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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구약 여행54: 먹어라, 벗들아. 마셔라, 사랑에 취하여라(아가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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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6-01-16 조회수3,579 추천수1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54) “먹어라, 벗들아. 마셔라, 사랑에 취하여라”(아가 5,9)


연가, 알고 보니 하느님 창조에 대한 찬미가



12세기 윈체스터 성경에 나오는 그림. 솔로몬과 술람밋.


연애 편지도 요약합니까? 불가능하지요. 아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가는 사랑의 노래입니다. 더 이상 내용을 풀어 말할 수가 없습니다. 아가는 줄거리가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커다란 하나의 감탄사와 같기 때문입니다. 부분적으로는 사랑의 여정이 나타나기도 해서 사랑하는 남녀가 서로를 찾고, 서로의 찾음이 엇갈린 다음 마침내 서로를 만나 상대방의 아름다움에 경탄하고, 사랑의 합일이 이루어진 다음에는 다시 그 만남이 끝나는 모습이 그려지지만, 아가는 소설이 아닙니다.

“솔로몬의 가장 아름다운 노래”(아가 1,1)라는 표제에 이어 즉시 적나라한 표현이 나옵니다. “아, 제발 그이가 내게 입 맞춰 주었으면!”(1,2). 성경에 이런 구절이 있었나 하고 깜짝 놀라시는 분들이 분명 있으실 것입니다. 옛날에도 많이 있었으니까요. 수천 년 전부터 아가를 읽어온 많은 이들이 이러한 애정 표현이 성경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혹시 잘못 들어간 것은 아닐까, 아니면 다른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전통적으로는 아가가 겉으로는 남녀 간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런’ 사랑이 아니라 ‘다른’ 어떤 사랑에 대해 말하는 책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유다교에서는 아가의 주인공 남녀가 각각 신랑이신 하느님과 신부인 이스라엘을 나타낸다고 해석했습니다. 물론, 호세아와 예레미야, 에제키엘 같은 예언자들을 바탕으로 하는 해석입니다. 이전부터 하느님을 이스라엘의 신랑이시라고 불러왔기에, 아가를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아가의 신랑 신부가 하느님과 이스라엘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무리한 해석은 결코 아닙니다.

그리스도교의 해석도 기본 틀은 동일합니다. 이스라엘의 자리에 교회를 대입하면 됩니다. 교부들은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신부인 교회라는,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5장 32절에도 나타나는 개념을 바탕으로 아가를 읽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베르나르도나 십자가의 성 요한, 아빌라의 데레사 같은 신비가들은 아가를 그리스도와 영혼 사이의 사랑 노래로 해석했습니다.

특별한 인물이 하나 있었습니다. 5세기에 살았던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는, 아가가 순전히 남녀 간의 사랑을 노래한 것이며 따라서 성령의 영감을 받은 책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그 주장은 단죄를 받았지요. 그런데 여기에서 잠시 생각을 해 봅시다.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는 남녀 간의 사랑을 어떻게 평가했기에, 그 사랑을 주제로 하는 책이 성경이 될 수 없다고 여겼던 것일까요?

아가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기 위해서는 인간적 사랑에 대한 평가가 달라져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 계몽주의와 낭만주의의 시대에 이뤄졌습니다. 남녀 간의 사랑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놓고 말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아가를 바라보는 시각도 바뀌었습니다.

과연, 남녀 간의 사랑을 노래한 아가는 성경의 전통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일까요? 아가가 남녀 간의 사랑을 노래한 것이라서 성경에서 삭제해야 할까요? 그러면 창세기는 어떻게 할까요? 창세기에서는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합니다. 남녀의 사랑도 하느님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좋지 않았던 것은 아담이 혼자 있다는 사실이었고 그래서 그의 짝으로 하와를 만드신 것이었습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창세 2,23). 이 말씀을 성경에서 뺄 수 없다면 아가도 뺄 수 없습니다. 아가의 토대는 구약 성경의 세계관의 바탕인 창조의 선성(善性)에 대한 믿음입니다.

창세기 2장 25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아가의 남녀는 알몸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아가에서 남자와 여자가 각각 상대방의 몸을 묘사하는 아가 4,1-7; 5,10-16; 7,2-10을 보십시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끊임없이 “정녕 그대는 아름답구려”(1,15; 2,14; 4,1 등), “정녕 당신은 아름다워요”(1,16 등) 라고 경탄합니다. 궁극적으로 여기에서 긍정하는 것은 바로 창조의 선성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의 아름다움을, 그 가치를 알아보고 경탄하는 것에서 죽음보다 강한 사랑이 생겨납니다. 여인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그대의 모습을 보게 해 주오 […]. 그대의 모습은 어여쁘다오”라는 연인의 목소리는(2,14) 벼랑 속에 숨어 있는 비둘기가 얼굴을 내밀고 밖으로 나오게 합니다. 서로의 가치를 인정하는 데에서 상대방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 가능하게 되고, 남녀는 그 사랑 안에서, 바로 그 소위 세속적이고 육적인 사랑 안에서 하느님을 체험합니다.

아가에서는 하느님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데, 하느님에 대한 언급으로 볼 수 있는 것은 8장 6절뿐입니다. 「성경」에서 “더할 나위 없이 격렬한 불길”이라고 번역된 구절은 한 단어로 되어 있고 그 마지막이 “야”인데, 이것은 최상급의 의미로 이해하여 이렇게 번역할 수도 있지만 “야훼의 불길”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이 두 번째 해석을 따른다면, 아가서 8장 6절은 인간적 사랑에 관한 아가의 신학 전체를 요약해 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가의 저자는 에덴동산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이 세상에 이미 죄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음을 알고 있습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선성을 의심하게 하는 모든 어둠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모험을 시작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불꽃인 그 사랑이 사랑에 따르게 마련인 자신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태워 없애기 때문일 것입니다.

[평화신문, 2016년 1월 17일, 안소근 수녀(성 도미니코 선교수녀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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