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인물] 성경 속의 지도자들: 보잘것없는 사람을 위하는 지도자 엘리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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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6-09-16 | 조회수7,042 | 추천수1 | |
[성경 속의 지도자들] 보잘것없는 사람을 위하는 지도자 엘리야
역사의 중요한 고비마다 인간은 권력욕과 재물욕, 명예욕 때문에 하느님의 소리를 무시하였다. 더욱이 가짜 예언자와 탐욕스러운 지도자를 따르면서, 스스로는 하느님을 섬긴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열왕기에 등장하는 엘리야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답을 주고 경고를 한다. 엘리야는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 모세 다음으로 중요하게 등장하는 영적 지도자이다. 다윗이나 솔로몬도 성경의 중요 인물이지만, 제왕의 자리를 차지한 세속적 지도자였던 반면에 엘리야는 어느 집안의 아들이라는 언급조차 없다.
어려울 때 도움을 주는 지도자
주님께서 엘리야에게 내리신 첫 번째 사명은 크릿 시내에 숨어 지내면서 까마귀가 날라주는 먹을 것과 시내의 물을 마시라는 너무나 보잘것없는 것이었다(1열왕 17,3-4 참조).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옥에 갇힌 죄수나 동굴 같은 곳에 피신해 지내는 이들에게 몰래 건네주는 ‘구메밥’ 같은 것을 먹으라는 것이다.
초라하면서도 힘들고 외로운 과정을 견뎌야 하는 이 대목은 마치 무속신앙의 ‘입무 의식’과도 비슷하다. 이런 과정은 참된 지도자로 거듭나는 데 꼭 필요하다. 엘리야의 광야 체험은 신약 시대에 이르러 요한 세례자가 낙타털로 된 옷을 입고, 메뚜기와 들꿀만 먹고 사는 것(마태 3,4 참조)과 비슷하다.
그런데 이런 생활도 시냇물이 말라버리는 바람에 끝이 난다. 마실 물도 없는 기아의 순간이다. 이때 주님께서는 포기하지 말고 사렙타의 과부를 찾아가라고 명하신다. 그러나 성에서 만난 과부는 자기도 먹을 것이 떨어져 이제 곧 죽을 참이라 대답한다.
지금도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는 굶주림으로 고통받고 있는 제3세계의 상황과 비슷하다. 절망하고 있는 과부에게 엘리야는 음식을 만들어 자신에게 주면 “단지에는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에는 기름이 마르지 않을 것이다.”(1열왕 17,16)라고 예언한다.
배고픔과 헐벗음으로 죽어가는 이웃을 돕는 사람에게는 풍요와 평화가 찾아온다는 메시지다. 언뜻, ‘나 하나도 먹고 살기 힘든데 무슨 남의 걱정까지’ 하느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누군가를 섬기고 돌보며 도와야 한다는 책임감을 갖는 이는 어려움을 참아내고 열심히 일할 힘이 생긴다.
힘들어도 참고,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의미부여까지 해주는 것은 결국 이웃사랑과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이다. 왜 적이 오자 먼저 백성을 버리고 도망친 선조 임금이나 북한군이 쳐들어오자 아무 일 없을 것이라고 방송한 뒤 줄행랑을 친 이승만 대통령을 진심으로 존경한다면 과연 제정신이겠는가?
남을 딛고 올라서서 자기만 잘 살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보다 남을 먼저 챙겨야 진정한 지도자라 할 수 있다. 세월호의 의인들처럼 크고 작은 재난 속에서 자신을 바친 이들이 엘리야의 후손이지만, 권력과 자신의 명예에만 목숨을 건 가짜 지도자들은 아합 임금이나 그의 아내 이제벨에 가깝다.
지도자는 융합성과 창조성이 필요하다
엘리야가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린 기적을 보인 뒤, 삼 년이 되던 해에 사마리아에는 엘리야가 예언한 대로 가뭄이 심하게 든다. 이제벨이 예언자들을 학살할 때 백 명을 숨겨주고 빵과 물을 대주던 신앙심 깊은 궁내 대신 오바드야는 아합 임금의 명을 받고 엘리야를 찾아간다.
바알을 섬기는 다른 예언자 450명에 대척하는 유일한 예언자로 가르멜산에 오른 엘리야는 황소 두 마리를 올려놓고 누구의 소에 불이 붙는지 보라고 말한다. 바알을 섬기는 예언자들은 피가 흐를 때까지 칼과 창으로 자기 몸을 찌르며 예언의 황홀경에 빠졌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엘리야의 시기에 그리스나 미스라 지역에는 실제로 이런 제사 방식이 성행했다. 이 장면은 폭력적 방식과 자해공갈로 구성원을 곤경에 빠뜨리는 나쁜 지도자의 모습이다. 이들의 상처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 받은 상처와는 대척점에 있다. 성인의 상처는 주님과 고통받는 이들과의 일치로 생겼지만, 악을 지향하는 이들의 자해는 분열의 산물이다.
이들의 쇼에 아랑곳하지 않고 엘리야는 소를 잡고 장작을 쌓은 뒤, 네 항아리의 물을 번제물과 장작 위에 쏟으라고 명한다. 그리고 주님을 부르자 불길이 내려와 번제물과 장작과 돌과 먼지뿐 아니라 도랑에 흐르는 물까지 삼킨다. 그런 뒤 비가 내릴 것이라고 예언을 한다(1열왕 18장 참조).
희생제물과 나무, 돌과 물이 불의 힘으로 모두 사라지는 이 대목은 중세 연금술사에게도 중요하다. 서로 어울릴 수 없는 재료들이 한데 모여 조화롭게 변모하는 장면은, 공동체의 지도자로 성장하려면 불같은 열정과 물의 융합성, 나무의 창조성과 생성성, 그리고 돌 같은 단단함이 모두 필요하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죽어서도 존경받는 지도자는
아합 임금의 아내 이제벨에 대하여 살펴보자. 이제벨은 주님의 예언자들을 학살하는 것만으로 모자라서 나봇을 죽이고 포도밭을 갈취하는 계략을 꾸미는 등(1열왕 21,1-19 참조) 악의 화신처럼 보인다.
언뜻 이제벨이 우리와는 많이 다르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그렇지 않다. 우리는 부정하고 싶지만 이제벨은 우리의 그림자다. 채울 수 없는 욕망이 자라서 물질의 노예가 되는 우리의 모습이다.
그나마 아합 임금은 제 옷을 찢고 맨몸에 자루옷을 걸치며 단식에 들어가는 참회의 시간을 거치지만(1열왕 21,20-29 참조) 결국 싸움에서 비참하게 죽는다. 그의 피가 묻은 병거를 개들이 핥는 장면은(1열왕 22,38 참조) 불의 병거와 말이 회오리바람 속에 엘리야를 하늘로 들어올리는(2열왕 2,11 참조) 장면과 대조된다. 세속의 임금은 죽어서 개가 그의 피를 핥게 되는 치욕을 당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가난한 이들을 위한 엘리야는 하늘로 올라간다.
역사에서도 영적으로 성숙했던 만델라, 간디 같은 인물은 죽은 뒤에도 존경받지만, 네로나 카다피, 후세인 같은 독재자들은 치욕스러운 이름으로 기록된다. 독재자들 곁에 있던 모든 이가 결국 배신하고 떠나지만, 엘리야는 “주님께서 살아계시고 스승님께서 살아계시는 한, 저는 결코 스승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2열왕 2,6)라고 말하는 엘리사라는 후계자도 둔다. 엘리야가 나눠준 것은 땅이나 권력이 아니라 그의 가르침과 삶 자체였기 때문이다.
오만한 지도자를 부끄럽게 만들고
엘리야는 신약 시대에서도 요한 세례자나 예수님을 보고 엘리야가 아니신지 묻는 이들이 많았을 정도로 구약 시대의 영적 지도자이다. 하지만 그가 지금 다시 나타난다면 헐벗고 추한 그의 모습 때문에 지도자로 섬기는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우리가 아합 임금이나 이제벨 못지 않게 거만하고 어리석다는 뜻이다. 그를 도운 첫 번째 사람과 그의 기적을 제일 먼저 경험한 사람이 곧 굶어 죽을 과부란 점이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지 않으면, 우리의 진짜 눈은 열리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고 하셨다.
다가오는 심판 날에는 ‘거만한 자들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은 모두 검불이 되고, 주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이들에게는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게 된다.’(말라 3,19-20 참조)는 구약의 마지막 부분의 구절을 다시 깊이 새겨본다.
엘리야는 안락함과 허명에 길들여져 오만한 이들을 부끄럽게 만들지만, 동시에 희망을 놓지 않게 해주는 참된 지도자 가운데 하나다.
* 이나미 리드비나 - 심리분석 연구원. 한국 융 연구원 지도 분석가이며 서울대학교 외래교수를 맡고 있다. 저서로는 「성서를 심리적으로 풀어본 슬픔이 멈추는 시간」, 「성경에서 사람을 만나다」 등이 있다.
[경향잡지, 2016년 9월호, 이나미 리드비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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