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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요한 복음서 해설: 고별 기도(17,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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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5 조회수6,351 추천수0

[요한 복음서 해설] 고별 기도(17,1-26)

 

 

예수님이 아버지를 향해 기도한다. 고별사를 통해 제자들에게 사랑을 가르친 예수님은 아버지를 향해 ‘일치’의 기도를 올린다. 아버지와 아들의 일치는 믿는 이들과의 일치로 확장된다.

 

예수님이 요한 복음의 첫머리부터 줄곧 가르치고 보여 준 것은 결국, ‘하나 됨’이다. 이 세상에 살과 피로 오신 하느님, 예수님은 이 세상이 하느님과 하나 되는 데 자신의 삶을 포탄처럼 내던졌다. 그런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아니고는 순전히 세상의 선택이었다. 선택은 하나의 세상을 둘로 갈라지게 한다. 하나를 두고 둘로 갈라진 세상에서 예수님은 지금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한다. 제발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예수님의 기도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예수님 자신이 아버지와 하나 되게 해 달라는 기도(17,1-8), 예수님이 누리는 아버지와의 일치에 제자들이 함께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기도(17,9-19), 마지막으로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 역시 아버지, 아들, 그리고 제자들과의 일치 안에 살아가게 해 달라는 기도(17,20-26)이다.

 

첫 번째 기도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에 대해 말한다. 갈등과 반목, 그리고 대립 속에서 예수님은 숱한 사람을 가르치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 즉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이 세상에 드러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삶으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했고, 예수님의 삶은 아버지 하느님을 드러내는 현장 그 자체였다.

 

예수님은 조금 있으면 십자가에 매달릴 것이다. 예수님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려는 마지막 때는 역설적이게도 당신의 죽음의 순간이다. 하느님이 하느님으로 이 세상에 각인되는 방법은 호통치고 군림하는 게 아니었다. 하느님의 방법은 사랑이라는 넉넉함이었다. 세상이 생기기 전 하느님은 이 세상 ‘모든 것’을 위해 당신의 개입을 시작하셨다. 하늘 위의 새와 땅 위의 동물들과 바닷속 물고기들 모두가 하느님 사랑의 대상이었다. 이미 받고 있는 사랑을 아직 못 받았다고 여기는 인간의 무지함을 깨우치기 위해 예수님은 이 세상에 왔고, 살았고, 죽어간 것이다.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의 또 다른 말이다. 죽음까지 불사하는 하느님의 끝없는 사랑은 세상을 향한 지칠 줄 모르는 구애다. 하느님을 알아 달라는 외침이고, 하느님이 예수님을 통해 완전히 드러났다는 선포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은 한 분 하느님, 참된 하느님을 만나는 길이며, 그 길로서 예수님은 자신의 삶을 봉헌했다. ‘영원한 생명’은 제 목숨 하나 부지하려는 각자도생의 자리가 아니라, 하늘과 땅이 어우러지는 데 제 삶을 봉헌하는 이의 헌신과 연대의 결정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통해 헌신과 연대의 결정체를 본다. 예수님을 보고 아버지 하느님을 볼 수 있는 눈,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아버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을 수 있는 자세, 그것이 제자들이 갖추어야 할 도리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보호받기를 아버지께 청하고 있다. 예수님이 지상에서 바치는 마지막 기도는 제자들이 이 세상에서 겪을 위험과 박해를 감내할 수 있기를 청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무릇 박해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박해를 피할 수 있게 하거나, 아버지 하느님이 그 박해를 거두어 주십사 기도하는 게 아니다. 예수님의 청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예수님과 아버지가 누리는 ‘일치’에로 제자들을 불러 주십사 비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제자들이 세상 안에서 거룩해지도록 비는 것이다.

 

앞서 되짚었듯이, 예수님이 아버지와 하나 되는 길은 십자가로 대변되는 사랑의 길이었다. 제자들 역시 예수를 증거하는 십자가의 길을 걸을 때, 하느님 안에 머무르게 된다. 세상은 제자들을 미워한다. 이미 십자가의 길이 제자들에게 주어졌다. 그 길이 사라져 몸도 마음도 안온한 상태를 예수님은 바라지 않는다. 예수님은 세상 안에서, 그 미움 안에서 제자들이 단단해지고 굳건해져서 아버지 하느님의 사람으로 세상을 보듬고 살길 원한다. 이것이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 비는 ‘거룩함’이다. ‘거룩함’은 성속(聖俗)을 갈라 속된 것을 제거한 후, 성스러움만 움켜쥐겠다는 제례적·윤리적 혹은 규범적 편협성이 아니다. 이 세상의 민낯을 정확히 짚어 내고 그 속에 하느님의 자리를 만들겠다는 증거자의 결기와 하느님의 사랑이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관계의 예술이다. 매 순간, 어느 장소에서라도 하느님이 함께할 수 있도록 삶의 방향성을 고민하는 자세, 제 신념과 가치관이 전부인양 떠들지 않는, 그래서 열린 마음과 정신과 태도로 이웃과 사회의 아픔과 갈등을 제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자세, 그럼으로써 이 세상을 단죄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부름 받은 증거로 제 삶을 세상에 내어놓는 자세,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 아버지께 비는 ‘거룩함’이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믿는 이들’을 위해 청한다. 이들이 제자들과 다른 건, 예수님을 직접 보고 듣고 만지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믿는 이들’은 요한 복음이 쓰인 1세기 말엽을 살았던 그리스도인일 수 있고, 지금 이 세상을 살고 있는, 앞으로도 살아갈 수많은 그리스도인일 수 있다. ‘믿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예수님은 세상 안에 없다. 살과 피로 존재하는 예수는 더 이상 믿는 이들 곁에 있지 않다. 예수님의 부재는 상실감이나 패배감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예수님 이후 수많은 증거자들의 말과 행적이 수많은 예수로 다시 살아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1세기 후반이 그러했고, 지금껏 예수님을 믿는 이들을 통해 예수님은 늘 살아 숨 쉬고 있다. ‘믿는 이들’이 예수님과, 그리고 아버지 하느님과 하나가 되길 바라는 기도의 내용은 실은 ‘믿는 이들’이 증거자의 대열에 합류하길 바라는 부탁과 같다. 예수님의 부재를 증거자의 삶으로 채워 나가 하느님의 현존이 영원하길 바라는 호소와 같다. ‘믿는 이들’을 통해 이천 년 전 예수는 오늘에 살아 있고, 태초의 하느님은 세상 끝 날까지 함께할 것이다.

 

예수님의 고별 기도는 다시 시작점으로 우리의 시선을 이끈다.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17,24).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래서 세상에서 증거의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이가 태초의 시간과 맞닿아 있기를 예수는 아버지께 청한다. 태초에 아버지와 아들은 사랑 안에 하나였다. 사랑은 이 세상이 시작하는 이유였고, 세상의 모든 시간 안에 변함없이 새겨진 하느님의 섭리며 선물이다. 역사의 어느 한 꼭지를 살더라도 예수님 안에 믿음으로 하나 된 이들은 태초의 사랑에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은 이미 모든 시간과 공간 안에 사랑을 뿌려놓으셨고, 사랑으로 함께하고 계신다는 사실은 태초부터 종말까지 이어지는 역사의 매 순간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을 통해 끊임없이 되새겨질 것이다.

 

예수님이 하느님께 드리는 청은 오늘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겐 하나의 요구이며 초대다.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위해 또 다른 예수로 살겠다는 것, 천상의 하느님이 아니라 이 세상 한가운데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증거하겠다는 것, 그리하여 하느님과 세상이, 세상과 그 속에 숨 쉬는 모든 피조물이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데 제 삶을 바치겠다는 것, 이 모든 것을 신앙을 가진 이라면 제대로 실천해 보라는 초대가 바로 예수님의 계명이다.

 

* 박병규 신부는 대구대교구 소속으로 2001년 서품된 후 프랑스 리옹 가톨릭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성서신학). 현재 대구대교구 성서사도직담당으로 성서 사목 중이며, 대중 강연 · 방송 진행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7년 7월호(통권 496호), 박병규 요한 보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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