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경]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하느님 나라의 식탁 질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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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7-10-08 | 조회수4,387 | 추천수0 | |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하느님 나라의 식탁 질서
복음서들은 식사에 초대받으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그야말로 자주 전합니다. 그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지요. 식탁에 자리한 예수님께서 손님들이 윗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지켜보십니다. 그러고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너보다 귀한 이가 초대를 받았을 경우,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이분에게 자리를 내 드리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너는 부끄러워하며 끝자리로 물러앉게 될 것이다.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자리로 올라앉게.’ 할 것이다. 그때에 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4,8-11)
신분의 차이를 나타내는 상징체계
초대받은 이들은 말하자면 가장 좋은 자리에 앉으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행태가 무엇을 반영하는지 아주 정확하게 꿰뚫어 보십니다. 그러고는 가차 없이 비판하십니다. 물론 그분의 비판은 정당하지요. 그리고 이는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됩니다. 자신의 위신과 명예에 신경을 쓰는 것만큼 우리 안에 근본적인 욕구도 사실 없으니까요. 자신의 얼굴을 잃는 것, 곧 자신의 존재가 무시당하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느 사회나 자리를 확고하게 나타내는 상징체계들을 마련해 놓고 있지요. 누구나 그 사회에서 각자 차지하는 자리가 있고, 그 자리의 의미는 공공연히 드러나 있습니다. 중세에 그리고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유럽 사회에는 복장에 대한 공식적인 규율이 존재했습니다. 신분의 차이를 정당화하는 규율이었지요. 물론 여기에는 언제나, 각자가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나타내려는 목적도 있었습니다. 하류층은 삼베와 양털로 짠 옷을 입었습니다. 상류층은 비단과 벨벳으로 된 값비싼 수입품들을 입었지요.
옷 색깔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가난한 이들은 회색이나 갈색처럼 자연적인 색깔의 옷을 입었습니다. 반면 부유한 이들은 외국에서 들여온 귀한 색깔로 물들인 소재의 옷을 입을 수 있었지요. 자주색은 최상위 귀족층만이 입을 수 있었습니다. 금으로 된 장신구도 귀족들에게만 허용되었습니다. 평범한 여인네들은 금으로 치장을 할 수 없었습니다. 설령 그런 것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러했지요.
이것이 옛 유럽 사회의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과거로 눈길을 돌릴 필요조차 없이, 오늘날의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사회적인 차이를 구분 짓는 세밀한 표지들이 여전히 존재하니까요. 예전과 마찬가지로 신분의 차이를 나타내는 상징체계들이 존재합니다. 자동차, 집, 시계, 자기만의 전담 심리치료사, 이런 것들 말입니다. 우리야 초호화 리무진도 없고 제2, 제3의 별장도 없지요. 하지만 윗자리를 차지하려고 애쓰던 이들을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신 예수님의 말씀은 곧바로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됩니다.
안간힘을 다해 자신의 위치를 남들에게 과시하려는 모습에 우리는 물론 웃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역시 아주 교묘하게 그러한 행동을 합니다. 자신의 약점은 숨기고 공로는 인정받는 데에 생각과 신경을 곤두세웁니다. 마땅한 자격이 없음에도 칭송받기를 갈망합니다. 다른 이들의 도움은 정색을 하고 거절합니다. 자신의 명성에 누가 된다고 여기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주위의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합니다. 그러고는 너무 쉽게 그들을 깎아내립니다. 은연중 자신을 차별화하고 높이려는 의도가 숨어 있지요. 근본적으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비판하신 바로 그 행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기심에 가득 차 윗자리를 선망합니다.
불쾌감을 유발하는 본문?
그렇다면 우리에게 하시는 예수님의 권고는 무엇인가요? 우리가 어떻게 달리 행동하기를 바라시나요?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주인이나 귀빈 옆의 윗자리를 고르려 하지 말라고요. 오히려 끝자리에 가 앉으라고요. 그러면 초대한 이가 와서 우리를 더 높은 자리로 안내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이 복음서의 이 대목을 접하면 자주 곤란함을 느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일종의 겸손을 가장한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행동을 하라는 말씀으로 들리기 때문이지요. 더 나은 자리를 얻기 위해 일부러 낮은 자리에 가 앉으라니요? ‘속셈이 있는’ 겸손이 아닌가요? 전혀 겸손하지도 않으면서 실제로는 자신이 인정받는 것을 겨냥한 일종의 속임수와 다를 게 무엇이 있을까요? 실제로는 전혀 마음에도 없는, 그저 ‘계산적인’ 자기 낮춤이 아닌가요? 예수님의 말씀을 그렇게 이해할 수도 있겠지요. 특히 머릿속이 심리학적 지식들로 가득 찬 현대인이라면 그런 생각을 할 법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그분은 여기서 전적으로 실천적인 지혜의 관점에서 생각하십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구약성경적인 삶의 지혜라는 관점에서 생각하십니다. 곧 그분은 지극히 단순하게, 경험 많고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어떻게 행동할지를 이야기하십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을 삼가 행동합니다. 그런 사람은 결코 윗자리를 고르려 하지 않습니다. 바로 구약성경의 잠언이 지혜로운 이들에게 권고하는 바를 그대로 행동에 옮깁니다. “임금 앞에서 잘난 체하지 말고 지체 높은 이들 자리에 서지 마라. ‘이리 올라오게!’ 하는 말을 듣는 것이 귀족들 앞에서 하대받는 것보다 낫다.”(잠언 25,6-7)
이러한 지혜는 근본적으로 이성적인 권고에 따른 것이지 계산적인 속내와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서의 실상을 설명하기 위해 여기서 바로 그러한 지혜를 끌어들이십니다. 그분의 말씀은 말하자면 본보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보통의 세상에서 지혜로운 이들의 처신이 그러하다면, 하느님 나라에서의 행동과 관련해서는 마땅히 더더욱 그러하다고요.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에서 핵심은, 초대받은 이들의 실제 처신이 바로 하느님 나라에서의 올바른 행동에 대한 비유가 된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 비유가 엄하지만 꼭 필요한 말씀입니다. 이 비유는 다음 말씀에서 정점에 달합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4,11) 모든 권력의 질서를 뒤집어엎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의 위치가 얼마나 높은 것인지는 우리 인간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께서 결정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마리아가 마니피캇에서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루카 1,52)라고 노래한 바를 정확하게 달리 표현하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식탁 질서
하느님의 다스림이 시작된 곳에서는 전혀 다르게 행동할 새로운 가능성들이 존재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피어나는 곳에서는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투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거기서는 자리를 양보해도 됩니다. 하느님의 다스림 아래 사는 새 삶이 시작된 바로 그곳에서는 자신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이름이 이미 하늘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지요(루카 10,20 참조). 하느님의 얼굴 바라보며 사는 삶이 시작된 곳에서는 우리의 약점들을 숨길 필요가 더 이상 없습니다. 누구나 다 약하다는 사실이 거기서는 명명백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이 모두 복음서가 말하는 가난한 이, 장애인, 다리 저는 이, 눈먼 이들이기 때문입니다(루카 14,13 참조). 거기서는 이제 모든 상처가 치유될 수 있기에, 누구나 기꺼이 자신의 상처들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초대받은 식탁에서의 올바른 처신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언뜻 예의범절에 관한 이야기로 보이지만, 사실은 그보다 더 깊은 의미를 띤 비유의 말씀입니다. 초대받은 이들의 구체적인 행동이 그분에게는, 하느님의 다스림 아래 사는 삶이 근본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설명할 좋은 기회였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 나라의 이 식탁 질서에 따라 산다면, 세상은 몰라보게 달라지겠지요. 모든 것을 뒤엎는 혁명과도 같은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을 그저 식탁에서의 예의범절에 관한 이야기로 받아들인다면, 이는 그릇된 이해일 테지요. 달리 말해, 입 안 가득 음식을 넣은 채 말해서는 안 되고, 다른 이들의 음식이 다 차려진 다음에야 우리도 먹기 시작해야 한다거나 또는, 우리가 서로에게 좀 더 예의를 지키고 좀 더 다가가며 좀 더 친절해진다면 하느님의 새 세상이 이미 시작된 것이라고 여기는 생각들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안에서 시작하신 새것은 그처럼 값싸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의 새로운 식탁 질서’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최후 만찬에서 당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방식으로, 아무도 원하지 않는 종의 일을 그분이 몸소 행하심으로써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요한 13,1-17 참조).
물론 이 이야기 역시 우리는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때때로, 특히 기분이 좋을 때 고상한 척하며, 상대를 얼싸안고 무거운 짐을 들어다준다거나, 자신의 귀중한 시간을 기꺼이 할애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요. 예수님께서 최후 만찬에서 발을 씻어주신 이야기를 그런 차원에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 일은 훨씬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바로 그 일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주인’과 ‘종’이라는 끊임없는 투쟁의 관계를 당신 안에서 종식시키십니다. ‘위’와 ‘아래’ 사이의 그 끝없는 갈등을, 강자와 약자 사이의 그 무한 경쟁을 끝장내십니다. 그분이 이 모든 것에 종결을 가져오십니다.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의 것을 위해, 그럼으로써 온전히 다른 이들을 위해 사심으로써 그렇게 하십니다.
이것이 얼마나 엄청나고도 기절초풍할 일이었는지요. 신앙심 깊은 이들조차도 그분을 반대해 들고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결국 그분을 죽음으로 내몰았으니까요. 그분의 죽음을 통해 비로소 우리의 본 모습이 밝히 드러났습니다. 그분의 죽음을 통해 비로소 한 식탁 둘레에 서로 함께하는 새로운 현실이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섬기는 이도 섬김을 받는 이도 모두 다함께 기뻐하며 이미 지금 하느님의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는 새로운 공동체가 가능해졌습니다. 그 이후로 우리는 모두 하느님 백성 안에서 하느님의 혼인 잔치에 함께하는 이들이 되었습니다. 신명기가 갈망하던 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곧 거룩한 도성에서 누구나 다, 가난한 이와 이방인들조차도 모두 하느님 앞에서 기뻐하는 잔치가 시작되었습니다(신명 16,9-15 참조). 예수님의 섬김으로, 맨 끝자리로 가는 길을 택하신 예수님의 그 헌신으로 가능해진 그 잔치가!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은 서로에게 친절하게 대하라는 윤리적 권고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 것을 깨닫는 데 그 핵심이 있습니다. 그 선물은 바로, 살아계신 하느님의 도성에서 누리는 새로운 삶, 이미 영원으로 이어지는 축제의 모임에 함께하는 것, 오늘 이미 시작된 종말론적 식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히브 12,18-29 참조). ‘자신을 낮추는 것’은, 예수님의 모범 이후로, 남들 앞에서 자신의 존엄성을 깎아내리는 억지스런 자기 비하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겸허히 이렇게 인정하는 것이지요. “저는 초대받을 자격도, 공로도 없습니다. 하지만 저도 초대를 받았지요. 감히 함께해도 됩니다. 잔치의 기쁨은 끝이 없을 것입니다. 함께하는 이 기쁨 때문에, 저는 어느 자리에 앉든 상관없습니다.”
*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 세계적인 성서학자이자 사제로, 독일 튀빙엔 대학교에서 신약성서 주석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현재 가톨릭통합공동체(katholische Intergrierte)에서 복음 정신에 따라 살며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국내 출간된 저서로는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예수마음코칭』 외 다수가 있다.
* 번역 : 김혁태 - 전주교구 소속 사제로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그리스도론을 가르치고 있다.
*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Bible Insight) : 저명한 성서학자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가 매월 『생활성서』 독자들을 위해 나아가 한국의 신앙인들에게 보내는 연재 글로, 성경 안에서 길어낸 신앙과 삶에 대한 아름다운 통찰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생활성서, 2016년 8월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 김혁태 신부 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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