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요한 묵시록 둘러보기 | |||||||||||||||
---|---|---|---|---|---|---|---|---|---|---|---|---|---|---|---|---|
이전글 | [구약] 성경 속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 하바쿡서, 스바니야서 | |||||||||||||||
다음글 | [신약] 필리피서의 그리스도 찬가 이야기 | |||||||||||||||
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7-10-04 | 조회수23,666 | 추천수0 | |||||||||||||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1) 요한묵시록을 읽기가 두렵나요?
여러분은 요한묵시록을 떠올리면 어떤 생각부터 드시나요? ‘무섭다’, ‘두렵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그도 그럴 것이 ‘하느님께서 머지않아 반드시 일어날 일들을 알려주신 계시’(묵시 1,1)가 요한묵시록인데, 그 계시의 내용이 마치 재앙처럼 묘사되어 있습니다. 하늘에서 봉인을 일곱 차례 뜯는 장면이 나오는 6장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살해하고 평화가 사라지며(4절), 흉년과 굶주림과 흑사병 등이 일어납니다(6-8절). 또 일곱 번의 나팔을 부는 8장에서는 우박과 불이 땅에 떨어지고(7절),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며, 강들에 독성이 퍼져 그것을 마시는 사람들이 죽어가는 일 등이 벌어집니다(8-11절). 12장에서는 사탄이라고도 불리는 용이 나타나서 영인을 괴롭히는 내용이, 13장에서는 두 짐승이 나타나서 신앙인들을 박해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16장에서는 하늘에서 일곱 대접을 땅에 쏟는데, 이때에도 우주적인 재앙이 벌어집니다. 이와 같이 무서운 심판과도 같은 일들을 묘사하고 있고, 또 그 이들이 머지않아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고 하니 두려운 생각에서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요한묵시록은 우리에게 공포심을 안겨주기 위해 쓴 책이 아닙니다. 요한묵시록 전체에서 ‘행복합니다(makarios)’라는 말이 일곱 번 나오는 것만 보아도 이를 알 수 있습니다(1,3; 14,13; 16,15; 19,9; 20,6; 22,7; 22,14). 성경에서 일곱이라는 숫자는 충만함을 상징합니다. 그러니 요한묵시록의 저자는 이 책이 ‘재앙의 책’이 아니라 축복으로 가득한 ‘행복의 책’임을 분명히 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묵시록의 내용 자체가 전반적으로 재앙을 묘사하고 있는 것일까요?
어둠 속에 살아가는 것이 익숙한 박쥐에게 있어서는 빛이 재앙이 됩니다. 그러나 햇빛을 따라 살아가는 해바라기에게 있어 그 빛은 축복이 됩니다. 이를 요한묵시록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충실히 섬기는 이들에게는 이 책이 축복이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맞서 대적하려는 이들에게는 이 책의 내용이 심판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이는 마치 에덴동산에서 죄를 지었던 아담의 반응과도 같은 이치입니다. 그는 죄를 지은 이후에 하느님께서 저녁 산들바람 속에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듣고 두려워하였습니다(창세 3,8). 그가 죄를 짓지 않았다면 그 소리는 그에게 반가운 소리였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을 충실히 믿고 따르려는 마음만 있다면 요한묵시록을 두고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 한재호 루카 신부 - ‘요한묵시록 둘러보기’를 연재하는 한재호 루카 신부는 로마 교황청립 우르바노대학에서 성서신학을 전공하고 현재 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로 재임하고 있다. [2017년 7월 2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경축이동 빛고을 3면, 한재호 루카 신부]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2) 요한묵시록은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이야기를 다룬 것일까요?
요한묵시록을 잘못 해석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오류가 요한묵시록에 나와 있는 내용들을 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역사적인 사건이나 인물과 자구적으로, 혹은 비유적으로 연관 짓는 해석입니다. 이러한 해석을 학자들은 ‘역사주의적 해석(Historicist View’이라고 부릅니다. 예를 들어 13장 18절에 보면 ‘육백육십육(666)’이란 숫자가 나오는데, 13장에 등장하는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을 가리키는 표시입니다. 요한묵시록에서 ‘666’의 숫자로 상징되는 짐승은 다음과 같이 묘사되었습니다. 권력과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하느님을 모독하고 신앙인들을 박해합니다. 또 자신의 상을 만들어 그 상에 경배하게 합니다. 이 ‘666’의 짐승을 두고도 다양한 해석이 나오는데, 특히 종교개혁 시대에 나온 역사적 해석이 대표적입니다. 개신교인 프로테스탄트 측에서는 ‘이탈리아 교회 교황’이란 뜻의 ‘이탈리케 에클레시아 파파이코스’라는 그리스어를 숫자로 풀면 666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가톨릭교회를 악의 세력으로 규정하였습니다. 가톨릭의 일부 학자들은 그 반대입니다. 오히려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르틴 루터를 ‘666’이라고 지목합니다. 왜냐하면 루터를 가리키는 그리스어 ‘루테라나’를 숫자로 풀면 666이기 때문입니다.
20세기에 들어서도 역사적 해석은 계속되었습니다. 1980년대 미국과 중동이 한창 긴장 관계에 있을 무렵 다이어라는 사람은 ‘바빌론’을 사담 후세인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또 냉전 시대였던 1970년대에 린세이라는 사람은 바다의 짐승과 예수 그리스도의 전투를 가리키는 ‘하르마게돈 전투’(16,16)를 소련과의 핵전쟁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20세기 초의 러셀이라는 사람은 묵시록의 심판과 전쟁을 1차 세계 대전, 2차 세계 대전 등과 연결시켜 종말이 온다고 주장했었습니다. 이것이 큰 반향을 일으켜 러셀의 종교가 크게 성장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여호와의 증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신천지교라는 사이비 종교가 나왔는데, 신천지교의 교주인 이만희 씨는 자신에게 벌어진 여러 일들을 묵시록의 여러 내용에 빗대어서 자신을 통해 종말의 시대가 왔다고 주장합니다.
이와 같은 해석은 글자 그대로를 역사 안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끼워 맞추는 것으로서 성경을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2017년 7월 9일 연중 제14주일 빛고을 3면, 한재호 루카 신부]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3) 요한묵시록은 미래에 실제로 벌어질 이야기를 다룬 것일까요?
요한묵시록의 저자인 파트모스의 요한은 자신의 책을 두고 ‘예언의 말씀’(1,3)이라고 합니다. ‘예언’이라는 말은 사전적으로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알거나 짐작하여 말하는 것’을 뜻하는데, 이때에는 한자로 ‘미리 예(豫)’와 ‘말씀 언(言)’을 사용합니다. 둘째는 ‘하느님께서 맡기신 말씀을 전하는 것’을 뜻하는데, 이때는 한자로 ‘맡길 예(預)’와 ‘말씀 언(言)’을 사용합니다. 성경에서 사용되는 예언은 두 번째 의미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예언자에게 맡기신 말씀을 예언자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적절한 때와 장소에서 선포하는 행위가 예언인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예언서를 보면 이스라엘 탈출, 세상 창조 등의 과거 이야기도 나오고, 예언자 시대에 벌어지고 있는 현실의 이야기도 나오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벌어질 미래 이야기도 나옵니다. 이를 통해서 볼 때도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이 먼 미래에 관해 ‘예측’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예언”을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알려주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요한묵시록이 머나먼 미래에 벌어질 일이고 그 미래가 다가오면 요한묵시록에서 묘사하는 여러 사건들이 실제로 벌어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러한 해석을 ‘미래주의적 해석(Futurist View’라고 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요한묵시록은 먼 미래에 벌어질 일들에 대해 사람들이 궁금하게 여기고 있는 것들을 알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채워주기 위해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회개를 하고 믿음을 굳건히 하여 구원받을 수 있기를 바라시며 말씀하십니다.
이와 관련하여 그레사케라는 신학자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성경은 종말에 관해서 상징적으로 언급한다는 사실을 오늘날 성서학계에서는 밝혀냈다. 성경은 최종 미래를 미리 알고 알리는 점쟁이가 아니다. 종말에 관한 말은 시간상으로 역사의 종말에 관해서 정보를 제공한다고 할 수 없다. 종말 언사는 현실적인 체험에서 나온 것이니, 곧 현재의 체험을 최종 미래에로 투사한 것이다.” 이 말을 쉽게 표현하면 요한묵시록 역시 상징적인 여러 표현을 통해 오늘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17년 7월 16일 연중 제15주일 빛고을 3면, 한재호 루카 신부]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4) 성경을 해석하는 것과 다른 책을 해석하는 데에는 차이가 있을까요?
앞서 2주 동안 우리는 요한묵시록의 잘못된 해석 곧 ‘역사주의적 해석’과 ‘미래주의적 해석’에 대해서 보았습니다. 이러한 오류가 나오는 것은 성경에 대한 근본적 이해 자체가 잘못된 데에서 비롯합니다. 이를 다음의 예를 들어서 보겠습니다.
과학 보고서, 연애편지, 소설책, 광고들 이렇게 네 종류의 책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안경’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이 네 권의 책에서 각각 다룬다고 생각해 봅시다. 책마다 다루는 내용과 방식이 다를 것입니다. 먼저 과학 보고서에서는 안경의 소재를 연구하면서 보다 가볍고도 효과적인 것을 개발하는 데 초점을 둘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데이터나 실험 자료 등을 쓸 것입니다. 연애편지에서는 어떤 내용이 나오겠습니까? ‘당신은 제게 마치 안경과도 같군요. 당신을 알고 난 뒤 저는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어요.’라는 식의 표현이 나올 것입니다. 소설에서는 줄거리 안에서 그 안경이 차지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가령 ‘아버지는 뿔테 안경을 항상 쓰셨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뿔테 안경은 나에게 유산이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안경테가 부러졌는데 부러진 테 사이로 조그만 쪽지가 있었다. 그것은 아버지의 고향을 그린 지도였는데, 어떤 보물이 있는 곳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뭐 이런 식일 것입니다. 광고문도 생각해 봅시다. 광고하고자 하는 안경이 얼마나 좋은 것이고 편한 것이고 그 안경을 끼면 얼마나 멋져 보이는지를 알리는 내용일 것입니다.
그런데 연애편지에 과학 보고서의 글을 썼다면 연애편지를 받는 사람은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또한 소설책에 안경에 대한 광고문이 들어갔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 어떤 독자도 그런 소설책을 읽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처럼 똑같은 안경이라는 단어도 어느 책에 쓰여 있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기대하는 바가 다릅니다. 소설은 소설의 문학적 특징이, 시는 시적 특징이, 과학 보고서는 과학 보고서의 특징이 있습니다. 이런 특징을 이해하지 않고 읽는다면 이해도, 감동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어떠합니까? 성경은 이야기체, 시적 구조의 글, 지혜문학, 역사서, 편지 등 다양한 문학 형태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다양하게 이해해야만 성경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 안에서 요한묵시록에 대해 말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보도록 하겠습니다. [2017년 7월 23일 연중 제16주일 빛고을 3면, 한재호 루카 신부]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5) 요한 묵시록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요한묵시록에 대해 학자들이 제안하는 가장 올바른 해석은 ‘역사비평방법론’에 따라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 해석을 좀 더 쉽게 설명하기 위해 예를 하나 들도록 하겠습니다.
2002년 월드컵 경기가 우리나라에서 개최되었을 때 이런 신문 기사 제목이 있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2002년 6월, 한반도에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붉은 악마가 되어 열 한 명의 태극전사를 위해 거리를 가득 메웠다.” 이 말을 들으면 우리 모두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당장에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월드컵 4강 신화를 달성하는 축구 선수를 위해 한국 축구 대표팀의 유니폼과 같은 색깔인 붉은 색 옷을 입고 거리에 나와 열정적으로 응원하며 온 국민이 하나가 된 것을 말해 주는 신문 기사 내용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신문 기사를 300년 후에 그러니까 2320년경 어느 미국 사람이 읽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 사람도 우리처럼 이 표현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열 한 명의 태극 전사라는 표현부터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붉은 악마가 되었고, 그 악마들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는 표현까지 전부 다 수수께끼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만일 그 사람이 2002년 한반도에서 벌어진 역사적 상황을 알고 있지 않다면, 또 이 표현 방식들이 지닌 문학적 기법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는 엉뚱한 해석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읽게 될 요한 묵시록이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묵시록 안에는 우리가 평소에 즐겨 쓰는 단어, 표현 방식들보다는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표현 방식들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것들입니다. 또한 그 표현방식들은 구약 성경과 당시의 신화 내용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비유나 상징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하여 이 책을 해석하자는 것이 역사비평방법론에 따른 해석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에 맞추어서 보았을 때 요한묵시록이 표현하는 독특한 문학유형을 두고 ‘묵시문학’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역사비평방법론에서는 묵시문학이라는 특성을 고려하며 요한묵시록을 해석하게 됩니다. [2017년 7월 30일 연중 제17주일 빛고을 3면, 한재호 루카 신부]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6) 묵시문학과 묵시주의
지난달 우리는 요한묵시록을 역사비평방법론에 따라 해석해야 하고 묵시문학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달부터는 묵시문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묵시록은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apokalypsis), 하느님께서 머지않아 반드시 일어날 일들을 당신 종들에게 보여 주시려고 그리스도께 알리셨고, 그리스도께서 당신 천사를 보내시어 당신 종 요한에게 알려 주신 계시입니다.”(1,1) 이 구절에서 ‘계시(revelation)’라는 말이 나오는데, 성경 원어인 그리스말을 그대로 직역하자면 ‘묵시(apocalype)’입니다. 그렇습니다. 요한묵시록은 성경에 나온 가장 전형적인 묵시문학인 것입니다.
묵시문학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서는 묵시주의를 알아야 합니다.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이후 이스라엘 백성은 평탄하지 않은 역사를 겪게 됩니다. 특히 기원전 2세기 시리아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4세(기원전 176-164년) 때의 박해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참담함을 안겨 주었습니다. 마치 세상이 끝날 것만 같은 절망을 느꼈고, 그것은 신앙으로도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컸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안에는 자연스럽게 이러한 질문이 나오게 됩니다. “지상의 권력 앞에서 하느님은 왜 이토록 무력하시기만 한 것일까?”, “과연 우리의 운명은 이대로 사라지는 것인가?”, “하느님은 악을 보고도 왜 모른 체하시고, 믿음을 지키는 이들을 보호하시지 못하는가?” 이러한 물음에 대해 등장한 사회 종교적 이념이 묵시주의입니다. 그리고 이런 묵시주의를 표방한 문학유형이 바로 묵시문학입니다. 요한묵시록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1세기 말 로마제국의 박해 안에서 신앙인들은 위기를 겪고 있었는데 이에 대해 응답한 책이 바로 요한묵시록인 것입니다.
이렇게 보았을 때 요한묵시록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던져주는 의미가 상당히 큽니다. 돈과 권력이 지배하는 듯 보이는 오늘날 세계 속에서 수많은 신앙인들이 유혹에 걸려 넘어지기 때문입니다. 무력하게 보이시는 하느님, 악이 자행되는 상황을 보고도 모른 체하시는 것만 같은 하느님을 항구하게 믿기란 쉽지 않습니다. 요한묵시록 안에 담긴 묵시주의적 메시지는 이런 우리에게 신앙의 새로운 눈과 결단력 있는 용기를 지니게 합니다. 그 메시지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다음 주부터 보도록 하겠습니다. [2017년 8월 13일 연중 제19주일 빛고을 3면, 한재호 루카 신부]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7) 묵시주의적 메시지
묵시문학이 담고 있는 신학적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세상을 살다 보면 하느님께서 무력하게 보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관점이다. 둘째,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관점과는 다르게 세상과 역사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그래서 지금 당장에는 고난과 죽음의 연속이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지상의 권력도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고, 따라서 박해도 사라지게 될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셋째, 하느님께서 지니신 관점 안에서 세상과 역사를 보면 그분이야말로 참된 주권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결정적인 때에 하느님께서는 이를 드러내실 것이고 그때가 바로 역사의 종말이 오는 때다. 물론 그때가 언제인지는 모른다. 다만 확실한 것은 주권이 하느님께 있기에 현실의 삶을 대하는 태도를 새롭게 해야 한다.
이를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한 가지 비유를 들어 보겠습니다. 말기 환자들을 돌보는 호스피스 간병인으로 일했던 브로니 웨어라는 사람은 죽어가는 사람들의 후회를 지켜보며 삶의 끝자락에 있는 사람들이 남긴 교훈을 블로그에 올렸고 이를 책으로 엮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죽을 때 가장 후회하는 5가지>를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1.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았더라면, 2. 내가 그렇게 열심히 일하지 않았더라면, 3. 내 감정을 표현할 용기가 있었더라면, 4. 친구들과 계속 연락하고 지냈더라면, 5. 나 자신에게 더 많은 행복을 허락했더라면…. 이렇게 죽을 때가 되면 살아가면서 무엇이 보다 소중한 가치이고 무엇이 덜 중요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깨달음을 가지고 건강하게 살고 있는 우리의 삶을 비추어 본다면 어떨까요? 아마도 가정의 화목을 위해 돈을 버는 것이지 돈을 벌기 위해 가정의 화목을 깨뜨리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자녀의 행복을 위해 자녀의 공부를 뒷바라지하는 것이지, 부모로서 창피를 당하지 않기 위해 자녀에게 공부하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전부처럼 느껴지는 것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고 그보다 높은 가치를 소중하게 대하는 현명함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이렇듯 미래에 대한 더 큰 통찰이 있을 때 현재를 살아가는 태도가 달라지는 것처럼 묵시주의는 하느님의 관점으로, 역사의 마지막이라는 시점으로 현재를 바라보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그러한 초대에 우리가 진지하게 임할 때 우리는 현재를 살아가는 신앙적 자세를 보다 올바르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2017년 8월 20일 연중 제20주일 빛고을 3면, 한재호 루카 신부]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8) 묵시묵학의 표현과 줄거리
묵시문학은 묵시주의를 일상적인 언어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뜻은 일상적인 언어로 담을 수 있을 만큼 평범한 것이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매우 수수께끼와 같은 표현들을 사용하는데, 그 표현들은 고대 근동의 여러 창조 신화, 그리스-로마 신화, 여러 성경적인 표현들을 이용하여 만들어집니다. 그리하여 지난달에 예를 들었던 것처럼, ‘2002년 6월, 한반도에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붉은 악마가 되어 열 한 명의 태극전사를 위해 거리를 가득 메웠다.“ 등과 같은 독특한 이미지를 형성합니다.
또한 묵시문학의 줄거리는 하나의 판타지 영화와도 비슷합니다. 줄거리 자체가 실제로 벌어질 일이 아니라, 하나의 가상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이는 묵시문학의 여러 표현들이 다양한 신화적인 이미지, 성경의 이미지를 활용하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묵시록의 이야기를 단순히 허구로만 치부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가상의 이야기를 통해서 드러나는 묵시주의적 메시지만큼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하시는 구원의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판타지 영화를 생각해 보십시오. 혹성탈출, 스타워즈, 아바타와 같은 영화는 기이한 동물들이 등장하고 우주를 배경으로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영화를 그냥 재밋거리로만 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거기에서 나오는 여러 메시지들에 귀를 기울입니다. 허구에서 나온 이야기라고 그 이야기로부터 흘러나오는 메시지를 허투루 듣지 않는 것입니다. 묵시문학, 특히 우리가 보는 요한묵시록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묵시록이 가상의 이야기라고 그냥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나오는 메시지는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 어떠한 분별을 해야 하고, 무엇을 참고 견뎌야 하며, 무엇에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이상으로 묵시문학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내용에 대한 설명을 마무리하며 콜린스(J.J. Collins)라는 학자가 내린 묵시문학에 대한 정의를 소개합니다. “묵시문학이란 서술적 틀(narrative framework)을 지닌 계시문학의 한 장르이다. 여기서 계시는 다른 세계의 중재자를 통해서 인간 수령자에게 전달되며, 종말론적 구원을 묘사하고 초월적인 세계를 다룬다.” 여기서 말하는 서술적 틀은 방금 소개한 판타지 영화와 같은 줄거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세계는 인간의 관점을 넘어선 초월적 세계를 말하는 것인데, 묵시문학은 이를 여러 신화와 성경적인 상징들을 이용하여 독특한 이미지로 표현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이러한 독특한 표현방식에 대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보겠습니다. [2017년 8월 27일 연중 제21주일 빛고을 3면, 한재호 루카 신부]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9) 요한묵시록의 독특한 표현 (1)
이번 주부터 우리는 묵시문학으로서의 요한묵시록이 지닌 독특한 표현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가장 먼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오감을 자극한다는 점입니다. 가령 예수님을 두고 ‘발까지 내려오는 긴 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 띠를 두르고 계시며, 머리와 머리털은 흰 양털처럼 또 눈처럼 희고 눈은 불꽃 같다.’고 소개합니다(1,13-14). 얼마나 시각적입니까? 이런 시각적 이미지는 하나하나 예수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말해주는 상징입니다. 긴 옷과 가슴에 금 띠를 두르고 계신다는 것은 그분이 영원한 대사제이시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고(탈출 28,4 참조), 양털과 눈처럼 흰 머리와 머리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분이 영원하신 분이라는 것을 뜻합니다(다니 7,9 참조). 불꽃 같은 눈과 놋쇠와 같은 발은 세상을 심판하시고, 악으로부터 우리를 정화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말합니다(신명 4,24; 다니 10,6 참조). 이처럼 시각적인 자극을 주면서 각각의 이미지를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 줍니다. 이런 시각적인 표현은 묵시록 전체를 덮고 있습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밤낮 쉬지 않고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를 외치고 있는 네 생물(4,8), 어린양을 두고 노래를 부르는 스물네 원로(5,9), 일곱 번의 나팔소리(8-11장), 번개와 요란한 소리와 천둥과 지진(11,19) 등 청각적인 요소들도 많습니다. 후각적인 자극도 있습니다. 향이 가득 담긴 금 대접(5,8), 하느님 앞으로 피어오르는 향 연기(8,4) 등 천상에서는 온갖 향으로 가득하며, 로마를 상징하는 대탕녀 바빌론의 금잔에는 성도들의 피가 가득하여 피 냄새가 진동합니다(17,6). 미각적인 것을 보자면, 사람들이 쓴 흰쑥을 먹는다는 표현(8,11), 파트모스의 요한이 작은 두루마리를 먹자 입에서는 달지만 배가 쓰리다는 표현(10,10), 땅의 주민들이 대탕녀 바빌론이 주는 불륜의 술에 취해있다는 표현(17,2) 등이 있습니다. 촉각적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타고 있는 횃불(4,5), 눈물을 닦아 주시는 손길(8,17ㄴ), 전갈에게 쏘였을 때와 같은 괴로움(9,5), 불이 섞인 유리 바다(15,2), 고약하고 지독한 종기(16,2) 등 아픔, 뜨거움, 따뜻함 등의 표현들이 나옵니다.
이처럼 요한묵시록을 읽다 보면 오감이 자극이 됩니다. 이러한 감각적 이미지들은 예수님에 대한 시각적 이미지를 소개하며 설명한 것처럼 각각 성경이나 신화적인 것들에서 착안하여 각각 신학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2017년 9월 3일 연중 제22주일 빛고을 3면, 한재호 루카 신부]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10) 요한묵시록의 독특한 표현 (2)
요한묵시록의 독특한 표현으로 두 번째 살펴볼 점은 온갖 종류의 상징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 천체나 자연에 관련된 상징입니다. 하늘, 별, 천둥, 번개와 같은 것들이 그러합니다. 예를 들어 하늘은 하느님의 초월성을, 구름과 연기는 하느님의 현존을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둘째, 동물과 관련된 상징입니다. 어린양은 예수 그리스도, 용은 사탄, 독수리는 메시지를 전하는 전령,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은 지중해에 패권을 차지한 로마 황제 권력을 상징하는데, 이외에도 여러 동물들이 등장합니다. 묵시록에서의 동물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존재를 묘사할 때 주로 쓰입니다.
셋재, 인간 생활과 관련된 상징들이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 혼인, 출산, 노동, 상행위, 불륜 등 인간 활동과 관련한 상징들, 또 이마, 얼굴, 머리카락, 손과 발, 옷 등 인간의 모습과 관련한 상징들 등이 그러합니다.
이외에도 붉은색, 흰색, 자주색 등 색깔과 관련된 상징이 있으며, 무엇보다도 숫자에 대한 상징이 있습니다. 7은 완전함을 상징하고, 마흔두 달(11,2; 13,5), 3년 반(12,14), 천이백육십 일(11,3; 12,6) 등 7의 절반에 해당하는 숫자는 일시적인 기간을 상징합니다. 12는 하느님의 옛 백성이나 새 백성을 상징하는데, 여기서 십사만 사천이라는 수자도 나옵니다(7,1-8; 14,1). 이 숫자는 12곱하기 12곱하기 1000으로서 첫 번째 12는 구약의 백성을, 두 번째 12는 신약의 백성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1000은 군대의 무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 숫자는 구약에서부터 예고되었고 신약에 와서 성취된 하느님의 새 백성을 상징하는데, 그 백성이 악과 싸우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숫자 3은 하느님과 관련된 상징이며, 숫자 4는 동서남북, 곧 지상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이나 예수님을 표현할 때에도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또 앞으로도 오실’(1,4.8) 분, ‘나는 알파이며 오메가이고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시작이며 마침’(22,13)이라고 하며 삼중적인 표현을 쓰고 세상의 모든 사람을 가리킬 때는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5,9 등)이라고 말하며 사중적인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와 같이 요한묵시록에 있는 이 풍성한 상징들을 일일이 헤아린다는 것은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보통 성경주석서 가운데에서 요한묵시록의 주석서가 가장 두껍습니다. 그만큼 단어 하나, 표현 하나하나에 구약성경적인 배경, 신화적 배경, 상징성 등이 담겨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2017년 9월 10일 연중 제23주일 빛고을 3면, 한재호 루카 신부]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11) 요한묵시록의 독특한 표현 (3)
지난주에 요한묵시록에 나오는 숫자가 상징성을 띠고 있다는 것을 살짝 보았습니다. 이 부분에서 보다 흥미 있는 사실을 나누고자 합니다.
우선 요한묵시록에는 ‘예수’라는 이름이 총 14번 나옵니다(1,1.2.5.9; 12,17; 14,12; 17,6; 19,10; 20,4; 22,16.20.21). 14라는 숫자는 2 곱하기 7입니다. 2는 성경에서 유효한 증언을 위한 증인들의 최소 인원수를 나타냅니다(신명 17,6). 그리고 7은 충만함을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라는 이름이 14번 나왔겠습니까? ‘예수’라는 말은 우리가 믿는 성자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셨을 때 부모로부터 받은 이름입니다. 따라서 그 이름이 14번 나왔다는 것은 교회 공동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예수]을 충만하게[7] 증거해야 한다[2]는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그리스도’라는 호칭은 총 7번 나옵니다(1,1.2.5; 11,15; 12,10; 20,4.6). 이는 역사와 종말에 있어 그리스도의 주권이 충만하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어린양’이라는 호칭은 28번 나오는데, 지상 세계를 상징하는 4와 충만함을 상징하는 7이 곱해진 숫자입니다. 곧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가 이 세상 전체에 미치고 있음을 뜻합니다. 마지막으로 ‘민족과 언어와 백성과 나라들’ 혹은 이와 비슷한 표현이 7번 나옵니다(5,9; 7,9; 10,11; 11,9; 13,7; 14,6; 17,15). 이 표현은 동의어로 볼 수 있는 단어들이 사중적으로 나온 것은 4라는 숫자가 상징하듯이 지상 세계를 가리키기 때문이고, 이 표현이 7번 등장한 것은 어린양이라는 호칭이 그러하였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이 지상 세계 전체에 미치고 있음을 뜻합니다.
오늘날에도 숫자에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령 숫자 4는 ‘죽을 사(死)’와 발음이 같다는 이유로 ‘죽음’을 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늘, 땅, 물, 불을 가리키는 건곤감리(乾坤坎離)와 연관하여 세상 전체를 뜻하는 숫자이기도 합니다. 7은 서양에서 성경의 영향을 받아 행운의 숫자로 통하고, ‘트리스카이데카포비아(Triskaidekaphobia)’라고 불리는 13은 서양 신화와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날과 연관하여 저주를 뜻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숫자가 어떤 상징성을 갖는 경우가 있는 그렇다고 해서 숫자의 의미를 미신처럼 여길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요한묵시록의 저자는 숫자가 지닌 특정한 상징성을 이용해서 신앙적 메시지를 독자들에게 전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2017년 9월 17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 이동 빛고을 3면, 한재호 루카 신부]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12) 요한묵시록의 독특한 표현 (4)
요한묵시록이 묵시문학으로서 독특한 표현을 가지고 있는데 그 가운데 마지막으로 소개할 점은 우리의 상식을 깨는 파격적인 표현들이 자주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7,14) 피로 옷을 빨았는데 어떻게 그게 흰색을 띠게 될까요?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빨갛게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상식을 깨는 표현이 과감하게 나오는 것은 성경이나 신화의 이미지를 배경으로 하여 상징성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곧 흰색이 부활을 상징하기 때문에 이 표현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부활의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다른 한 가지 예를 들어 볼까요? 17장에서 바빌론이란 도시가 대탕녀 곧 여자로 소개되고, 21장에서 새 예루살렘은 어린양의 순결한 신부로 소개됩니다. 어떻게 도시이면서 동시에 여성일 수 있을까요? 이 역시 상징성을 지닌 것입니다. 곧 바빌론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위협하는 로마 제국을 상징하고, 새 예루살렘은 박해 속에서 믿음을 잃지 않고 종말의 구원을 맞이하는 신앙 공동체를 상징합니다.
다른 예를 보겠습니다. 14장 8절과 16장 19절에 이미 바빌론이 파괴되었다고 선포됩니다. 시제 또한 과거시제를 씁니다. 그런데 정작 17장으로 가면 이미 파괴되었을 바빌론이 다시 등장합니다. 그리고 17장 16절에서는 ‘파괴될 것이다’라고 미래시제를 씁니다. 그다음에 다시 18장에 가면 바빌론이 이미 파괴된 것처럼 합니다. 줄거리의 순서상 18장에서 파괴된 것으로 보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순서 자체가 혼돈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순서와 시제가 뒤바뀌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는 과거도, 오늘도, 마래도 모두 한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파격적인 표현을 통해서 파트모스의 요한은 하느님께서 시간을 초월하신 분임을 알려줍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현재의 박해를 받는 순간이 영원한 것이 아님을 알려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요한묵시록의 다양하고도 풍부한 표현들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모든 표현들은 요한묵시록 자체가 성경과 여러 신화들의 이미지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상징적인 의미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징들은 그 시대의 역사적 상황들을 반영하면서 동시에 신학적인 메시지를 던져 줍니다. 한편으로 묵시록의 표현들을 굳이 상징적으로 담는 이유는 묵시록의 저자가 환시를 통해 체험한 것들을 인간의 언어로 온전하게 전할 수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2017년 9월 24일 연중 제25주일 빛고을 3면, 한재호 루카 신부]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13) 가상의 이야기를 통해 전해지는 성경의 진리
오늘부터 우리는 요한묵시록의 전체적인 줄거리를 살펴볼 것입니다.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가 하나의 이야기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묵시문학의 줄거리는 지난 8월에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의 판타지 영화와도 비슷합니다. 다시 말해서 줄거리 자체가 실제로 벌어질 일이 아니라, 하나의 가상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요한묵시록의 이야기를 단순히 허구로만 치부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가상의 이야기를 통해서 드러나는 묵시주의적 메시지만큼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하시는 구원의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들이 바로 이 부분에서 걸려 넘어집니다. ‘성경은 진리의 책’이기 때문에 성경 안에 묘사된 모든 이야기들은 실제로 벌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맞지 않습니다. 성경이 전하고자 하는 진리는 수학적 진리, 과학적 진리, 역사학적 진리, 의학적 진리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어떤 사람들은 성경 안에서 이러한 진리들을 찾으려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진리를 담고 있을까요? 예전에 교리를 요약해서 문답식으로 암송했던 천주교 요리문답이 있습니다. 그 문답의 첫 번째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위하여 세상에 났느뇨?”, “사람이 천주를 알아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해 세상에 났느니라.” 성경이 전하고자 하는 진리가 바로 이 첫 번째 문답과 관련됩니다. 곧 성경이 전하고자 하는 진리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분께서 우리를 어떻게 구원으로 이끄시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러한 진리를 전하기 위해 때로는 가상의 이야기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라디오 주파수를 생각해 보십시오. 광주에서 클래식 음악을 들으려면 92.3MHz에 맞추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92.3MHz에 맞추지도 않고서는 ‘왜 라디오에서 클래식 음악이 나오지 않지?’라고 따진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가 라디오에서 클래식 음악을 들을 수 없는 이유는 라디오가 고장이 났다거나 방송사가 문제가 아니라, 주파수를 잘못 맞추었기 때문입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 안에서 하느님의 목소리, 구원의 진리를 듣기 위해서는 신앙의 주파수를 맞추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과학적 주파수나 역사학적 주파수를 맞추어 놓고서 성경 안에 담긴 진리의 소리를 들으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성경을 엉터리 이야기로, 유치한 것으로 치부해 버리고 맙니다. [2017년 10월 1일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선교의 수호자) 대축일 빛고을 3면, 한재호 루카 신부]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14) 요한묵시록의 줄거리
요한묵시록은 22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가운데 1-3장에서 서론의 역할을 하고, 4-22장이 본격적인 가상적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15) 요한묵시록 4-22장의 구도
지난주에 살펴본 요한묵시록의 줄거리에 나온 커다란 구도를 그림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 삼위일체인 것처럼, 악의 세력도 삼중적으로 등장하며 삼위일체 하느님을 모방합니다. 이는 그들이 마치 하느님 행세를 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보면 성자께서 성부의 뜻을 받아 세상을 구원하시는 것과 바다짐승이 용에게 권세를 받아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대조를 이룹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사람들로 하여금 성자를 따르게 하고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도록 이끄는 것과 땅의 짐승이 바다짐승을 신처럼 떠받들게 하여 사탄의 영향력 아래에 두게 하는 것이 대조가 됩니다. 하느님을 따르는 세력은 지상에서는 14만 4000명으로, 천상에는 수없는 무리들로 표현되는데, 이들과 땅의 임금들, 땅의 주민들이 대조를 이룹니다. 마지막으로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의 도시가 순결한 처녀 새 예루살렘인데 반해, 악의 제국도시는 대탕녀 바빌론이 됩니다. [2017년 10월 15일 연중 제28주일(군인주일) 빛고을 3면, 한재호 루카 신부]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16) 요한묵시록의 역사적 배경 ① 로마제국과 유배상황
악의 제국도시로 표현되는 ‘대탕녀 바빌론’은 17장에서 다음과 같이 소개가 됩니다. “그 천사는 성령께 사로잡힌 나를 광야로 데리고 갔습니다. 나는 진홍색 짐승을 탄 여자를 보았습니다. 그 짐승의 몸에는 하느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가득한데, 머리가 일곱이고 뿔이 열이었습니다.”(17,3) 이 구절에서 소개된 여자가 바로 대탕녀 바빌론인데, 그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암시하는 대목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일곱 머리는 그 여자가 타고 앉은 일곱 산이며 또 일곱 임금이다.”(17,9ㄴ)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17) 요한묵시록의 역사적 배경 ② 로마제국주의
당시 로마 제국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아는 것은 요한묵시록을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됩니다. 그 면모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저마다 대접을 가진 그 일곱 천사 가운데 하나가 나에게 와서 말하였습니다. ‘이리 오너라. 큰 물 곁에 앉아 있는 대탕녀에게 내릴 심판을 너에게 보여 주겠다. 땅의 임금들이 그 여자와 불륜을 저지르고, 땅의 주민들이 그 여자의 불륜의 술에 취하였다.’ 그 천사는 성령께 사로잡힌 나를 광야로 데리고 갔습니다. 나는 진홍색 짐승을 탕 여자를 보았습니다. 그 짐승의 몸에는 하느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가득한데, 머리가 일곱이고 뿔이 열이었습니다. 그 여자는 자주색과 진홍색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치장하였습니다. 손에는 자기가 저지른 불륜의 그 역겹고 더러운 것이 가득 담긴 금잔을 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마에는 ‘땅의 탕녀들과 역겨운 것들의 어미, 대바빌론’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의 신비였습니다.”(17,1-5)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18) 요한묵시록의 역사적 배경 ③ 박해상황
요한묵시록의 내용을 보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박해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대목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형제로서,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과 더불어 환난을 겪고 그분의 나라에 같이 참여하며 함께 인내하는 나 요한은,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에 대한 증언 때문에 파트모스라는 섬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1,9)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에 대한 증언 때문에 파트모스라는 섬에서 지내고 있다.’는 표현에서 학자들은 요한묵시록의 저자가 신앙을 지켜가는 가운데 파트모스라는 섬으로 유배를 당한 것이라고 봅니다(파트모스 섬은 요한묵시록의 배경인 소아시아 곧 오늘날 터키의 서쪽 바다인 에게해에 있는 조그마한 섬입니다). 또 한 가지 여기서 살펴 볼 점은 ‘여러분과 더불어 환난을 겪고’라는 표현입니다. 이를 보면 요한묵시록의 저자뿐 아니라 소아시아의 여러 신자들이 박해를 당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19) 요한묵시록의 역사적 배경 ④ 우상숭배
지난주에 우리는 요한묵시록이 집필된 당시에 박해가 있었음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박해가 있었던 원인은 무엇일까요? 요한묵시록에서 알아볼 수 있는 첫 번째 원인은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그 본문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재앙으로 죽임을 당하지 않은 나머지 사람들도 저희 손으로 만든 작품들을 단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마귀들을 숭배하고, 또 보지도 듣지도 걸어 다니지도 못하는, 금이나 은이나 구리나 돌이나 나무로 만든 우상들을 숭배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9,20) “비겁한 자들과 불충한 자들, 역겨운 것으로 자신을 더럽히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불륜을 저지르는 자들, 마술쟁이들과 우상숭배자들, 그리고 모든 거짓말쟁이들이 차지할 몫은 불과 유황이 타오르는 못뿐이다. 이것이 두 번째 죽음이다.”(21,8) “개들과 마술쟁이들, 불륜을 저지르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 그리고 거짓을 좋아하여 일삼는 자들은 밖에 남아 있어야 한다.”(22,15)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20) 요한묵시록의 역사적 배경 ⑤ 황제숭배
우상숭배보다도 박해에 보다 직접적인 원인으로 황제숭배를 꼽을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된 본문이 13장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나는 또 바다에서 짐승 하나가 올라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짐승은 뿔이 열이고 머리가 일곱이었으며, 열 개의 뿔에는 모두 작은 관을 쓰고 있었고 머리마다 하느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붙어 있었습니다.”(13,1)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은 17장에서 대창녀 바빌론이 타고 있는 바로 그 짐승으로서 황제권력을 상징합니다. “그 짐승은 입을 열어 하느님을 모독하였습니다. 그분의 이름과 그분의 거처와 하늘에 거처하는 이들을 모독하였습니다. 그 짐승에게는 또 성도들과 싸워 이기는 것이 허락되었고, 모든 종족과 백성과 언어와 민족을 다스리는 권한이 주어졌습니다.”(13,7) 모든 종족과 백성과 언어와 민족을 다스리는 권한이 있다는 것에서 이 짐승이 황제권력을 상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그 짐승이 하느님을 모독할 뿐 아니라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과 싸워 이기는 것이 허락된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황제숭배를 하지 않는 이들을 박해하였음을 보여줍니다.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21) 요한묵시록의 역사적 배경 결론 :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대
이번 한 달 동안 살펴본 내용을 모두 종합하면 결론적으로 묵시록의 역사적 배경을 “로마 제국 치하에서의 박해 상황”이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는 도미티아누스 황제 통치 말엽(81-96년)에 가장 적합합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황제숭배를 법적으로 강화하였고, 자신을 “주님이며 하느님(dominus et deus)”이라고 부르게 했습니다. 또 그는 화폐에 자신의 아들 모습을 새겼는데, 이미 73년에 어린아이로 죽은 그 아들을 신의 아들로, 신적인 세계 지배자로 묘사하였습니다. 그리고 85년에서 96년에 만들어진 화폐들은 도미티아누스를 주피터(그리스식으로는 제우스)와 같은 자세로 묘사하였습니다. 특히 묵시록의 일곱 교회가 있던 도시에서는 황제숭배가 매우 성행하여, 거의 모든 마을에 황제를 위한 제단, 신전, 사제단이 있었습니다. 묵시록의 주요 배경인 에페소의 경우를 보면 도미티아누스 황제 말기에 도미티아누스 황제와 그의 가족들, 곧 플라비우스 왕조를 위한 황제 신전을 건설하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이를 배경으로 볼 때 황제숭배에 참여하지 않은 신앙인들은 불이익뿐 아니라, 실질적인 박해를 받았을 것입니다.
물론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에 직접적인 박해가 있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국가에 의한 박해는 64년 네로 황제에 의한 것이었고 그것은 로마 시내에 국한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학자들은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에 소아시아에서는 실질적인 박해가 크고 작게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 신자였던 사촌 클레멘스를 처형하고 그 아내인 도미틸라는 유배시켰기 때문입니다. 또 소아시아의 각 도시는 ‘네오코로스(신전관리인)’라는 칭호를 받으려고 하였는데, 이는 로마 황제 권력에 편승하여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해 각 도시들이 노력을 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소아시아 지역에서는 박해들이 지역 자체적으로 일어났었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요한 묵시록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 쓰인 책입니다. 점차 심해지는 박해로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기 시작하고 신앙적인 위협을 느끼는 상황에서 신자들은 하느님이 도대체 계시는지, 하느님이 계시다면 왜 이러한 상황을 그대로 보고만 계시는지 물음을 던졌던 것입니다. [2017년 11월 26일 그리스도왕 대축일(성서 주간) 빛고을 3면, 한재호 루카 신부]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22) 로마제국의 베일을 벗긴 요한묵시록
어렸을 때 <전설의 고향>이라는 프로그램에서 구미호의 이야기를 본 적이 있습니다. 구미호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아름다운 여인이지만 실제는 꼬리가 아홉 개 달린 여우입니다. 한 마디로 요괴인 셈입니다. 그러나 베일을 벗기기 전까지는 그 정체를 알 수가 없어서 많은 남자들이 구미호에게 넘어가기가 십상입니다. 요한묵시록이 집필된 그 시대의 로마제국이 마치 구미호와 같습니다. 당시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 로마 황제는 신으로 숭배해야 할 대상이었고, ‘로마의 평화(팍스 로마나)!’라는 구호에는 사실상 로마의 군사력과 경제력에 복종하지 않으면 멸망당한다는 의식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나라는 보다 친로마적이지 않으면 안 될 만큼 로마는 강했고, 그 위력은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런데 파트모스의 요한은 이러한 로마의 겉모습에 현혹되지 말라고 전합니다. 세상의 진정한 주권은 로마 황제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또 로마의 평화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평화(팍스 크리스티아나)!’가 우리가 외쳐야 할 구호라고 전합니다. 그리하여 로마의 군사력과 경제력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분께서 보여주신 희생적인 사랑에 순종하라고 권고합니다. 이러한 삶은 잠시 시련을 주고 심지어 죽음까지도 감수해야 할 테지만, 결국 하느님께서 최종적인 승리를 일으키시는 분임을 잊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로마의 친구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형제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요한묵시록이 당시 독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메시지입니다. 이를 「제국의 베일을 벗기다 : 그때와 지금의 요한묵시록 읽기(Unveiling Empire Reading Revelation Then and Now)」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요한묵시록을 읽을 때는 로마 제국의 본질을 꿰뚫고 끈기 있게 신앙을 지킨다는 메시지가 그렇게 와 닿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독자들에게는 엄청난 위로와 용기를 주는 메시지였던 것입니다. [2017년 12월 3일 대림 제1주일 빛고을 3면, 한재호 루카 신부]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23) 오늘날의 로마제국
지난주에 우리는 요한묵시록이 당시 로마 제국의 베일을 벗겼다는 사실을 보았습니다. 겉으로는 화려하고 강력하고 절대적으로 보이는 로마 제국도 결국에는 역사 속에서 사라질 거품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한 제국의 본질을 깨닫지 못한다면 영영 제국의 노예살이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될 뿐입니다. 구미호에게 현혹되어 결국 그 요괴에게 잡아먹히는 신세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는 또 다른 로마제국이 없을까요? 예를 들어 한 가지를 말한다면 바로 돈입니다. 과연 돈이 세상을 다스리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돈으로 안 되는 것이 없어 보입니다. 지갑에 돈이 두둑하면 거리에 나가도 어깨를 펼 수 있습니다. 통장 잔고가 가득하면 걱정거리가 다 사라집니다. 거리거리에는 온갖 광고물들이 가득한데, 그것들은 마치 ‘행복은 이 아파트를 사야만 오는 거야.’, ‘행복은 이 옷을 입어야만 오는 거야.’, ‘이런 전자 제품도 없는 너희들은 불행해.’ 하고 속삭이는 것만 같습니다. 말 그대로 ‘돈의 평화’를 부르짖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재물을 축적하기 위해 사람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자본주의의 논리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경쟁 사회의 구도 속에서 다른 사람을 짓밟고 올라가야만 돈을 모을 수 있다고 여기게 되고, 자기 가족을 위해 돈을 벌려면 가끔씩은 거짓말로 다른 사람을 속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잘 먹고 잘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하느님도, 가족들과의 시간도, 개인의 건강도 챙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고선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합니다. 어려운 사람을 보더라도 우선은 나 자신부터, 우리 가족부터 챙겨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요한묵시록은 새로운 로마제국인 물신의 세계를 경계하도록 우리를 이끕니다. 로마제국이 영원할 수 없는 것처럼 돈 역시 영원할 수 없습니다. 돈이 있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생계에 큰 지장이 없는 정도의 살림이라면 충분히 행복할 수 있습니다. 아니, 당장 먹고 살길이 막막한 이들에게 우리의 재물을 나누어 준다면 그것이 더 큰 행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결국 하늘에 재물을 쌓는 길이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정배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입니다. 돈으로부터 자유롭게 산다는 것은 다소 불편함을 줄 수 있고 인내를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또 다른 의미로 박해를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물신에 대항하여 싸우시고 계시며 반드시 승리하실 것임을 요한묵시록을 통해서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2017년 12월 10일 대림 2주일(인권주일 · 사회 교리 주간) 빛고을 3면, 한재호 루카 신부]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24) 네 개의 환시 ①
요한묵시록은 1장 2절에서도 나와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환시를 통해서 전달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요한묵시록의 큰 틀이 나오는데,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네 개의 환시는 각각 그 서두에 공통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어느 주일에 나는 성령께 사로잡혀 내 뒤에서 나팔 소리처럼 울리는 큰 목소리르 들었습니다.”(첫째 환시 1,10)
“내가 보니 하늘에 문이 하나 열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처음에 들었던 그 목소리…가, ‘이리 올라오너라. 이다음에 일어나야 할 일들을 너에게 보여주겠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나는 곧바로 성령께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둘째 환시 4,1-2)
“대접을 가진 그 일곱 천사 가운데 하나가 나에게 와서 말하였습니다. ‘이리 오너라. 큰 물 곁에 앉아 있는 대탕녀에게 내릴 심판을 너에게 보여주겠다. …’ 그 천사는 성령께 사로잡힌 나를 광야로 데리고 갔습니다.”(셋째 환시 17,1-2)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가운데 하나가 나에게 와서 말하였습니다. ‘이리 오너라. 어린양의 아내가 될 신부를 너에게 보여주겠다.’ 이어서 그 천사는 성령께 사로잡힌 나를 크고 높은 산 위로 데리고 가서는…”(넷째 환시 21,9-10)
이렇듯 요한묵시록은 파트모스의 요한이 환시를 통해 본 것들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데 환시를 보자마자 바로 이 책을 기록했다고 보기에는 요한묵시록은 너무 정교한 구조와 문학적인 표현 기법이 동원되어 있고, 환시를 통해서 본 이미지들이 성경과 신화의 내용을 풍부하게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요한이 환시를 보고 난 뒤에 오랫동안 묵상하고 정리해서 기록한 것으로 봅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생각해 볼 점은 ‘성령께 사로잡힌’ 상태에서 환시를 보았다는 점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017년 12월 17일 대림 제3주일(자선 주일) 빛고을 3면, 한재호 루카 신부]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25) 네 개의 환시 ②
성령께 사로잡힌 상태에서 요한은 네 차례 환시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환시의 체험을 오랜 기간 동안 숙고하고 그 내용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자신의 문학적 역량을 다해서 묵시록을 집필하였습니다. 학자들은 ‘성령께 사로잡힌’ 상태가 일종의 황홀경의 상태였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실제로 에제키엘 예언자는 성령에 의해 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여 환시를 봅니다(에제 3,12.14; 8,3; 11,1.24; 37,1; 43,5).
사람들은 이러한 황홀경이 도대체 어떤 상태인지 매우 궁금해 합니다. 그런데 정작 파트모스의 요한은 그러한 상태에 대해 자세하게 묘사하지 않습니다. 황홀경의 상태 자체에 그다지 관심이 없던 것입니다. 이는 요한묵시록이 집필된 이후에 작성된 「이사야 승천기」라는 작품과 비교해 볼 때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사람들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성령으로 일하던 중에 입을 다물었으며 정신을 잃었다. 그는 자신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없었다. 그의 눈은 열려 있으나 그의 입은 다물었다. 그리고 그의 몸으로부터 정신은 떠나 있었다. 그러나 그가 환시를 보고 있었기 때문에 여전히 숨을 쉬고 있었다. (중략) 그가 본 환시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육체로부터 감추어진 세상에 속한 것이다.”(6,10-16) 「이사야 승천기」는 황홀경의 상태를 성령에 의해 유체이탈이 되고 영혼만 다른 곳으로 옮겨진 것으로 자세히 묘사합니다. 이에 비해 요한묵시록은 그저 ‘성령께 사로잡혀’라는 표현만이 나올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파트모스의 요한에게 있어 황홀경의 상태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환시를 통해 깨달은 하느님의 진정한 모습, 베일을 벗겨서 본 로마 제국의 실체에 비하면 그 체험 자체는 일일이 묘사할 정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요한이 ‘성령께 사로잡혀’라는 말을 굳이 한 이유가 있습니다. 환시를 통해서 자신의 전하는 바는 일종의 예언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사람들에게 환시라는 놀라운 체험을 자랑하고 싶어서 묵시록을 쓴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당시 사람들이 로마 제국 치하에서 어떻게 살아가길 원하시는지를 알려주기 위해서 묵시록을 쓴 것임을 밝히기 위해 ‘성령께 사로잡혀’라는 표현을 네 번이나 사용한 것입니다. [2017년 12월 24일 대림 제4주일 빛고을 3면, 한재호 루카 신부]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26) 요한묵시록에서의 성령 : 예언의 영
지난주에 저는 ‘성령께 사로잡혀’라는 표현을 통해 파트모스의 요한이 환시를 통해서 자신이 전하는 내용이 일종의 예언임을 강조하고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느님의 영을 받는 것과 예언 활동을 하는 것이 긴밀히 연관된 구절들을 볼 수가 잇습니다. 광야에서 일흔 명의 원로들이 영을 받아 예언을 하였고(민수 11,24-30), 발라암이라는 예언자 역시 주님의 영을 받아서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예언을 합니다(민수 24,2).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인 사울 역시 영을 받자 황홀경에 빠져 예언을 합니다(1사무 10,10). 이처럼 성령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언할 수 있는 힘을 불어 넣어 주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언’이라는 말에 대해 설명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예언을 미래에 벌어질 일에 대해 예고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한 의미의 예언은 한자로 ‘豫言’이라고 하는데, 성경에서의 예언은 이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성경에서의 예언은 ‘예금하다’라는 말에 나오는 ‘예(預)’를 사용합니다. 곧 豫言이 아니라, 預言인 것입니다. 그러니깐 성경에서의 예언은 우리가 은행에 돈을 맡기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그 누군가에게 말씀을 맡기셔서 그것을 선포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미래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과거에 대한 것일 수도 잇고, 현재와 관련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성경의 예언을 두고 성경 시대 이후 먼 미래에 벌어질 일을 미리 알려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입니다.
어쨌든 요한묵시록에서는 성령께서 다른 무엇보다도 예언하시는 영, 혹은 예언의 힘을 불어넣어 주시는 영으로 묘사를 합니다. 우선 묵시록에서 ‘성령’이라는 말이 열네 번 나오는데, 이는 성령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증언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숫자 ‘2’와 그 행위가 충만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숫자 ‘7’이 결합된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 자체는 증언 곧 예언을 하는 영인 것입니다. 또 요한묵시록의 직접적인 독자인 일곱 교회 각각에게 “귀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라고 말하는 내용이 나오는데(2,7.11.17.29; 3,6.13.22) 이 역시 성령께서 예언 활동을 하심을 보여줍니다. 19장 10절에서는 아예 ‘예언의 영’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그 외에도 또 다른 곳에서는 성령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응답하는 장면이 나오는데(14,13; 22,17), 이 역시 하느님의 말씀이 보다 효과적으로 선포되는 역할을 합니다.
성령의 역할이 ‘예언’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사도들이 성령을 받아 말을 하게 되는데, 사람들이 각자 자기네 지방 말로 알아듣습니다. 그리고 삼천 명이 세례를 받습니다(사도 2,1-41). 우리는 모두 성령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파트모스의 요한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다른 이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반드시 황홀경의 체험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성령께서는 교회의 여러 활동을 통해서, 일상의 삶을 통해서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도록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2017년 12월 31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가정 성화 주간) 빛고을 3면, 한재호 루카 신부]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27) 첫째 환시 ① 그리스도의 현현과 일곱 교회에 보내는 메시지(1,9-3,22)
첫째 환시는 예수님께서 파트모스에서 유배살이를 하고 있는 요한에게 나타난 장면(1,9-20)과 그리스도께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각각 같은 형식의 메시지를 전하는 내용(2-3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이 가운데 첫째 장면에서 몇 가지를 설명하겠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환시로 나타나시긴 했지만 정작 본문에는 ‘그리스도’라는 단어도, ‘예수’라는 단어도 없습니다. 심지어는 22장 9절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을 두고 ‘예수님’이라고 묘사된 부분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이는 요한이 환시를 통해서 바라본 예수님의 모습이 ‘예수님’이란 단어로, ‘그리스도’란 단어로만 말할 수 없을 만큼 신비롭기에 그러한 것입니다. 물론 ‘예수’라는 성자의 이름과 ‘그리스도’라는 성자의 호칭이 성자를 부르는 데에 모자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뜻이 우리 인간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얼마나 신비롭고, 오묘하고, 깊고, 큰지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요한은 환시 속에서 예수님을 ‘사람의 아들 같으신 분’(1,13), ‘어린양’(4,6 등), ‘흰 말을 타신 분’(19,11-14)으로 묘사합니다. 어느 한 가지로 일관되게 묘사할 수 없으며 말로는 표현할 수 없기에 이렇게 다양한 호칭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첫째 환시의 경우에는 ‘사람의 아들 같으신 분’으로 묘사됩니다.
한 가지 더 생각할 점은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나타나셨을 때 드러난 모습이 다소 기이하게 여기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령 1장 16절을 보겠습니다. “(그분께서는) 오른손에는 일곱 별을 쥐고 계셨으며 입에서는 날카로운 쌍날칼이 나왔습니다. 또 그분의 얼굴은 한낮의 태양처럼 빛났습니다.” 실제 어떤 사람의 손에 행성 일곱 개가 있고, 또 사람 입에서 칼이 마구 쏟아져 나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러한 묘사를 두고 실제 모습으로 생각하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이는 사실 성경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신학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일곱 별을 쥔 손이라는 말은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의 참 주인으로서 그 교회들을 보호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1,20 참조). 또 7이라는 숫자가 완전함을 상징하기에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뿐 아니라, 모든 교회의 주인이시며 보호자이심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입에서 쌍날칼이 나온다는 것은 이사야서 11장 4절을 반영한 것으로, 말씀으로 악을 제거하여 정화하시는 분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이사 49,2; 히브 4,12 참조). 마지막으로 얼굴이 한낮의 태양처럼 빛이 났다는 표현은 다니엘서 10장 6절의 내용을 배경으로 하는 데(판관 5,31 참조),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전사이심을 드러냅니다. [2018년 1월 7일 주님 공현 대축일 빛고을 3면, 한재호 루카 신부]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28) 첫째 환시 ② 그리스도의 현현과 일곱 교회에 보내는 메시지(1,9-3,22)
첫째 환시는 예수님께서 파트모스에서 유배살이를 하고 있는 요한에게 나타나셔서 일곱 교회에 메시지를 보내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일곱 교회는 모두 소아시아 지역에 해당합니다. 더 상세하게 말씀드리자면,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도시인 에페소를 중심으로 하여 시계 반대 방향으로 스미르나, 페르가몬, 티아티라, 사르디스, 필라델피아, 라오디케이아 순서로 말씀이 전해집니다.
각 교회는 크고 작은 신앙의 위협과 유혹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교회는 그러한 것들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어떤 교회는 이겨나가기도 합니다. 어떤 교회는 잘 이겨나가지만 아직 충분하지 못한 태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편지들은 그러한 상황에 맞추어 신앙적인 훈계와 격려가 담겨 있습니다. 이렇게 특정 교회들을 향해 편지를 썼다는 점은 요한묵시록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기준이 됩니다. 어떤 이들은 요한묵시록이 요한이 집필한 그 시대와 무관하다고 여기며 오늘날의 사건과 연결시키는 이들이 있는데, 일곱 교회에 보내는 메시지만 보더라도 요한묵시록의 가장 직접적인 독자는 매우 구체적인 상황 속에 있는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생각해 볼 점은 일곱 이라는 숫자입니다. 각 편지들은 구체적인 특정 교회 공동체에 보낸 것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충만함’을 나타내는 7이라는 숫자를 통해서 모든 교회를 향해 메시지를 던지고 있습니다. 곧 묵시록의 일차적인 독자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신자들이지만, 이차적인 독자는 묵시록을 읽고 있는 모든 신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가 겪고 있던 신앙적인 문제들은 비단 그곳만의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삶도 일곱 교회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한 줄기 빛이 프리즘을 통해서 빨, 주, 노, 초, 파, 남, 보의 일곱 가지 색깔로 펼쳐지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신자들 가운데는 가난한 이들도 있고 부유한 이들도 있습니다. 또 훌륭한 신앙을 지닌 이들이 있는가 하면 유혹에 넘어가는 이들도 있습니다. 일곱 교회의 다양한 상황들은 이러한 신자들의 다양한 모습들을 저마다 담고 있습니다. 이렇게 파트모스의 요한은 구체적인 일곱 교회를 향한 메시지를 전하면서도 동시에 7이라는 숫자를 통해서 우리 각자가 ‘우리 공동체에 보낸 메시지’로 알아듣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점은 일곱 교회에 보내는 메시지가 전부 동일한 형식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학자들은 이 형식을 면밀히 살펴본 결과 황제의 칙령과 비슷하면서 구약의 예언 신탁과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이는 일곱 메시지가 그리스도께서 로마 황제를 넘어서는 온 세상의 참 임금이시며 하느님 아버지의 권능을 지니신 분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2018년 1월 14일 연중 제2주일 빛고을 3면, 한재호 루카 신부]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29) 둘째 환시 - 역사 안에서 벌어지는 하느님의 심판(4,1-16,21)
둘째 환시의 내용은 요한묵시록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것으로 가장 복잡하고 어렵습니다. 그 내용을 도표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가) 7개의 봉인된 두루마리를 펼치시며 심판과 구원을 선포하시는 어린양(4,1-8,1) (나) 7개의 나팔을 통해 우상숭배로부터 회개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개입(8,6-11,19) (다) 새로운 우상인 바다짐승의 출현과 심판 예고(12,1-14,20) (라) 7개의 대접을 통해 짐승숭배로부터 회개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개입(15,1-16,21)
둘째 환시는 첫째 환시와 환경 자체가 다릅니다. 첫째 환시는 요한이 있던 파트모스를 배경으로 합니다. 그런데 둘째 환시부터 요한은 더 이상 섬에 있지 않습니다. 하늘에 문이 하나 열리고 하늘로 올라가 환시를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환시를 보는 환경 자체가 달라지면서 예수님에 대한 묘사 자체도 달라집니다. 첫째 한시는 예수님을 ‘사람의 아들 같은 분’이라고 전한 반면, 둘째 환시에서는 예수님에 대해 ‘어린양’으로 묘사합니다. 곧 첫째 환시에서는 지상에서 보는 관점 그대로 예수님이 사람의 모습이지만, 둘째 환시에서는 동물의 모습을 지닌 것입니다. 그러니 둘째 환시부터 이른바 판타지 영화와 같이 새로운 이미지가 나옵니다. 교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첫째 환시에서는 일곱 교회가 나오고 각각의 교회는 신앙적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잘못도 저지르고 유혹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둘째 환시에서는 더 이상 일곱 교회가 나오지 않고 교회 전체를 숫자와 이미지를 통해서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교회는 신앙적으로 매우 이상적인 모습을 갖춘 것으로 묘사됩니다. 요컨대 첫째 환시와는 다르게 둘째 환시는 지상적인 관점이 아니라, 천상적인 관점에서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묘사합니다.
이러한 환경과 관점의 변화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를 들어 우물 안에 개구리를 생각해 봅시다. 그는 바다가 있다는 것도 모르고, 드넓은 땅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우물 안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물 밖에서 개구리를 본 사람들은 그가 얼마나 좁은 세계 안에 갇혀 있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지상적인 관점과 천상적인 관점이 바로 이렇게 차이가 큽니다. 이 세상 안에서는 하느님을 믿는 것이 너무나 미약하게 보이지만 하늘에서는 가장 위대한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고, 이 세상 안에서는 지상 권력의 힘이 너무나 커 보이지만 하늘에서는 썩어 없어져 버릴 허무한 것임이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파트모스의 요한은 이런 새로운 관점에서 세상과 역사를 바라보도록 하늘에 초대를 받은 것입니다. [2018년 1월 21일 연중 제3주일 빛고을 3면, 한재호 루카 신부]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30) 둘째 환시의 봉인 시리즈(4,1-8,1)
첫째 환시가 일곱 교회에 보내는 메시지를 주 내용으로 하면서 숫자 ‘7’이 하나의 시리즈를 만든 것처럼, 둘째 환시에서도 숫자 ‘7’이 시리즈를 형성합니다. 모두 세 번 나오는데,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 일곱 번 봉인된 두루마리를 펼치는 것이 첫 번째이고, 일곱 개의 나팔을 천사가 부는 것이 두 번째이며, 일곱 개의 대접을 하늘에서 땅으로 쏟는 것이 세 번째입니다. 이를 각각 봉인 시리즈, 나팔 시리즈, 대접 시리즈라고 부르는데, 오늘은 그 가운데에서 봉인 시리즈의 내용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묵시록 4-5장을 보면 천상의 어좌가 나오고 어좌에 계신 하느님께서 일곱 개의 봉인된 두루마리를 손에 쥐고 계십니다. 본디 편지의 주인만이 그 편지를 뜯을 수 있는 것처럼, 봉인된 두루마리 역시 아무나 뜯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자 천상에서는 드디어 두루마리를 뜯을 수 있다고 환호합니다. 그리하여 어린양께서 그 두루마리를 펼치는 장면이 묵시록 6-7장에 소개가 됩니다. 처음 네 봉인을 뜯으실 때마다 말을 탄 이가 차례로 등장하는데, 그들은 승리의 재앙을 선포하는 이들이었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무한한 권능을 지니신 분으로서 언제든지 승리하실 수 있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다섯 째 봉인을 뜯으시자 순교자들이 하느님께 “언제까지 피의 복수를 미루실 것”이냐고 탄원을 합니다. 이 탄원에 대해 하느님께서는 순교자들의 수가 찰 때까지 조금 기다리라는 분부를 하십니다. 그러고 나서 어린양이 여섯 째 봉인을 뜯으시자 하느님의 종말의 날이 선포됩니다. 곧 순교자들의 수가 다 차면 종말의 날이 올 것임을 알리신 것입니다.
마지막 일곱 째 봉인을 뜯으시기 전에 두 장면이 잠깐 나오는데, 첫 번째는 14만 4000명이 하느님으로부터 인장을 받는 장면과 셀 수 없는 무리들이 이를 보고 환호하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14만 4000명은 순교를 무릅쓰고 믿음을 증거해야 하는 지상교회를 상징하고, 셀 수 없는 무리들은 천상교회를 상징합니다. 곧 종말의 날이 닥치기에 앞서 지상교회가 악과 맞서 싸워야 하는데, 하느님께서 그들의 이마에 인장을 새기심으로써 그들의 믿음을 지켜주시겠다는 내용인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곱 째 봉인을 어린양이 뜯으시자 반 시간 동안 침묵이 흐릅니다. 이는 두루마리가 펼쳐지며 선포된 종말의 날에 대한 예고를 모두가 침묵 속에서 새기라는 초대입니다.
요컨대 묵시록 4,1-8,1에 소개된 봉인 시리즈는 지상에서 박해를 받고 있는 교회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종말의 날을 선포하십니다. 그러나 종말의 날은 바로 오는 것이 아니라, 계속되는 박해 속에서도 순교를 무릅쓰고 증언 활동을 끝까지 한 후에 오게 될 것입니다. [2018년 1월 28일 연중 제4주일(해외 원조 주일) 빛고을 3면, 한재호 루카 신부]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31) 둘째 환시의 나팔 시리즈 ① (8,2-11,19)
봉인 시리즈(4,1-8,1)가 지상에서 박해를 받고 있는 교회를 향한 하느님의 응답이 선포된 것이라면, 나팔 시리즈는 그러한 응답에 따른 하느님의 심판을 다루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악인들을 향해 무조건적인 징벌을 내리시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나팔 시리즈에서는 일련의 재앙들이 나오는데, 이 재앙들은 하나의 분명한 목적을 지니고 있습니다. 곧 순교자들의 죽음에 대한 복수가 아니라 악인들의 회개가 그 목적인 것입니다. 이를 잘 드러내는 표현이 각각의 재앙 때마다 등장하는 ‘3분의 1’이라는 숫자입니다. 이 숫자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에제키엘서 5장 2절, 그리고 12절을 보아야 합니다. 거기에도 ‘3분의 1’이라는 숫자가 나옵니다. 또 즈카르야서 13장 8절에서 9절에도 나옵니다. 에제키엘서와 즈카르야서의 내용 모두 심판에 관한 것인데, 이 심판은 회개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니 ‘3분의 1’이라는 숫자를 통해서 요한묵시록의 저자는 이 재앙들이 회개를 위한 하느님의 심판임을 드러냅니다. 다섯 번째 재앙에서 나오는 다섯 달이라는 표현 역시 같은 이치입니다. 곧 영원한 재앙이 아니라, 일시적인 재앙을 통해 사람들이 회개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둘째, 회개를 위한 심판이라면 무엇에 대한 회개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단순히 도덕적인 죄를 지은 것에 대한 심판이 아닙니다. 보다 구체적인 내용이 있는데,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구절이 여섯 번째 나팔로 이어진 재앙의 장면입니다. “이 재앙으로 죽임을 당하지 않은 나머지 사람들도 저희 손으로 만든 작품들을 단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마귀들을 숭배하고, 또 보지도 듣지도 걸어 다니지도 못하는, 금이나 은이나 구리나 돌이나 나무로 만든 우상들을 숭배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또한 자기들이 저지른 살인과 마술과 불륜과 도둑질을 회개하지도 않았습니다.”(9,20-21) 이 구절을 보면 ‘회개’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곧 갖가지 재앙들은 회개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에 대한 회개냐면 바로 마귀들을 숭배하고, 우상들을 숭배하는 것, 그것으로 말미암아 저지르게 되는 살인과 마술과 불륜과 도둑질에 대한 회개인 것입니다.
이처럼 나팔 시리즈를 통해 회개를 위한 심판이 벌어지기는 했는데,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방금 읽은 구절이 그것을 알려줍니다. 사람들이 이러한 재앙들이 있었음에도 전혀 회개를 하지 않습니다. [2018년 2월 4일 연중 제5주일 빛고을 3면, 한재호 루카 신부]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32) 둘째 환시의 나팔 시리즈 ② (8,2-11,19)
나팔 시리즈에서 특히 눈여겨볼 점은 이 시리즈에 나오는 재앙들이 탈출기에 나오는 열 가지 재앙들을 연상시킨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도표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파트모스의 요한은 갖가지 재앙들을 탈출기의 재앙들과 연관시키면서 이 재앙들이 지닌 뜻을 되새기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뜻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먼저 탈출기에서의 재앙이 담긴 의미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파라오를 세상을 다스리는 임금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파라오의 말을 들으면 평화를 얻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고통과 죽음을 면치 못했던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집트에 살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파라오를 하느님과 같은 존재로 여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세는 바로 이 점을 바로 자고 싶어 했습니다. 세상의 참 임금, 참된 주인은 파라오가 아니라 하느님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열 가지 재앙을 보여줍니다. 파라오 스스로 세상의 참 임금, 참된 주인은 자기가 아니라, 하느님이심을 인정하게 하는 것입니다. 나팔 시리즈의 재앙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참된 통치는 우상이 아니라, 하느님에 의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나팔 소리와 함께 재앙을 불러일으키시며 이를 알려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여섯 번째 나팔까지 벌어진 일입니다. [2018년 2월 11일 연중 제6주일(세계 병자의 날) 빛고을 3면, 한재호 루카 신부]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33) 둘째 환시의 나팔 시리즈와 요한의 재소명(10,1-11)
나팔 시리즈의 마지막 부분을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습니다.
여섯 번의 나팔 소리를 통한 심판에도 사람들은 우상숭배로부터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일곱째 나팔 소리가 당연히 나와야 하는데, 봉인 시리즈에서처럼 그 전에 두 가지 이야기가 삽입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번에 삽입된 내용은 무엇일까요?
첫 번째는 요한이 다시 소명을 받는 이야기입니다. “하늘에서 들려온 그 목소리가 다시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가서 바다와 땅을 디디고 서 있는 그 천사의 손에 펼쳐진 두루마리를 받아라.’ 그래서 내가 그 천사에게 가서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고 하자, 그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이것을 받아 삼켜라. 이것이 네 배를 쓰리게 하겠지만 입에는 꿀같이 달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 삼켰습니다. 과연 그것이 입에는 꿀같이 달았지만 먹고 나니 배가 쓰렸습니다. 그때에, ‘너는 많은 백성과 민족과 언어와 임금들에 관하여 다시 예언해야 한다.’ 하는 소리가 나에게 들려왔습니다(10,8-11).” 이 구절에서 보듯이 요한은 많은 백성과 민족과 언어와 임금들에 관해 다시 예언하라는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예언하는 것은 지금까지 예언하는 것과 같은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새롭게 예언에 대한 소명을 준 것은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내용에 대한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제 보겠습니다.
무엇보다도 10장 2절과 8절에 나온 ‘바다와 땅을 디디고 서 있는 천사의 손에 펼쳐진 두루마리’라는 표현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두루마리는 새로운 소명을 담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두루마리를 지닌 천사의 발이 바다와 땅을 디디고 있다고 나와 있습니다. ‘바다와 땅’, 바로 이 표현이 중요합니다. 이는 단순히 세상 전체를 나타내는 표현이 아닙니다. 그랬다면 보통 우리가 사용하듯이 ‘땅과 바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평소 쓰는 방식이 아니라, ‘바다와 땅’이라는 순서로 말한 것은 어떤 특별한 것을 암시하기 위한 것입니다. 곧 13장에 본격적으로 나올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과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에 대한 암시인 것입니다.
요컨대 우상숭배에 대한 심판이 이루어진 이후 파트모스의 요한은 바다의 짐승과 땅의 짐승에 관련된 새로운 소명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새로운 소명을 받은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곧 세상 사람들이 여섯 번의 나팔 소리에 따른 재앙에도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았을까요? 우상숭배를 받쳐주는 또 다른 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세력이 세상을 현혹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우상숭배로부터 회개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새로운 심판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세력이 바로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과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입니다. [2018년 2월 18일 사순 제1주일 빛고을 3면, 한재호 루카 신부]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34) 둘째 환시의 나팔 시리즈와 두 증인 이야기(11,1-14)
일곱 번째 나팔 소리가 울리기 전에 있는 두 번째 삽입 이야기는 두 증인에 관한 것입니다. 이 내용은 요한이 받은 새로운 소명을 보다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상징적인 비유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지팡이 같은 잣대가 주어지면서 이런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일어나 하느님의 성전과 제단을 재고 성전 안에서 예배하는 이들을 세어라. 성전 바깥뜰은 재지 말고 내버려 두어라. 그것은 이민족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들이 거룩한 도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을 것이다.’”(11,1-2) 여기서 성전 안은 교회의 본질적인 내면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이민족들에게 주어지게 되는 성전 바깥뜰은 교회의 외적인 모습을 상징합니다. 마지막으로 마흔 두 달은 일정한 기간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상징적인 의미를 풀이하자면, 교회가 일정한 기간 동안 외적으로는 고난을 당하며 더럽혀질 것이지만, 하느님께서 교회의 내적인 본질을 보호하시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구절을 계속해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나의 두 증인을 내세워 천이백육십 일 동안 자루옷을 걸치고 예언하게 할 것이다.’ 그들은 땅의 주님 앞에 서 있는 두 올리브 나무이며 두 등잔대입니다. 누가 그들을 해치려고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 그 원수들을 삼켜 버립니다. 누가 그들을 해치려고 하면, 그는 반드시 이렇게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예언하는 동안 비가 내리지 않게 하늘을 닫는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원할 때마다 온갖 재앙으로 이 땅을 치는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11,3-6) 천이백육십 일이라는 숫자는 방금 전에 나왔던 마흔 두 달과 같은 기간입니다. 또 구약에서 보면 자루옷을 걸친다는 것은 회개의 예언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교회가 수난을 받으면서도 본질은 하느님으로부터 보호받는 기간에 두 증인이 자루옷을 걸치고 회개의 예언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두 증인은 누구일까요? 바로 교회입니다. 방금 전에는 성전 안에 바깥이 교회로 상징이 되었지요? 이번에는 두 증인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본문에서 증인이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으로 된 것은 성경의 전통에 따라 어떠한 증언이 유효하려면 두 사람 이상의 증언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11장은 일정한 기간 곧 42개월 혹은 1260일 동안 교회는 고난을 당하고 있기는 하지만, 하느님께서 보호해 주실 것이니 회개의 예언직을 계속 수행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2018년 2월 25일 사순 제2주일 빛고을 3면, 한재호 루카 신부]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35) 일곱째 나팔(11,15-19)
지난 한 달 동안 나팔 시리즈를 보았습니다. 이를 한눈으로 볼 수 있도록 도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팔 시리즈에 앞서 우리가 보았던 것은 봉인 시리즈였습니다. 봉인 시리즈(4,1-8,1)는 박해를 받고 있는 교회를 향한 하느님의 응답이 선포된 것입니다. 그리고 나팔 시리즈는 그러한 응답에 따른 하느님의 심판을 다루는 것입니다. 특별히 그 내용은 사람들이 우상숭배로부터 회개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느님의 징벌에도 불구하고 회개를 하지 않습니다.
이에 하느님게서는 새로운 조치를 내리십니다. 그 내용이 삽입1(10,1-11)과 삽입 2(11,1-14)에서 나오는데, 바로 요한에게 새로운 소명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 소명은 다름 아닌 ‘바다로부터 올라온 짐승과 땅으로부터 올라온 짐승’에 맞서 증언 활동을 하라는 것입니다. 아울러 두 증인으로 표현되고 잇는 교회 역시 이러한 일에 동참하기를 촉구하십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새로운 조치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우상숭배로부터 회개를 하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가 이 두 짐승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두 짐승은 우상숭배를 받쳐주는 세력인 것입니다.
일곱째 나팔은 하느님의 이러한 새로운 처사에 대해 교회가 찬미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는 일곱 번째 봉인이 뜯어졌을 때의 반시간의 침묵처럼 새로운 국면을 위한 하나의 분기점을 전례적인 분위기로 표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국면이란 우상숭배의 근본 원인인 두 짐승과 연관될 것입니다. [2018년 3월 4일 사순 제3주일 빛고을 3면, 한재호 루카 신부]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36) 용과 두 짐승의 출현(12,1-15,8)
12장부터 13장까지는 용과 두 짐승을 출현을 다룹니다. 그리고 14장에서 15장까지는 이들과 대치점을 이루는 어린양과 십사만 사천 명의 출현과 악의 세력에 대한 심판 예고를 다룹니다. 마지막으로 16장은 일곱 개의 대접을 통해 회개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심판이 나옵니다.
먼저 12장부터 13장에서 출현하는 용과 두 짐승은 우상숭배를 받쳐주는 세력입니다. 이를 그림으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용과 두 짐승이 하나의 악의 세력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와 대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용은 12장 9절에서 나와 있듯이 악마로서 성부와 같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다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에 대해서 13장 3절에 보면 ‘죽을 것 같았지만 다시 살아난다’고 묘사하면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대비를 이룹니다. 마지막으로 땅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에 대해서 13장 12절에서는 바다 짐승을 숭배하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표현하는데, 이는 성령께서 하시는 역할과 대비를 이룹니다. 그러므로 이들에 대한 심판이야말로 하느님의 주권을 바로 세울 수 있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역사적으로 이들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바다 짐승은 로마 황제 권력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땅 짐승은 소아시아 연맹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황제 권력과 소아시아 연맹 배후에는 용, 곧 악마의 세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팔 시리즈를 통해 우상숭배를 심판하였다면, 이제 15장에 나오는 대접 시리즈를 통해 황제숭배를 심판하게 될 것입니다. 우상숭배는 바로 이 황제숭배를 기반으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2018년 3월 11일 사순 제4주일 빛고을 3면, 한재호 루카 신부]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37) 용의 출현(12,1-18)
12장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용이 아이를 낳는 여인을 엾애려고 합니다. 그러나 여인이 아들을 낳자 아들은 하늘 어좌로 들어 올려지고 여인은 광야로 피신을 가게 되고 그곳에서 천이백 육십일 동안 보살핌을 받게 됩니다. 그러는 사이에 용은 미카엘 천사에 의해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집니다. 용은 안간힘을 써서 그 여인을 없애려고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용은 여인의 나머지 후손들과 싸우기 위해 바닷가 모래 위에 자리를 잡습니다.
이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여기서 용은 악마를 가리킵니다. “그리하여 그 큰 용, 그 옛날의 뱀, 악마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는 자, 온 세계를 속이던 그자가 떨어졌습니다.”(12,9)는 구절에서 이를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기를 낳는 여인은 누구일까요? 여러 교부들이 성모님으로 해석을 해 왔지만, 그것은 2차적인 해석입니다. 파트모스의 요한이 이 여인을 통해 묘사한 것은 교회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그 여인의 아기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여인이 아기를 낳았다는 것은 교회 공동체 안에 예수님에 대한 신앙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12장 전체의 이야기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12잘 6절과 14절에 나온 1260일과 3년 반의 시기를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이는 이미 11장에 나온 42개월과 같은 시기입니다. 11장에서 보면 이 기간 동안 교회의 외적 모습으로 상징된 성전 바깥뜰이 이민족에게 짓밟힐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교회의 본질로 상징되는 성전과 제단은 보호를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12장의 내용은 이를 다른 비유의 방식으로 반복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민족이나 짐승을 언급하지 않고 그 자리에 용을 언급함으로써 교회가 외적으로 이민족에게 짓밟히는 것은 바로 악마인 용이 뒤에서 위협하는 행위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어쨌든 악마의 위협은 실패로 돌아갔고, 악마는 여인의 후손 곧 신앙을 계속 지켜나가는 교회 공동체를 없애려고 바닷가 모래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어지는 13장은 바로 그 바닷가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2018년 3월 18일 사순 제5주일 빛고을 3면, 한재호 루카 신부]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38) 바다 짐승의 출현 (1) (13,1-14)
12장에서 용은 여인을 해치려고 했지만 이를 성공하지 못한 채 바닷가 모래에 자리를 잡습니다. 왜 하필 자리 잡은 곳이 바닷가인지는 13장 1절에서 그 이유가 밝혀집니다. “나는 또 바다에서 짐승 하나가 올라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구절에 따라 살펴볼 때 악마는 바다 짐승을 통해 세상을 장악하려고 합니다. 이 짐승은 악마에 힘입어 하느님을 모독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숭배하도록 하는 존재로서 역사적으로는 로마 황제 권력을 가리킵니다. 3절에 보면 그의 머리 가운데 하나가 상처를 입어 죽은 것 같았지만 그 치명적인 상처가 나았다고 전하는데, 이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하나의 패러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다음과 같은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를 공식적으로 처음 박해한 네로 황제가 기원후 68년 6월 11일 자살을 하게 됩니다. 그 이후 68년 6월부터 69년 12월까지 세 번의 황제가 바뀌는 등 로마 제국은 정치적인 위기를 겪게 됩니다. 곧 상처를 입어 죽은 것과 같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후 베스파시아누스가 권력을 장악한 이래 그의 큰아들 티투스, 작은아들 도미티아누스까지 27년간 황제가 세습되며 제국은 다시 안정을 찾게 됩니다. 곧 치명적인 상처가 낫게 된 것입니다.
어쨌든 바다 짐승에 대해 5절부터 이렇게 전합니다. “그 짐승에게는 또 큰소리를 치고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입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마흔두 달 동안 활동할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그 짐승은 입을 열어 하느님을 모독하였습니다.”(13,5-6ㄱ) 다시 3년 반이 나옵니다. 11-12장에서 우리는 42개월, 1260일, 3년 반이라는 시기를 이미 보았습니다. 곧 사탄인 용의 위협이 있는 시기, 그래서 이민족들로부터 교회가 외적인 고난을 받게 되는 시기, 그러나 교회의 본질은 보호가 되고, 교회가 세상에 예언직을 수행해야 하는 시기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3년 반이 나온 것입니다. 이는 모두 같은 시기입니다. 곧 파트모스의 요한의 시대 자체가 바로 3년 반의 시기였던 것입니다. 그 시기에 바로 사탄의 힘에 따라 로마 황제 권력이 이민족을 통해 교회를 짓밟고 있었던 것입니다. [2018년 3월 25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빛고을 3면, 한재호 루카 신부]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39) 바다 짐승의 출현 (2) (13,18)
파트모스의 요한은 바다짐승의 정체에 대해 수수께끼와도 비슷한 힌트를 통해 알려줍니다. “여기에 지혜가 필요한 까닭이 있습니다. 지각이 있는 사람은 그 짐승을 숫자로 풀이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숫자입니다. 그 숫자는 육백육십육입니다.”(13,18)
이렇게 숫자를 통해 어떤 이름을 나타내는 것을 두고 ‘게마트리아’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알파벳 A는 숫자 1, B는 2가 됩니다. 폼페이라는 로마 고대 도시의 어느 벽에는 “나는 이름이 545인 그녀를 사랑한다.”는 낙서가 있습니다. 이 역시 게마트리아를 통해 특정 이름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666에 알맞은 이름으로 어떤 것이 있을까요? 이에 대한 해석은 시대마다, 어떤 정치적 교파적 입장에 따라 달리해 왔습니다. 예를 들어 종교개혁이 한창 심했던 시기에 개신교 학자들은 666이 ‘이태리 교회 교황’(Italike Ecclesia Papeikos)라는 표현에 나오는 알파벳을 더한 값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가톨릭 학자들은 종교개혁을 처음으로 제창한 ‘마르틴 루터’(Loutherana)의 숫자값이 바로 666이라고 응수하였습니다. 이렇게 666이라는 숫자는 여러 이름을 갖다 맞추기가 쉬운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날에 와서 대다수의 학자들은 이 숫자가 네로 황제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카이사르 네로’라는 말의 히브리어 알파벳을 숫자로 환산해 그 값을 더하면 666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미 우리가 살펴 본 것처럼 묵시록의 여러 다른 내용들까지 종합해서 보았을 때 더욱 적합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서 우리는 바다짐승이 로마 황제를 가리킨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파트모스의 요한은 그 짐승의 숫자값이 666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로마 황제 전체를 두고 이렇게 ‘네로’라고 지칭하는 것은 일종의 제유법을 활용한 것입니다. 제유법이란 전체를 그것의 일부를 통해 가리키는 문학 기법인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이 방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는 말에서 ‘빵’은 단순히 밥이나 음료와 대조된 빵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식량을 뜻합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말에서 ‘들’은 강과 산까지 포함한 ‘국토’ 전체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제유법을 통해 묵시록의 저자는 로마 황제 권력을 네로라는 한 사람을 통해 표현함으로써 그 권력이 교회를 박해하는 세력임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2018년 4월 8일 부활 제2주일(하느님의 자비 주일) 빛고을 3면, 한재호 루카 신부]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40) 땅 짐승의 출현(13,11-17)
“나는 또 땅에서 다른 짐승 하나가 올라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짐승은 어린양처럼 뿔이 둘이었는데 용처럼 말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첫째 짐승의 모든 권한을 첫째 짐승이 보는 앞에서 행사하여, 치명상이 나은 그 첫째 짐승에게 온 땅과 땅의 주민들이 경배하게 만들었습니다. 둘째 짐승은 또한 큰 표징들을 일으켰는데,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불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게도 하였습니다.”(13,11-13)
바다 짐승에 이어 또 다른 짐승이 나오는데, 이 짐승은 역사적으로 볼 때 ‘소아시아 연맹’을 가리킵니다. ‘아시아 속주 의회’라고도 불리는 이 기관은 에페소를 중심으로 한 지역역인 아시아 지역의 권력입니다. 각 도시에서 대표가 파견되어 매년 여러 도시를 돌며 회의가 개최되는데, 지역 대사제와 아시아 총독을 선출할 권리가 있습니다. 곧 정치적으로 자치권을 가지고 있고 종교적인 영향력도 행사하는 기관인 것입니다. 또 은화를 주조하는 자치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관은 기원전 29년 이후로 황제 숭배의 조직적 운영과 재정을 담당하는 것을 주 역할로 삼았습니다. 소아시아 연맹이 지닌 이러한 면모를 두고 파트모스의 요한은 첫째 짐승인 로마 황제를 신처럼 받드는 땅 짐승이라고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하는 행동을 계속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둘째 짐승은) 이렇게 첫째 짐승이 보는 앞에서 일으키도록 허락된 표징들을 가지고 땅의 주민들을 속였습니다. 그러면서 땅의 주민들에게, 칼을 맞고도 살아난 그 짐승의 상을 세우라고 말하였습니다. 둘째 짐승에게는 첫째 짐승의 상에 숨을 불어넣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짐승의 상이 말을 하기도 하고, 자기에게 경배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죽임을 당하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또 낮은 사람이나 높은 사람이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이나 할 것 없이 모두 오른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을 뜻하는 숫자로 표가 찍힌 사람 말고는 아무것도 사거나 팔지 못하게 하였습니다.”(13,14-17)
여기서의 내용을 보면 소아시아 지방 권력은 황제숭배를 강요했고 황제숭배를 하지 않으면 박해를 하거나 경제적인 활동에 제재를 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황제의 석상은 모두가 볼 수 있는 곳에 세워졌고 황제숭배 제의가 이루어졌습니다. [2018년 4월 15일 부활 제3주일 빛고을 3면, 한재호 루카 신부]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41) 어린양과 십사만사천 명(14,1-15,8)
12장부터 우리는 본격적으로 황제 숭배에 관한 내용을 보고 있습니다. 황제 숭배는 우상 숭배를 받쳐주는 악의 세력의 정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치 삼위일체 하느님을 모방한 것처럼, 용과 바다 짐승, 그리고 땅의 짐승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바다 짐승은 황제 권력을 상징하고, 땅의 짐승은 아시아 연맹을 상징한다고 설명드렸습니다. 이제 14장과 15장을 보겠습니다. 본문 전체를 일일이 보지는 않겠고 흐름만 두 개의 도표를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12장과 13장이 악의 세력을 소개하는 것이라면, 14장은 이에 대적하는 하느님의 세력을 소개하는 내용입니다. 곧 어린양과 십사만사천 명이 나옵니다. 14장 내용의 핵심은 악의 세력과 하느님 세력의 대조입니다.
이미 7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십사만사천 명은 지상에 박해를 받는 교회 공동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다시 14장에 등장한 것입니다. 이마에 바다 짐승의 표를 받은 이들과 대조를 이루면서 말입니다.
이어지는 15장의 내용은 마지막 재앙을 예고하는 장면입니다. 두 세력의 대결에 있어 하느님께서 재앙으로 악의 세력을 심판하는 것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이 심판의 내용과 그 결과는 어떻게 될지 16장부터 이어지는데, 이는 다음 시간에 보도록 하겠습니다. [2018년 4월 22일 부활 제4주일(성소 주일) 빛고을 3면, 한재호 루카 신부]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42) 둘째 환시의 흐름(4-16장)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둘째 환시(4-16장)의 흐름을 정리하겠습니다. 먼저 일곱 개의 봉인된 두루마리를 어린양이 뜯으심으로써 박해를 받고 있는 지상 교회를 향한 하느님의 뜻이 선포됩니다(4-7장). 이에 따라 일곱 천사가 차례로 나팔을 부는데, 그 나팔 소리에 맞추어 하느님의 심판이 이루어집니다(8-11장).
그러나 이 심판은 무차별적이고 보복을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우상숭배로부터 회개하기 위한 훈육적인 심판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우상숭배에서 도무지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에 따라 하느님께서는 파트모스의 요한에게 새로운 수명을 주시는데, 그 소명은 우상숭배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바다 짐승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바다 짐승은 사탄인 용에 힘입어 세상을 지배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바다 짐승을 옆에서 보좌해 주는 이로서 땅 짐승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3년 반으로 상징이 되는 일시적인 기간 동안 세상을 다스리며 교회를 박해할 것입니다(12-13장).
파트모스의 요한이 받은 소명은 용과 바다 짐승과 땅 짐승, 그리고 이를 따르는 사람들을 향해 하느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며, 따라서 교회가 말씀의 증인으로서 이들과 맞서 싸워야 한다는 예언을 수행하는 것이었습니다(14-15장).
그리고 이에 따라 하느님께서는 천사들이 일곱 대접을 땅에 쏟는 것에 맞추어 이들에 대해 심판하시기에 이릅니다. 이상의 내용을 도표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2018년 4월 29일 부활 제5주일(이민의 날) 빛고을 3면, 한재호 루카 신부]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43) 대접 시리즈(16,1-21)
우선 다섯째 대접까지의 흐름과 특성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다섯째 대접까지 펼쳐지는 재앙들도 나팔 시리즈에 나오는 재앙들과 마찬가지로 탈출기의 열 가지 재앙을 떠올리게 하는 것들입니다. 나팔 시리즈에서도 살펴보았듯이 탈출기의 재앙들은 단순히 이집트를 벌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참 주인이 파라오가 아니라, 하느님이심을 알려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다섯 번의 대접과 그에 따른 재앙들이 탈출기의 재앙들과 비슷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곧 이 재앙들은 단순히 심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회개하여 세상의 참 주인이 누군지 알게 하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둘째, 나팔 시리즈에서 나온 재앙과 대접 시리즈에서 나온 재앙이 비슷하면서도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나팔 시리즈의 경우에는 3분의 1이라는 숫자가 나왔습니다. 이는 영원한 재앙이 아니라, 일시적인 재앙이며 회개를 위한 심판인 것입니다. 그런데 대접 시리즈에서는 3분의 1이라는 숫자가 더 이상 나오지 않습니다. 이는 심판의 정도가 좀 더 강력해졌음을 나타냅니다. 왜냐하면 대접 시리즈를 통한 심판에도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았고, 더 나아가 우상숭배보다도 더 심각한 짐승숭배를 통해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을 박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짐승숭배로부터의 회개를 위해 보다 강력해진 이 심판의 결과는 어떠하였을까요? “넷째 천사가 자기 대접을 해에 쏟았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을 불러 태우는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사람들은 뜨거운 열에 타 버렸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러한 재앙들에 대한 권능을 지니신 하느님의 이름을 모욕할 뿐, 회개하여 그분께 영광을 드리지 않았습니다.”(16,8-9) 이러한 상황은 다섯째 대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섯째 천사가 자기 대접을 짐승의 왕좌에 쏟았습니다. 그러자 그의 나라가 어둠으로 변하고, 사람들은 괴로움을 못 이겨 자기 혀를 깨물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이 겪는 괴로움과 종기 때문에 하늘의 하느님을 모독할 뿐, 자기들의 행실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16,10-11)
이 두 구절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사람들은 심판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하느님을 모독할 뿐입니다. [2018년 5월 6일 부활 제6주일(생명 주일, 한국 103위 순교 성인 시성일) 빛고을 3면, 한재호 루카 신부]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44) 여섯째 대접(16,12-16)
지금까지 살펴본 나팔 시리즈와 대접 시리즈가 요한의 시대를 상징적으로 묘사하는 역사 이야기라면, 이제 우리가 보게 될 여섯째 대접에서부터는 요한이 상정하는 종말론적인 이야기로 바뀌게 됩니다. 여섯째 대접이 쏟아지자 심판에 대한 악의 세력의 반응이 나옵니다. “여섯째 천사가 자기 대접을 큰 강 유프라테스에 쏟았습니다. 그러자 강물이 말라 해 돋는 쪽의 임금들을 위한 길이 마련되었습니다. 그때에 나는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예언자의 입에서 개구리같이 생긴 더러운 영 셋이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마귀들의 영으로서 표징을 일으키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온 세계 임금들을 찾아 나섰는데, 전능하신 하느님의 저 중대한 날에 일어날 전투에 대비하여 임금들을 불러 모으려는 것이었습니다. ‘보라, 내가 도둑처럼 간다. 깨어 있으면서 제 옷을 갖추어 놓아, 알몸으로 돌아다니며 부끄러운 곳을 보일 필요가 없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 세 영은 히브리 말로 하르마게돈이라고 하는 곳으로 임금들을 불러 모았습니다.”(16,12-16)
유프라테스 너머 존재하는 임금들을 위한 길이 마련이 되고, 용과 짐승 곧 바다 짐승과 거짓 예언자(곧 땅의 짐승)가 임금들을 모은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느님에 맞서 싸우기 위한 것입니다. 여기서 하르마게돈이라는 것은 ‘므기또의 산’이라는 뜻입니다. 므기또는 카르멜산 밑, 이즈르엘 평야에 있던 전략적 요충지로 격전이 벌어지곤 하던 성읍입니다(판관 4,12-16; 2열왕 23,29 참조). 그리고 즈카르야서에 따르면 이곳은 종말에 일어날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입니다(즈카 12,11 참조). 또 에제키엘서에서도 종말에 벌어질 최후의 전투가 ‘산’에서 있을 것이라고 전합니다(에제 38,8; 39,2.4.17 참조). 결론적으로 여섯째 대접에서 묘사되고 있는 내용은 악의 세력들이 인류의 역사를 종식시킬 최후의 결전을 하느님과 벌이겠다고 나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하느님께서는 이 세력들이 회개하기를 바라시며 심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지난주에도 살펴보았듯이 사람들은 회개를 하기는커녕 오히려 하느님을 모독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여섯째 대접이 쏟아지자 악의 세력들은 하느님과 맞서며 최후의 격전을 벌이려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역사 안에서 하느님께서 주셨던 회개의 기회는 사라지게 되었고 결국 종말로 이어지게 됩니다. 아무리 회개의 기회를 주어도 그것을 거절하였고, 오히려 역사를 끝내버릴 전투를 악의 세력이 주도적으로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2018년 5월 13일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빛고을 3면, 한재호 루카 신부]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45) 일곱째 대접(16,17-21)
지난주에 우리는 여섯째 대접에 이르러서 역사의 시대가 종식되고 종말의 시대가 올 것임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보게 될 일곱째 대접은 종말에 가장 먼저 벌어질 일을 예고합니다. “일곱째 천사가 자기 대접을 공중에 쏟았습니다. 그러자 ‘다 이루어졌다.’ 하는 큰 목소리가 성전 안에 있는 어좌에서 울려 나왔습니다. 이어서 번개와 요란한 소리와 천둥이 울리고 큰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강력한 지진은 땅 위에 사람이 생겨난 이래 일찍이 일어난 적이 없습니다.”(16,17-18)
본디 요한묵시록에서 ‘번개, 요란한 소리, 천둥, 지진’은 하느님의 현존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앞선 장면에서 나온 표현들입니다(4,5; 8,5; 11,19). 그러나 이 대목에서는 현존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데, 번개, 요란한 소리, 천둥, 지진에 대한 언급 이후에 나온 문장이 다니엘서의 다음 대목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나라가 생긴 이래 일찍이 없었던 재앙의 때가 오리라. 그때에 네 백성은, 책에 쓰인 이들은 모두 구원을 받으리라. 또 땅 먼지 속에 잠든 사람들 가운데에서 많은 이가 깨어나 어떤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어떤 이들은 수치를, 영원한 치욕을 받으리라.”(다니 12,1-2) 이 구절은 종말에 관한 다니엘 예언자의 예언인데, ‘나라가 생긴 이래 일찍이 없었던 재앙의 때가 온다’는 표현과 묵시록에서 ‘사람이 생겨난 이래 일찍이 일어난 적이 없다’는 표현이 사뭇 비슷합니다. 이렇게 비슷하다는 점에서 미루어 볼 때 일곱째 대접에 있을 번개, 요란한 소리, 천둥, 지진은 역사의 마지막 때, 곧 종말의 순간에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종말에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시어 무슨 일을 하시는 것일까요? 다니엘서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일곱째 대접에서도 큰 재앙이 벌어집니다. “그리하여 큰 도성이 세 조각 나고 모든 민족들의 고을이 무너졌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대바빌론을 잊지 않으시고, 당신의 격렬한 진노의 술잔을 마시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모든 섬들이 달아나고 산들이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하늘에서는 무게가 한 탈렌트나 되는 엄청난 우박들이 사람들에게 떨어졌습니다. 그 우박 재앙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느님의 모독하였습니다.”(16,19-21)
하느님께서 드러나시자 종말에 벌어지는 첫 번째 사건은 대바빌론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곧 바빌론부터 종말론적인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종말론적인 심판은 그동안 있었던 일시적인 심판, 회개를 위한 심판과는 다른 것입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멸망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종말론적 심판이 있음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하느님을 모독합니다. [2018년 5월 20일 성령 강림 대축일 빛고을 3면, 한재호 루카 신부]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46) 대탕녀 바빌론의 출현과 그에 관한 예언 (1) (17,1-17)
이제부터 보게 될 셋째 환시는 종말에 벌어지는 심판을 다룹니다. 그 시작은 일곱째 대접 때에 예고한 것과 같이 대탕녀 바빌론에 관한 것입니다. 첫 장면은 짐승을 타고 있는 대탕녀 바빌론을 소개하는 것이고(17,106), 이어서 대탕녀가 타고 있는 짐승이 누구이며,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천사가 해석하는 장면이 나옵니다(17,7-17). 첫 장면에 대해서는 이미 역사적 배경을 다루면서 살펴보았기 때문에 오늘은 천사의 해석 부분인 둘째 장면을 중점적으로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때에 천사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왜 놀라느냐? 내가 저 여자의 신비와 저 여자를 태우고 다니는 짐승 곧 머리가 일곱이고 뿔이 열인 짐승의 신비를 너에게 말해 주마. 네가 본 그 짐승은 전에도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그것이 또 지하에서 올라오겠지만 멸망을 향하여 나아갈 따름이다. 땅의 주민들 가운데 세상 창조 때부터 생명의 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자들은 그 짐승을 보고 놀랄 것이다. 그것이 전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없고 앞으로 또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17,7-8)
머리가 일곱이고 뿔이 열인 것은 13장에서도 비슷하게 소개되었습니다. 다니엘서 7장에 나오는 네 번째 짐승을 연상시킵니다. 다니엘서의 네 번째 짐승은 이스라엘을 박해하던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쿠스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제 파트모스의 요한은 로마 황제 권력이 마치 안티오쿠스 임금처럼 하느님의 백성을 박해하는 새로운 악의 세력이라는 점을 짐승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구절이 수수께끼와 같습니다. “그 짐승은 전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 그것이 지하에서 올라오겠지만 멸망을 향하여 나아갈 따름이다.” 13장 3절에서도 비슷한 표현이 나왔습니다. “그의 머리 가운데 하나가 상처를 입어 죽은 것 같았지만 그 치명적인 상처가 나았습니다.” 13장에서는 네로 황제 이후 위기에 처했던 황제 권력이 베스파시아누스가 집권하면서 다시 안정된 왕권을 유지한 것을 배경으로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17장에 나온 표현은 다른 것을 배경으로 합니다. 왜냐하면 상처에서 나았다고 말하지 않고, 전에는 있었다가 지금은 없고 곧 지하에서 올라올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 배경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보도록 하겠습니다. [2018년 5월 27일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청소년 주일) 빛고을 3면, 한재호 루카 신부]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47) 대탕녀 바빌론의 출현과 그에 관한 예언 (2) (17,1-17)
“그 짐승은 전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 그것이 지하에서 올라오겠지만 멸망을 향하여 나아갈 따름이다.”(17,8) 지난주에 소개한 수수께끼와 같은 구절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과 비슷한 내용이 이어서 나옵니다. “(그 짐승의) 일곱 머리는 그 여자가 타고 앉은 일곱 신이며 또 일곱 임금이다. 다섯은 이미 쓰러졌고 하나는 지금 살아 있으며 다른 하나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나오더라도 잠깐밖에 머무르지 못할 것이다. 또 전에는 있다가 지금은 없는 그 짐승이 여덟 번째 임금이다. 그러나 그는 일곱 가운데 하나였던 자로서, 멸망을 향하여 나아갈 것이다.”(17,9ㄴ-11)
먼저 짐승의 일곱 머리는 역사적 배경 때 말씀드렸 듯이 일곱 언덕이 있는 로마의 특성과 황제들이 통치하는 제국 도시라는 특성을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다섯은 이미 죽었고, 하나는 지금 살아 있으며 다른 하나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묵시록의 집필 시기는 도미티아누스 황제 치하입니다. 그러니 다섯 임금이란 도미티아누스 이전의 황제들 모두를 통칭하는 것이고, 여섯 번째 임금은 도미티아누스 황제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일곱 번째 임금은 도미티아누스 이후에 등장할 황제입니다. 그런데 일곱 임금 뒤에 나타날 여덟 번째 임금이 신비롭습니다. 그는 전에 있다가 지금은 없는 임금으로서 일곱 가운데 하나라는 것입니다. 곧 도미티아누스 황제 이전에 통치했던 자인 것입니다. 과연 이 내용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에 떠돌던 네로에 대한 전설을 알아야 합니다. “네로의 귀한”(Nero redux) 혹은 “네로의 부활”(Nero redivivus)이라고 불리는 이 전설에 따르면, 네로는 자살을 해서 사라졌지만 언젠가 그가 다시 살아나 파르티아의 임금들을 불러 모아 로마에 재입성하여 전에 했던 방식처럼 로마를 불태우고 정권을 장악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접한 신앙인들에게는 그러한 순간이 마치 세상 끝날과도 같이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네로가 다시 나타난다면 박해는 절정에 치다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이 전설을 배경으로 방금 읽은 구절을 해석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현재 황제가 죽고 난 뒤에 머지않은 미래에 네로가 다시 살아나 황제로 다시 등극하게 되지만 그는 또다시 멸망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묵시록이 그리는 종말의 심판 장면인데 다음 주에 이를 보다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018년 6월 3일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빛고을 3면, 한재호 루카 신부]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48) 요한묵시록의 모티브 : 네로의 전설(17,1-17)
지난주에 소개한 네로의 전설에 따르면 그는 파르티아 임금들을 불러 모아 로마에 재입성하여 로마 도시를 불태우고 정권을 장악합니다. 17장에서 천사는 이러한 내용을 반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신앙인들에게 결코 위협이 되지 않음을 천사는 전합니다. “네가 본 열 뿔은 열 임금이다. 그들은 아직 왕권을 차지하지 못하였지만, 잠시 그 짐승과 함께 임금으로서 권한을 차지할 것이다. 그들은 한뜻이 되어 자기들의 권능과 권한을 짐승에게 넘겨주고 어린양과 전투를 벌이지만, 어린양이 그들을 무찌르고 승리하실 것이다. 그분은 주님들의 주님이시며 임금들의 임금이시다. 부르심을 받고 선택된 충실한 이들도 그분과 함께 승리할 것이다. 네가 본 물, 곧 탕녀가 그 곁에 앉아 있는 물은 백성들과 군중들과 민족들과 언어들이다. 그리하여 그 여자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알몸이 되게 하고 나서, 그 여자의 살을 먹고 나머지는 불에 태워 버릴 것이다.”(17,12-16)
묵시록이 집필되었던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기에는 황제 숭배가 더욱 강화되면서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이들에 대한 압박이 더 심했습니다. 그리하여 신앙인들 사이에는 네로 때에 있었던 박해의 트라우마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 네로의 전설이 유포가 되었으니 신앙인들은 얼마나 절망했겠습니까? 로마가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했을 대의 기억, 네로 황제가 로마에서 그리스도교를 박해했던 기억, 소아시아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박해들의 위협들이 바로 이 네로의 전설로 모아지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아마도 신앙 공동체 안에 생긴 공포심은 극도에 달하였을 것이고 그 전설이 현실로 이어진다면 그때야말로 세상 종말이 될 것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바로 이럴 때, 파트모스의 요한은 묵시록을 집필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전하는 것입니다. “네로가 살아서 돌아온다고 해도 그것이 우리 신앙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 네로가 살아서 돌아오는 날이 세상 종말이라고 한다 하여도 우리는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를 심판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파트모스의 요한은 네로의 전설을 모티브로 하여 종말에 관해 이야기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종말이 언제 오는지, 어떻게 오는지에 대해서는 실질적으로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종말이 왔을 때 그것이 누구에게 희망이 되고 누구에게 절망이 되는지, 누구에게 구원이 되고, 누구에게 심판이 되는 것인지를 말하는 데에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2018년 6월 10일 연중 제10주일 빛고을 3면, 한재호 루카 신부]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49) 대탕녀 바빌론의 패망(18,1-19,10)
17장에서 대탕녀 바빌론이 바다 짐승에 의해 멸망한다는 예언이 나왔습니다. 이제 이어지는 본문은 대탕녀 바빌론이 패망하는 모습입니다. 우선 바빌론이 멸망하였다는 선포가 나옵니다(18,1-8). 그리고 바빌론의 멸망을 슬퍼하며 부르는 조롱 섞인 애가(哀歌)가 이어집니다(18,9-19). 그런 다음 기쁨에로 초대하고 멸망당한 바빌론의 참상에 대한 노래가 나오며(18,20-24), 바빌론의 멸망에 따른 하늘의 찬미 소리로 마무리가 됩니다(19,1-10).
사실 이 장면에서 바빌론이 패망하는 모습이 실질적으로 묘사가 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극적인 효과를 위해서 여러 노래가 이어지는데 그 가운데 주목할 만한 대목은 무너진 바빌론에 대한 애가(哀歌)입니다. 앞서 이 애가를 두고 조롱이 섞였다고 했는데 이는 다음의 이유 때문입니다. 보통 누가 죽어서 애가를 부르게 되면 죽은 이가 살아생전 얼마나 좋은 일을 하였고, 남은 이들에게 어떤 좋은 영향을 끼쳤는지 노래합니다. 그런데 바빌론에 대한 애가는 이와는 정반대입니다. 그 안에는 바빌론의 온갖 죄상이 낱낱이 밝혀지는데, 마치 자기가 신(神)인 것처럼 행세하면서 온 세상을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문화적으로 타락시켰던 일들을 폭로합니다. 또 이 애가 안에는 실제로 슬퍼하는 이들이 존재하는데, 땅의 임금들, 땅의 상인들, 바다의 사람들이 그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슬퍼하는 이유를 보면 이 역시 조롱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들은 그동안 바빌론과 타협을 하며 많은 이득을 취했는데, 바빌론이 무너지게 되자 더 이상 아무런 이득을 취하지 못하는 것에 슬퍼하는 것입니다. 바빌론 자체의 멸망에 안타까워하기보다 자신들이 손해를 볼 것에 염려하며 슬퍼하는 이들의 모습은 악인들이 지닌 이기심을 잘 보여줍니다. 어쨌든 파트모스의 요한은 바빌론의 멸망을 노래로 표현함으로써 당시 로마 제국이 벌이고 있는 온갖 악행이 종교적인 이유에서뿐 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의 모든 면에서 상당히 타락했음을 보여주고 그 악행의 결과가 어떠할지를 예언자로서 선포합니다.
마지막으로 17장에서도 보았듯이 바빌론이 멸망당하는 모습 또한 역설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바빌론을 멸망시킨 것은 바빌론이 자신의 권력의 도구로 썼던 바다 짐승인 것입니다. 악이 악을 멸망시킨 셈입니다. [2018년 6월 17일 연중 제11주일 빛고을 3면, 한재호 루카 신부]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50) 적들의 멸망(19,11-21,8)
이전에 우리가 함께 읽었던 여섯째 대접에서 종말론적 전투에 대한 예고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일곱째 대접에서 바빌론의 멸망이 예고되었습니다. 이제 19장 11절에서 21장 8절에는 그 전투의 결과가 나옵니다. 그 순서를 다음의 도표를 통해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종말론적 전투가 나오는데, 이 장면에서 우리가 눈여겨볼 점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로 종말론적 전투의 내용은 의외로 싱겁게 끝이 난다는 것입니다. 악의 세력이 등장하자마자 전투라고도 할 것 없이 바로 결박당해서 심판을 당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는 아무리 악의 세력이 강력하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와 대적해서 이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눈여겨볼 점은 천 년 동안 용이 결박당하는 내용입니다. 두 짐승이 심판 받은 뒤에 용이 천 년 동안 결박되었다가 후에 되살아나게 된다는 것인데, 이를 두고 많은 해석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실제 종말 때에 있을 천년의 시간이라고 보고, 어떤 이들은 어떤 특정한 시대를 두고 천년 왕국 기간이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시간부터 재림하실 시간까지가 천년 왕국이라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천년의 시간은 이 세상이 진정 하느님 나라로 탈바꿈되기 위한 일종의 과도기와 같은 시기입니다. 그럼 왜 이런 기간이 필요할까요? 이는 악의 세력이 회개할 수 있도록 배려하신 하느님의 마지막 기회인 것입니다. 천 년 동안 사탄이 묶여 있으면서 회개하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용이 결박에서 풀리게 되자, 다시 민족들을 기만하여 전투를 벌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최후의 기회마저 내팽개친 그들은 심판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셋째로 눈여겨볼 점은 악의 세력이 심판당하면서 동시에 죽음과 저승마저도 불 못에 던져진다는 것입니다. 죽음과 저승이 사라진다는 것은 그것이 악에 의해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악이 사라지자 이제는 생명과 하느님 나라만이 남게 되는 것입니다. [2018년 6월 24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빛고을 3면, 한재호 루카 신부]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51) 넷째 환시 : 종말에 있을 구원(21,9-22,5)
넷째 환시는 종말론적인 심판에 이어서 나오는 종말론적인 구원입니다. 곧 교회 공동체를 상징하는 어린양의 신부이자 새 예루살렘의 모습이 보입니다. 이제 이 세상은 더 이상 대탕녀 바빌론의 세상이 아닙니다. 바다 짐승의 주권도 사라졌습니다. 어린양께서 이를 바로 잡으셨고 하느님의 통치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제 묵시록은 이를 새 예루살렘이라는 이미지로 보여줍니다.
이 환시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21,9-10 어린양의 아내가 될 새 예루살렘 환시 21,11-21 도성의 건축적 구조물 묘사(도성 전체의 모습, 성벽, 성문, 초석, 측량, 보석들) 21,22-27 새 예루살렘에서의 사람들 21,1-5 새 예루살렘에서 완성된 에덴의 삶
넷째 환시는 셋째 환시와 비교하여 살펴볼 수 있습니다. 셋째 환시가 종말에 있을 하느님의 심판이라면, 넷째 환시는 그때에 있을 하느님의 구원을 다룹니다. 셋째 환시에서 멸망당하는 도성이 바빌론이라면, 넷째 환시에서 등장하게 되는 도성은 새 예루살렘입니다. 셋째 환시에서 바빌론이 바다 짐승을 타고 다녔다면, 넷째 환시의 새 예루살렘은 자신의 정배인 어린양을 자기 중심에 모십니다. 이처럼 심판과 구원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하느님의 주권을 위협하는 이들을 심판한다는 것은 곧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에게는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종말에 있을 심판과 구원에 대해 우리가 알아들어야 할 두 가지 사항이 있습니다. 첫째, 심판 곧 영원한 지옥 불에 들어가는 것에 우리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는 지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죽을죄를 뉘우치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죽는 것은 곧 영원히 하느님과 헤어져 있겠다고 우리 자신이 자유로이 선택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옥’이라는 말은 이처럼 하느님과 또 복된 이들과 이루는 친교를 결정적으로 ‘스스로 거부한’ 상태를 일컫는다.”(1033항) 이 가르침을 되새겨 보면 하느님에 대한 일말의 희망과 사랑이 있는 이들은 결코 지옥의 심판을 받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로 알아들어야 할 사항은 요한묵시록에서 그리는 구원의 모습이 실질적인 것이 아니라 상징적인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구원이 된 상태는 이미 피조물의 세계를 초월한 모습이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인간의 언어로는 다 묘사할 수 없습니다. 요한묵시록에서 그리는 새 예루살렘이나 에덴의 삶은 형언할 수 없는 구원의 복된 상태를 우리가 가능할 수 있도록 비유적으로 묘사한 것일 뿐입니다. [2018년 7월 1일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 빛고을 3면, 한재호 루카 신부]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52) 바빌론과 새 예루살렘
셋째 환시에서 멸망당한 바빌론이 로마 제국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넷째 환시에 등장하는 새 예루살렘은 교회의 완성된 모습을 상징합니다. 바빌론과 새 예루살렘은 여러 면에서 대조를 이루는데 이를 살펴보면 파트모스의 요한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 바빌론이 땅의 임금들과 주민들과 불륜을 저지르는 창녀로 묘사된 것과 달리 새 예루살렘은 어린양의 신부로 묘사가 됩니다. 곧 로마 제국이 온 세상에 악영향을 끼치며 하느님을 모독한 데 반해, 교회는 온갖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그리스도만을 섬기는 것입니다.
둘째, 바빌론이 자주색과 진홍색 옷, 금과 보석과 진주로 치장된 점(17,4)과 새 예루살렘이 그 광채가 매우 값진 보석과 같고 온갖 보석으로 이루어져 있는 모습(21,18-24)이 대조가 됩니다. 바빌론이 화려할 수 있었던 것은 세상을 기만하여 권력을 누린 데에서 온 것입니다.
셋째, 바빌론이 불결하고, 더럽고, 마술로 사람들을 속이는 것(17,4; 18,23 등)과 다르게 새 예루살렘은 부정한 것은 그 무엇도, 거짓과 거짓을 일삼는 자는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는 곳입니다.
마지막으로 바빌론이 순교자들의 피를 마시며 만취되어 있는데 반해(17,6), 새 예루살렘에서는 생명의 강이 흐르고 생명나무가 놓여 있어 사람들이 그곳에서 생명을 누립니다(22,1-2). 곧 로마 제국은 하느님을 모독하며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고 있는데, 교회는 하느님을 섬기며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는 것이 대조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파트모스의 요한은 네 번째 환시를 통해 교회가 장차 지니게 될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모습은 박해를 받는 신자들에게 커다란 위로와 희망이 됩니다. 거대하고 강력하고 화려한 로마 제국의 핍박 속에서 신자들은 무력함과 두려움과 불안함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신앙을 저버리고 싶은 유혹을 겪기도 하고, 하느님께서 아무것도 하시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에 사로잡히기도 했던 것입니다. 아마도 이들은 세상의 참 권력이 하느님이 아니라 마치 로마 황제에게 있는 것 같아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파트모스의 요한은 묵시록의 끝에 교회가 갖게 될 새 예루살렘의 모습, 어린양의 신부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며 희망을 갖도록 합니다.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로마 제국이 아무리 강력해 보여도 결국 하느님 앞에서 무너지게 될 것이며, 너무나 보잘것없고 무력하게 당하기만 하는 교회가 결국 완전한 승리를 하게 될 것임을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2018년 7월 8일 연중 제14주일 빛고을 3면, 한재호 루카 신부]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53) 새 예루살렘과 에덴동산
새 예루살렘의 모습은 여러 면에서 에덴동산을 떠올리게 합니다. 우선 새 예루살렘이 도래하기에 앞서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지게 된 점이 그러합니다(21,1-2). 이는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줍니다. 다음으로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에서 흘러나온 생명수의 강과 그 강 이쪽저쪽에 있는 생명나무(22,1-2)는 네 줄기의 강이 에덴동산에서 흘러나오는 모습과 생명나무가 동산 한 가운데 있는 점이 비슷합니다(창세 2,9-14). 또한 새 예루살렘의 성벽을 구성하는 온갖 보석들(21,11.18-21)은 에덴동산 주위로 가득 찬 보석들을 떠올리게 합니다(에제 28,13 참조). 새 예루살렘이 에덴동산과 비슷하게 묘사된 것은 성경 전체를 한눈에 볼 수 있게 합니다. 성경의 시작에서 우리는 아담이 죄를 지어 낙원을 잃어버렸음을 보게 되는데, 이제 성경의 마지막 대목에서 그 낙원이 하느님의 오묘하신 섭리로 회복되었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은 단순히 에덴동산의 회복이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에덴동산보다도 더욱 충만하고 복된 곳으로 묘사됩니다. 창조 때에는 빛과 어둠이 갈라져 밤낮 하루가 연이어지게 되지만 새 예루살렘에서는 하느님께서 빛이 되어 주시기에 밤이 없고 등불도 햇빛도 필요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새 예루살렘은 밤낮 하루로 이어지는 시간을 초월합니다. 또 에덴동산에서는 네 줄기의 강을 따라 보석들만 있지만, 예루살렘에 있는 생명수의 강들은 모든 민족들을 치료하고 생명나무의 열매를 맺기까지 합니다. 이는 에제키엘 예언자가 이미 예언한 모습이기도 합니다(에제 47,1-12). 고 에제키엘이 바라보았던 종말의 모습이 새 예루살렘을 통해서 실현이 된 것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에제키엘의 환시 속에서는 성전 오른편에서 생명수의 강이 흘러나오는데, 새 예루살렘에서는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에서 물이 흘러나온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하느님과 어린양 자체가 성전이 되었음을 보여줍니다(21,22). 마지막으로 에덴동산과의 가장 뚜렷한 차이는 더 이상 저주가 없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아담과 같이 더 이상 죄를 지을 일도, 그에 다른 저주를 받을 일도 없이 영원한 복락만이 남았습니다. 이렇게 새 예루살렘은 에덴동산과 비슷하면서도 다릅니다. 이에 대해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획득하신 죄에 대한 승리는, 죄가 우리에게서 빼앗아 간 것(에덴동산)보다 더 좋은 것(새 예루살렘)을 우리에게 준다.”(420항) [2018년 7월 15일 연중 제15주일(농민 주일) 빛고을 3면, 한재호 루카 신부]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54) 요한묵시록의 전체 메시지
요한묵시록의 전체 메시지를 요약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리차드 보컴이라는 학자는 이를 주님의 기도 전반부의 내용과 연관시킵니다. 한 구절, 한 구절을 따라가면서 이를 새겨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 하느님께서 하늘에 계시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묵시록의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 지상의 권력을 초월한 하느님의 주권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상의 권력, 지상의 힘, 지상의 것들이 아무리 강력해도 그것은 지상 안에 얽매여 있는 것이지 영원한 것, 초월적인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늘에 계신 하느님만이 영원하신 분이시며 모든 것을 다스리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아버지께서 하늘에 계신 분임을 알고 고백하는 것이 묵시록이 집필된 첫 번째 이유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 박해 시대에 하느님의 이름은 비참하게 짓밟혔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온갖 어려움과 모욕과 수치를 당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지상의 권력, 하느님을 모독하는 권력에 편승해야만 나도 살고 내 가족도 살고 명예도 지킬 수 있었습니다. 묵시록은 이러한 현실 속에서 하느님의 이름이 이 땅에 거룩히 빛나게 될 날이 온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구름이 태양을 가린다고 태양이 없다 말할 수 없듯이, 현실에서는 하느님의 이름이 짓밟히고 있지만 그 이름이 거룩히 빛나게 될 것임을 묵시록을 통해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 지상의 나라로 대표되는 로마 제국은 악의 세력을 기반으로 성장한 나라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중교 모든 방면에서 권력을 장악하였습니다. 세상을 기만하여 부를 축적하고 마치 자신이 하느님인 양 행세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는 영원한 나라가 아닙니다. 결국 하느님께서 임금으로 통치하는 나라가 올 것이며 그 안에서 사람들은 생명을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 묵시록의 마지막 메시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결국 당신의 힘으로 당신의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이러한 뜻에 얼마나 동참하느냐는 신자들의 몫입니다. 끝까지 항구한 믿음을 지켜나가며 하느님을 섬기게 될 때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뿐 아니라, 이 땅에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2018년 7월 22일 연중 제16주일 빛고을 3면, 한재호 루카 신부]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55) 연재를 마치며
2000년대 들어서 신천지 예수교 증거장막 성전이라 불리는 유사종교가 기승을 부리며, 왜곡된 성경 해석에서 비롯된 교리로 학업 중단, 사직, 가출, 이혼, 가정 파괴 등의 심각한 사회 문제를 낳고 있습니다. 개신교 단체인 기독교 이단 상담소 협회의 분석에 따르면 2016년을 기준으로 신천지 교회의 신자 수가 17만 명을 넘어섰고, 그 가운데 광주 전남 지역만 3만 명에 이릅니다. 신천지 교회에 입교한 사람들의 대다수가 개신교나 천주교 신자입니다. 만일 3만 명 가운데 약 10-20%가 천주교에서 개종한 사람들이라고 가정해 본다면 광주대교구에서 3-4천 명이 빠져나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단지 유사종교에 빠진 사람들의 수가 그 정도니 그 사람들의 가족들과 지인들까지 겪는 고통을 생각한다면 그 피해의 심각성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천지 교회는 통일교, JMS, 여호와의 증인, 하나님의 교회(안상홍 증인회)와 함께 대표적인 그리스도계 유사종교로서 총회장인 이만희 씨를 실질적으로 신격화합니다. 그런데 신천지 교회의 핵심교리를 보면 우리가 일 년 동안 공부한 요한묵시록이 담겨 있습니다. 이만희 씨가 쓴 「천국비밀 계시록의 진상」(1985)의 머리말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으로 기록된 요한의 계시록이 지니고 있는 비중은 절대적이라 하겠다. … 왜냐하면 성경 전편에 기록된 모든 예언이 계시록이 펼쳐짐으로써 열매인 그 실상을 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직통 계시를 받았기 때문에 묵시록의 비밀을 풀어 그 실상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보면 이만희 씨 자신에게 벌어진 개인적인 일들을 묵시록의 여러 내용과 연관 짓고 자신을 통해 종말 시대가 왔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는 옳은 주장이 아닙니다. 우선 그가 직통 계시를 받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1957년부터 스스로를 재림 예수라고 자처하는 여러 신흥 종교 단체의 교주들을 추종하다가 그들의 교리적 틀과 내용을 수집하여 1980년에 신천지 교회라는 새로운 유사종교를 만든 것일 뿐입니다. 또한 요한묵시록이 집필된 이후 2000년 동안 비밀로만 남다가 이제 와서 그 비밀이 풀렸다는 주장 역시 옳지 않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미 ‘마지막 때’ 곧 종말이 왔으며, 그분의 말씀으로 우리가 구원받았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히브 1,1-4 참조).
일 년 동안 요한묵시록을 공부하였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 공부를 바탕으로 유사종교의 잘못된 해석에 현혹되지 않기를 바라며 가족들에게도 교구에서 공인되지 않은 성경 공부에 빠지지 않도록 당부해 주시길 바랍니다. [2018년 7월 29일 연중 제17주일 빛고을 3면, 한재호 루카 신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