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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구약 여행53: 좋기도 하여라, 우리 하느님께 찬미 노래 부름이(시편 1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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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6-01-09 조회수4,123 추천수1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53) “좋기도 하여라, 우리 하느님께 찬미 노래 부름이”(시편 147,1)


하느님께 올리는 찬양 · 탄원가, 시편



- 10세기 독일의 시편집.


연재를 시작한 지 어느새 1년이 지났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아직 다루지 않은 부분들이 꽤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창세기에서 시작하여 이스라엘의 역사를 따라 걸으며 유배 이후의 예언서와 역사서들까지 이미 많은 책을 거쳐 왔습니다. 시편은 그 모든 역사가 녹아 있는 용광로와 같습니다. 한 시대 한 작가가 쓴 것이 아니라 대개 연대도 저자도 알 수 없는 수많은 이들의 기도인 시편 안에는, 이스라엘이 살아온 역사와 그 안에서 만났던 하느님의 모습이 다채롭게 펼쳐집니다.

이렇게 다양한 150편의 시편들의 내용을 어떻게 요약할 수 있을까요? 제목을 가지고 시작해 봅시다.

히브리어로 시편집의 제목은 “찬양가들의 책”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시편집이 온통 기쁜 찬양의 노래들로만 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책에는 오히려 탄원시편의 수가 찬양시편의 수보다 더 많습니다.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시편은 과거에 누군가가 했던 기도들을 모아 놓은 것이고, 우리가 체험하듯이 우리의 기도는 찬양만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찬양시편들만 모아 놓은 책이라면 우리에게는 비현실적인 기도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시편의 여러 종류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두 가지, 탄원시편과 찬양시편에 대해서만 살펴보겠습니다. 탄원시편에서 기도자는 하느님을 부른 다음 자신의 처지를 하느님 앞에 하소연하고,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합니다. 여기에서 핵심은 그가 자신만을, 자신의 고통만을, 또는 자신을 괴롭히는 이들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눈길을 하느님께 돌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께 바라라. 나 그분을 다시 찬송하게 되리라”(시편 42,6). 하느님께 부르짖는 탄원은, 고통 가운데에서도 하느님과 나 사이의 결합을 확인하는 과정이 되어 갑니다.

한편 찬양시편에서는 흔히 첫머리에서 다른 이들을 향해 하느님을 찬양하라고 권고하고 이어서 하느님을 찬양하는 이유를 말해 줍니다. 창조의 놀라움, 역사 안에서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변함없는 자애 등 여러 가지가 하느님을 찬양할 이유가 됩니다. 시편집이 삶의 고통을 잊지 않기에, 그 책에 들어 있는 찬양시편들은 삶의 굴곡 속에서 멈추어 하느님께 마음을 들어 올리는 순간들이 됩니다.

개별 시편들의 저자는 알 수 없습니다. 150편의 시편 가운데 73편에 ‘다윗’이라는 머리글이 붙어 있고 전통적으로는 시편집 전체를 ‘다윗의 시편’이라고 일컫기도 하지만, 그것은 모세 오경을 모세가 썼다고 말하는 것과 유사한 신학적인 의미에서이지 실제로 다윗이 이 시편들을 쓴 것은 아닙니다. 다윗을 시편의 저자라고 하는 것은 그가 악기를 연주했다거나 노래를 지었다는 이야기들이 성경에 전해지고 그가 전례를 정비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다고 일컬어지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고, 다윗이 훌륭한 임금으로서 메시아의 전형이 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시편들 대부분은 다윗 시대보다는 늦은 시대를 배경으로 하며, 신학적으로도 이미 유배를 겪은 흔적이 드러나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저자를 알 수 없어도, 분명 저자가 있기는 했겠지요. 그 사람은 어떤 구체적인 상황에서 시편을 썼을 것입니다. 기쁨에 넘쳐서 하느님을 찬양하기도 했을 것이고, 슬픔 속에서 하느님 앞에 마음을 쏟아 놓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기도가, 시간이 흐르면서 그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닌 여러 사람의 기도가 되어 갑니다. 마치 어떤 계기로 노래 가사를 쓰거나 곡을 만들었던 것이 나중에는 사람들에게 전파되어 많은 사람이 그 노래를 부르게 되듯이, 한 사람의 기도가 모든 이들의 것이 되어 갑니다. 이렇게 하나하나 모인 시편들이 하나의 책으로 완성된 것은 아마도 기원전 2세기 무렵일 것입니다. 그러니 벌써 2000년도 더 지났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수천 년 전에 누군가가 했던 그 기도를 지금도 바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오래전에 그 기도를 바쳤던 사람과 지금의 우리 사이에 어떤 공감대가 있기 때문이겠지요.

공감대, 그것이 시편을 우리의 기도가 되게 합니다. 시편에서 저자는 자주 자신을 가난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나는 가련하고 불쌍하지만”, 시편 40,18). 시편은 주님께 피신하는 가난한 이들의 기도입니다. 시편이 얼마나 진실하게 나의 기도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나 스스로 어느 만큼 가난한 사람이 되어 있는가에 비례합니다. 탄원이 찬양보다 더 많은 구약의 시편집은 분명 태평하고 아쉬울 것 없는 사람의 기도가 아닙니다. 어려움 속에서 나 혼자의 힘으로 삶을 헤쳐갈 수 없음을 아는 약한 이들의 기도, 훌륭하고 좋은 것 역시 내 힘으로 이룩한 것이 아니라 그 모두가 오직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임을 아는 사람의 기도입니다.

이렇게 고통 속에서 하느님께 매달리고 기쁨 가운데 하느님을 찬미하는 시편의 기도들은 하느님을 임금으로 선포합니다. 그래서 시편 22장4절에서는 하느님을 “이스라엘의 찬양 위에 좌정하신 분”이라 부릅니다. 이 세상의 이런저런 힘들이 세상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것 같이 보일지라도, 시편을 노래하는 이들은 하느님의 다스림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나라는 영원무궁한 나라, 당신의 통치는 모든 세대에 미칩니다”(시편 145,13).

[평화신문, 2016년 1월 10일, 안소근 수녀(성 도미니코 선교수녀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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