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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지리] 성경 속 도시75: 라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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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6-01-09 조회수3,500 추천수1

[성경 속 도시] (75) 라빠


무고한 우리야 죽인 다윗의 죄 물든 곳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를 탐해 라빠성 전투에서 우리야를 죽게 한다. 하프를 연주하며 춤추는 다윗왕(가운데), 세밀화, 860년경, 프랑스 국립박물관. 출처=「성경 역사 지도」


라빠는 고대 암몬의 수도로 오늘날 고원 지대에 자리한 요르단 수도인 암만이다. 라빠는 10㎞만 나가도 사막이어서 주거 환경이 썩 좋지 않았다. 또 사막에 사는 유목민의 침입을 자주 받는 불리한 지형적 위치에 있었다. 그래서 암몬족은 물이 풍부하고 비옥한 영토를 확장하고자 주변국들을 자주 침입하였다.

암몬 왕국은 이렇게 열악한 환경 탓에 요르단 동편 지역의 국가 중 가장 힘이 약한 나라였다. 이스라엘에 대항했던 암몬 왕국은 기원전 8세기 말, 아시리아 제국에게 정복당해 400년 이상 암몬과 수도 라빠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교통 요충지인 라빠는 기원전 63년 로마제국의 통치 밑으로 들어간 후 다시 크게 발전하게 된다. 또 서기 4세기에서 7세기에 이르는 ‘비잔틴’ 시대에는 라빠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어 교회들이 건설되면서 황금기를 누렸다. 그러나 630년대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아랍인이 이 지역을 정복한 후 그때부터 이 도시의 이름도 ‘암만’으로 바뀌게 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경에서 라빠는 암몬 자손들이 사는 장소로 등장한다. “바산 임금 옥은 라파인들 가운데에서 홀로 살아남았다. 쇠로 만든 그의 침대가 지금도 암몬 자손들이 사는 라빠에 있지 않은가? 그것은 보통 암마로 길이가 아홉 암마, 너비가 네 암마나 된다”(신명 3,11).

특별히 라빠는 다윗과 우리야의 이야기로 유명한 지명이다. 다윗은 히타이트 사람 우리야의 아내, 밧 세바를 범해서 아이를 갖게 한 자신의 죄를 숨기려 한다. 그래서 밧 세바의 남편이자 자신에게 충직했던 부하인 우리야를 라빠성 전투의 최선봉에 서게 하고 결국 죽게 한다. 다윗이 미리 계략을 꾸며 우리야를 적군 가운데 남기고 다른 병사들을 후퇴시켰기 때문이다. “다윗은 편지에 이렇게 썼다. ‘우리야를 전투가 가장 심한 곳 정면에 배치했다가, 그만 남겨 두고 후퇴하여 그가 칼에 맞아 죽게 하여라’. 그리하여 요압은 성읍을 포위하고 있다가, 자기가 보기에 강력한 적군이 있는 곳으로 우리야를 보냈다. 그러자 그 성읍 사람들이 나와 요압과 싸웠다. 군사들 가운데 다윗의 부하 몇 명이 쓰러지고, 히타이트 사람 우리야도 죽었다”(2사무 11,15-17).

라빠는 예로부터 ‘물의 성’이라 불렸다. “요압은 다윗에게 전령들을 보내어 이렇게 말하였다. 제가 라빠를 공격하여 그 ‘물의 성’을 점령하였습니다”(2사무 12,27). 요압은 이곳을 점령하고 그들을 노예처럼 데려다 일을 시켰다. “그는 또 그곳의 백성을 데려다가 톱과 날카로운 쇠 연장과 쇠도끼 다루는 일을 맡기고, 그들에게 벽돌 만드는 일을 시켰다. 그는 암몬 자손들의 성읍마다 이렇게 하였다. 그러고 나서 다윗과 모든 군사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2사무 12,31).

다윗의 장군이었던 요압에 의해 정복당한 라빠가 폐허가 될 것이라는 예언이 예레미아서, 에제키엘서, 아모스서에 등장한다(예레 49,2-3).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후 라빠는 아시리아 아수르의 지배를 받았고 이어서 바빌론과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현재 고대 라빠성은 돌로 쌓은 웅장한 성벽의 모습과 함께 로마 시대와 비잔틴 시대의 유물들의 흔적이 남아 있어 라빠의 긴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평화신문, 2016년 1월 10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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