니다. 야훼 하느님께 대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의 신앙이 너무 약해서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들을 일으켜 세울 수 없음을 예언자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예언자는 한편으로는 자기 백성들로부터 배신과 핍박을 받습니다.
엘리야는 다른 한편으로?
바알 종교 숭배자로서 막강한 권력을 쥐고 흔드는 왕비 이세벨의 도전을 받습니다. 자신을 죽여 없애버리려는 그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자 필사적으로 도망쳐 나와 호렙 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엘리야는 거기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고뇌했습니다. 주변에 아무도 없어 고독했습니다. 아무런 탈출구가 없어 좌절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불안에 떨어야 했습니다.
예언자의 머릿속에서는?
깨달음이 시작됩니다. ‘야훼 신앙이 무엇이기에, 야훼를 믿는 종교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극단적인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말인가?’
바로 그때 무슨 일이?
야훼 하느님의 계시가 시작됩니다. 바로 이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주님께서는 예언자에게 자신이 누구신지를 보여주십니다. 엘리야가 그분을 파악하기 시작합니다.
하느님의 계시가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계시는 그분의 인류구원 계획의 일부입니다. ‘계시’란 그분께서 신비에 싸인 자신을 조금씩 보여주심, 약간씩 깨우쳐주심, 인간 스스로가 ‘야훼’를 체험하도록 우리 마음을 열어주시는 은총의 사건입니다. 그분은 워낙 크신 분이라서 우리 인간에게 한꺼번에 알려거나 보여주셔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므로 아주 미세한 만큼씩, 우리 인간이 감지할 수 있을 만큼씩만 자신을 보여주십니다. 아니 다 보여주셔도 우리 영이 그분을 알아차리는 것은 언제나 아주 조금뿐이라고 표현하는 편이 더 나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계시를 우리가 왜 못 알아듣는지요?
예, 마치 일곱 살짜리 어린이들에게 깊은 철학이나 논리학을 설명한다면 그들이 거의 못 알아듣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쉬운 우리 한국어로 설명한다 해도 아직 철학적인 사고와 세상 이해의 지평이 열리지 않은 어린이들에게 철학이나 논리학은 거의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 평범한 인간은 하느님 존재와 그분의 뜻과 그분의 인류구원 계획을 한꺼번에 다 깨닫지 못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은 어떠했는지요?
한마디로 그들은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습니다. 어찌 보면 한쪽 눈은 야훼 하느님께 두고 있으면서 동시에 다른 한쪽 눈은 바알 신에게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같은 모습은 엘리야의 질문에서 잘 드러납니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치고 절뚝거릴 작정입니까? 주님께서 하느님이시라면 그분을 따르고 바알이 하느님이라면 그를 따르십시오.”(18,21ㄴ) 백성의 태도를 다음 구절이 대변해줍니다. “그러나 백성은 엘리야에게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18,21ㄷ)
이스라엘 백성은 무엇을 기다렸습니까?
다음 구절이 명백한 답을 줍니다. “그러자 주님의 불길이 내려와, 번제물과 장작과 돌과 먼지를 삼켜 버리고 도랑에 있던 물도 핥아 버렸다. 온 백성이 이것을 보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부르짖었다.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십니다.’”(19,38-39ㄱㄴ) 백성은 이같이 그저 눈에 보이거나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만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신약에서도 기적만 바라는 유다인의 태도를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오죽하면 사도 바오로가 다음과 같이 표현했겠습니까? “유다인들은 표징(기적들)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1코린 1,22)
그렇다면 호렙 산에서는 무슨 일이?
야훼 하느님께서 엘리야에게 자신을 계시해주십니다. 진짜 신앙이 무엇인지, 참 종교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알려주십니다. 야훼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19,11ㄱㄴ) 하느님의 계시가 세 단계에 걸쳐 묘사됩니다.
첫 번째로, 크고 강한 바람이 바위를 부수어버립니다. (야훼는 바람 가운데 안 계셨습니다.) 두 번째로, 지진이 일어납니다. (야훼는 지진 가운데 안 계셨습니다.) 세 번째로, 불이 일어납니다. (야훼는 불 가운데 안 계셨습니다.) 끝으로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여옵니다. --- 야훼는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 가운데 계셨습니다.
야훼 신앙, 참 종교는 무엇을 요구합니까?
세상(세속) 사람들이 즐기는 요란함이나 찬란함, 신비스런 현상들은 아무리 놀라울지라도 잠시 지나가는 것에 불과할 뿐이라는 교훈입니다. 참 종교, 참 하느님 곧 야훼 신앙은 바람, 지진, 불처럼 놀라운 현상에서가 아니라 ‘조용히 또 부드럽게’ 들려오는 그분 말씀을 듣고 따르는 데 있다는 교훈입니다. 나는 레지오 단원으로서 무엇을 따릅니까?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3년 11월호, 신교선 가브리엘(인천교구 작전동성당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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