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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요한의 서간들: 하느님과의 친교를 위한 둘째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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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5-03-18 조회수3,089 추천수1

[요한의 서간들] 하느님과의 친교를 위한 둘째 기준

 

 

하느님과의 친교 - 의로움의 실천 : 1요한 2,28-3,10 

 

첫 부분에서 이야기한 하느님과의 친교에 대한 내용은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라는 권고로 끝납니다. 1요한 2,28부터 시작되는 “자녀 여러분,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라는 반복되는 권고는 새로운 내용을 시작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전과는 달리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주제와 함께 표현된다는 점에서 새로운 내용의 시작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저자는 다시 한 번 어떻게 하는 것이 하느님과 친교를 맺는 것인지 설명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의로움의 실천입니다. “그분께서 의로우신 분이심을 깨달으면, 의로운 일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여기서 표현되는 ‘의로움’은 구약성경에서부터 가장 중심이 되는 주제 중의 하나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표현인 의로움은 이제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표현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실천하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태어난 이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의로우신 분임을 깨닫는 이들은 그것을 세상에서 실천하며 살아가는 이들 역시 하느님께 속한 이들이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바로 ‘의로움의 실천’입니다. 

 

저자는 마치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향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실천하는 이들이며 하느님의 자녀들’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하느님의 자녀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언급은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를 생각하게 합니다(마태 6,9-13; 루카 11,2-4 참조). 거룩하신 하느님의 이름조차 부를 수 없다고 생각했던 구약의 전통을 생각해 보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차이이며 또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게 됩니다. 

 

신앙인들은 이제 하느님의 자녀라고 불립니다. 그리고 이것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면, 그분을 보고 그것을 통해 그분처럼 되리라는 희망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단지 요한의 공동체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구원이 완성되리라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에게도 역시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모든 신앙인들은 이 희망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것에 희망을 두는 이들이 바로 신앙인들입니다. 

 

저자는 다시 한 번 예수 그리스도의 특성을 이야기합니다. 바로 순결함입니다. 1요한 3,4부터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그리스도의 순결함은 그분의 죄 없음을 말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리스도께서 의로우신 것처럼 의로움을 실천하고, 그리스도께서 죄 없이 순결하신 것처럼 죄를 짓지 않도록 노력하라는 권고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구원을 바탕으로 합니다. 

 

저자는 죄를 없애려고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를 닮아 죄를 짓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라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의로움을 실천하고 순결함을 간직한 이들이 하느님에게서 태어났다면, 죄를 짓는 이들은 ‘악마에게 속하는 이들’, 곧 악마의 자녀라고 강조합니다. 악마의 죄와 그것을 없애려고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 사이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살펴보는 것을 통해 그가 어디에 속한 사람인지, 또 누구의 자녀인지 알게 된다는 저자의 언급은 요한 공동체가 처한 상황과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계명의 준수 - 사랑의 실천 : 1요한 3,11-24 

 

저자는 다시금 자신이 가장 강조하는 주제로 돌아갑니다. 죄를 짓는 이들이 악마의 자녀이듯, 형제적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 역시 악마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말씀은 이것입니다. 곧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요한 3,11). 저자는 형제적 사랑을 실천하지 않은 예로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듭니다. 

 

그리고 문맥에서 보면 악한 카인이 의로운 동생인 아벨에게 가졌던 미움은 사랑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곧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자라고 표현합니다. 

 

사랑과 미움에 대한 비교에서 기준이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업적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어놓으신 그 사실”을 통해 신앙인들은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의로움이나 순결함처럼 사랑 역시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대로 형제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사랑의 실천을 말하면서 저자는 구체적인 현실에 관계된 윤리적 차원에 접근합니다. 그 예로 드는 것은 궁핍한 이들에 대한 사랑의 실천입니다.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는 권고는 구체적으로 신앙인의 삶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형제적 사랑의 실천은 생각이나 관념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실행될 때 그 참된 가치를 드러냅니다. 실천과 실행을 강조하는 요한 1서의 내용은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강조하는 야고보서와도 많이 닮았습니다(야고 2,26 참조). 

 

사랑을 실천하라는 권고는 비단 저자만의 생각은 아닙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명령이기도 합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1요한 3,23). 이것이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사랑을 통해 하느님과 신앙인은 친교를 맺습니다. 결국 서간의 처음부터 반복적으로 이야기해 온 하느님과의 친교와 계명의 준수는 모두 “사랑”을 통해 정리됩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곧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3,24). 이런 면에서 요한 1서에서 강조하는 내용은 ‘사랑을 통한 하느님과의 친교’입니다. 

 

친교는 사랑을 실천하는 행위 안에서 하느님과 신앙인들이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고 그분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과 친교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요한 1서에서 말하는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세상과 바른 믿음 : 1요한 4,1-6 

 

이제 저자는 독자들에게 ‘사람을 속이는 영’과 ‘하느님의 영’을 구분할 것을 당부합니다. 이미 하느님께 속한 이들과 악마에 속한 이들을 구분한 것처럼 하느님으로부터 비롯하는 것과 세상으로부터 오는 것을 구분하라고 권고합니다. 저자는 단적으로 이렇게 표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고 고백하는 영은 모두 하느님께 속한 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지 않는 영은 모두 하느님께 속하지 않는 영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적’의 영입니다”(1요한 4,2-3). 

 

요한 1서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적들’, ‘거짓 예언자들’ 그리고 ‘사람을 속이는 영’은 모두 동일한 대상을 지시합니다. 1요한 2,18-25에서도 표현한 것처럼 이들은 공동체에 속했었지만 지금은 공동체와 대립 관계에 있는 이들입니다. 이들의 믿음은 예수님의 육화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었고 저자의 시각에서 이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경향을 보이는 사조들은 도케티즘(가현설)이나 영지주의입니다. 그리고 이 둘은 넓은 의미에서 동일한 맥락에 놓여 있습니다. 실제로 적지 않은 이들이 예수님의 육화를 온전히 받아들이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하느님, 곧 신이 온전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들의 믿음은 교회로부터 단죄를 받았습니다. 아마도 요한 서간이 쓰일 즈음 이들의 영향이 상당히 컸을 것이고 그 흔적을 우리는 요한 서간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세상의 것을 말하고 세상은 그들의 말을 듣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것을 말하고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은 그말을 듣지 않습니다. 너무나도 당연해 보이는 표현이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신앙인은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당연히 하느님의 것을 말합니다. 저자의 이러한 생각은 지금 우리에게도 여전히 가치가 있습니다. 

 

* 허규 베네딕토 - 서울대교구 신부. 1999년 사제로 수품, 뮌헨 루드비히 막시밀리안 대학교에서 성서신학 박사학위를 받고,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신약성서 교수로 요한 묵시록과 희랍어를 가르치고 있다. 

 

[경향잡지, 2015년 3월호, 허규 베네딕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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