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필리피서의 그리스도 찬가 이야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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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7-10-06 | 조회수5,234 | 추천수0 | |
필리피서의 그리스도 찬가 이야기
필리 2, 9-11 :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이제 후반부로 넘어가면서,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드높이신 것이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즉 “비우고 낮추고 같아지고 심지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종의 모습으로 복종하셨음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하지 않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혹은 “어쩔 수 없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지만 이제 드디어 영광 받으셨다”고 말하는 것도 아님을 주목해야 합니다. 본문은 “그러므로”라는 말로 전후반부를 연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영광 :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드높이셨다”는 말씀은, 스스로 낮추어 낮아진 그 상태가 바로 진정한 ‘높음’임을 드러내셨다는 말씀입니다. 자기 빛이 다 꺼져 가장 어두운 그 상태가 바로 하느님의 빛으로 가장 환하게 빛나는 순간임을 드러내셨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시간이라는 카테고리로 표현하자니 “낮추어지신 다음에 높아지셨다”는 식으로 알아듣게 되는 것이지, 영적으로 깊이 알아들으면, 낮추어진 바로 그 상태가 가장 높은 상태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왕’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부활하시고 난 다음 하늘 위 어좌에 앉아 세상을 다스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왕좌는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분은 다스리시되 세상의 제왕들과 달리 권력의 왕좌에서 다스리시지 않고 어리석고 무력한 사랑의 십자가에서 다스리시는 아주 특별한 왕이십니다.
하느님의 영광과 힘은 높고 강력한 ‘중심’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택할 수밖에 없는 낮고 무력한 ‘변두리’에서 드러납니다. 그분의 영광은 첫째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비우는 데서 드러났으며(6-7절), 둘째 사람으로부터 자신을 특화하고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모습이 같아지는 데서 드러났고(7절), 셋째 사람 중에서도 가장 작고 보잘것없는 사람과 입장이 같아지는 데서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그 여정을 마지막까지, 즉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걸어가신 데서 드러났습니다(8절).
하느님의 크심은 이런 식으로 당신을 작게 만드시면서 드러났고, 그 힘은 무력함에서 드러났으며, 그 충만함은 비어있음에서 드러났고, 그 ‘있음’은 없어지심 즉 당신의 ‘실종’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드러나신 “숨어계신 하느님(Deus absconditus)”의 모습입니다.
성경은 하느님께서 나타나시는 장소이지만, 성경을 잘 보면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습을 점점 감추어 나가신다는 사실을 지적한 어떤 유대 성경학자의 얘기가 기억납니다.(Richard E. Friedman) 사실 히브리 성경(=구약성경)을 보면, 처음에는 하느님께서 몸소 혹은 천사를 통해 찬란하게 발현하시고 엄청난 기적들을 통해 인간사에 개입하시지만, 인간의 역할이 커짐에 따라 조금씩 조금씩 당신의 역할은 그 비중이 줄어듭니다.
아담에서 에즈라까지, 하와에서 에스델까지, 전 구약성경은 하느님의 점진적인 사라짐, 혹은 ‘실종’을 증언한다는 거예요. 에스델서에는 심지어 ‘하느님’이란 말조차 안 나오지요! 하느님께서 압도적인 주권을 지니는 것으로 시작되지만, 점차 인간이 자기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할 정도로 주도권을 쥐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며 저는,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던(요한 3,30) 말을 기쁨에 차서 내뱉던 세례자 요한의 태도를 어쩌면 하느님께서 먼저 인간 앞에서 취하셨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잔뜩 몸을 낮추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길 마다하지 않으셨지만, 그건 당신이 영광의 주님임에도 ‘불구하고’ 그리하신 것이 아니라 정확히 영광의 주님이시기 ‘때문에’ 그리하신 것입니다. 당신의 영광은 이런 식으로밖에는 달리 드러날 수 없었습니다. 그분의 낮추심이야말로 그분의 드높여짐이었습니다. 그분의 섬김이야말로 지상에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 는 유일한 자리였습니다.
사람은 어제나 오늘이나 이런 하느님을 상상하지 못합니다. 자신을 비우고 자기 자리를 전부 사람에게 내어주며 사람에게 살해당하기까지 사람의 자유를 존중해주시는 하느님을 상상하지 못합니다. 사람과 같이 되실 뿐 아니라 사람보다도 더 작은 모습, 즉 종이 되어 가장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모습은 사람의 머리로는 실로 “견적이 안 나오는”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정확히 반대되는 모습으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영광’ 역시, 이렇게 드러난 하느님의 영광을 기준으로 근본적으로 뒤집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부터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은 바로 이것을 참된 영광으로, 참된 자기실현으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성향에서 해방되어 비로소 하느님의 모상을 회복한 사람, 장자(莊子)라면 ‘진짜 사람(眞人)’이라 표현했을 그런 사람의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을 닮아가고 그 모습이 되어가는 ‘신화’의 여정에 들어선 신령한 사람의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참된 공동체를 이루는 기초가 됩니다. 헛된 영광과 권력의 취기(醉氣)에서 벗어나 ‘위’가 아니라 ‘아래’를, ‘중심’이 아니라 ‘주변’을 기꺼이 선택하는 사람들 주변의 공기-분위기는 시기와 경쟁과 견제, 그리고 그것들이 초래하는 폭력의 자장(磁場)에서 자유롭습니다. 복음적 공동체는 이런 분위기에서만 형성될 수 있습니다. 첫 회에서 말씀드렸지만, 찬가본문은 바로 이런 참된 복음적 친교의 공동체 건설을 겨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찬가에 드러난 그리스도의 이 영광을 참된 영광으로 알고 추구하기보다는, 성경이 ‘헛된 영광’이라 일컫는 자기 영광을 찾는 때가 더 잦다고 말해야 현실에 더 가깝겠지요? 이럴 때에, 하느님은 우리를 쓰시지 못하십니다. 왜냐하면, 이럴 때엔 사실 우리가 하느님을 쓰고 있기 때문이에요.
이처럼 우리가 하느님을 쓰는 때에 참된 복음 공동체 형성은 요원합니다. 성령께서 ‘영광’에 관한 우리 모두의 관점을 온전히 바꾸어 주셔서, 하느님께 영광이었던 바로 그것을 우리 모두도 영광으로 받아들이며 걸어갈 수 있도록, 우리 각자와 공동체에 넘치는 자비와 은총을 부어주시길 간청합니다.
이름 :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드러난(혹은 여전히 숨겨진!) 참된 ‘영광’의 현장에서 드러난 것이 그분의 ‘이름’입니다. 즉 하느님 자신의 이름인 ‘주님(Kyrios)’이라는 이름입니다. 그리고 이 이름은 이제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다른 ‘이름들’, 즉 세상적인 영광과 성공에 대한 근원적 도전이 됩니다. 그 모든 이름들은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 유일한 이름을 대체하려는 ‘우상’일 따름입니다. 어떤 종류의 명예나 권력이나 안정이나 성공이나 부(富)에서도 구원은 오지 않습니다. 구원은 오직 이 이름에서만 옵니다. (사도 4,12 ; 시 120,1-2 참조)
이렇게 우리가 그분의 새 ‘이름’을 참되이 고백할 때, 다시 말해 찬가 전반부에서 그분이 걸어가신 비움과 낮아짐과 복종의 여정에 몸소 참여하면서 그분을 ‘주님’으로 고백할 때, 우리 역시 각자의 새 이름을 얻게 됩니다. “너는 주님께서 친히 지어주실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리라”(이사 62,2)란 말씀이 내게 실현됩니다. 그리고 “승리하는 사람에게는 흰 돌을 주겠다”는(묵시 2,17) 말씀도 내게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 돌에는 그것을 받는 사람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새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했습니다. 흰 돌은 당시 잔칫집에 초대받았을 때 초대장 같은 것이었다고 하는데, 바로 거기에 받는 사람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고 하지요. 그 이름은 사실 나의 진짜 얼굴이요 본래면목(本來面目)으로서, ‘마지막 날’이 오기 전까진 나 자신도 아직은 잘 모른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콜로 3,3)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실로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다면, ‘나’ 역시 하느님처럼 궁극적으로는 ‘신비’로 남습니다. 이야기의 이런 수준에서는, 내가 나를 결코 모른다고 말해야 옳습니다. 하물며 내가 남을 어찌 알겠습니까. 그리고 남이 어찌 나를 알겠습니까. 다만 서로 엎드려 경배하고 존중해야 할 따름입니다. (토마스 머튼)
그리스도 찬가에 그리스도가 없다
그런데 찬가가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합니다”라는 말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 뒤에 나오는 말도 중요해요.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영광은 마지막까지 단 한 톨도 자기를 향해, 자기를 위해 남아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 지극히 당연한 영광의 순간에서조차, 당신의 ‘이름’으로 사람들의 시선이 당신 자신에게 고정되게 하기는커녕 오직 아버지만을 바라보도록 이끄십니다.
바로 그렇기에 아드님께 대한 이 경배는 곧 아버지께 대한 경배가 되는 거지죠. 그래서 이렇게 말씀드리면서 찬가 묵상을 마무리할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 찬가에, 그리스도께서 계시지 않는다고요. 마지막까지 당신이 없어서 아버지의 영광을 환히 드러내고 계신다고요. 그리하여, ‘없는’ 당신 안에 환히 드러나시는 아버지의 영광이 이제나저제나 당신의 참 기쁨이고, 이 기쁨이 바로 당신의 영광이라고요. 이 영광의 빛이 우리 모두를 환히 감싸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이연학 요나 -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신부. 최근 설립된 파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원에 살며, 형제들과 함께 동남아 올리베따노 공동체 창설을 준비하고 있다.
[성모기사, 2017년 1월호, 이연학 요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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