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요한 복음서 해설: 믿음과 사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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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06-05 | 조회수7,406 | 추천수0 | |
[요한 복음서 해설] 믿음과 사랑
복음서를 읽는 건, 당연히 예수님에 대해 알기 위해서다. 다만 앎을 추구하는 과정과 결과가 그리 객관적이지 않다는 사실에 우리는 적잖이 당황한다. 저마다 복음서에 대한 해석이 다르고 그 실천에 있어선 가히 적대적일 만큼 뚜렷한 갈등을 보이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지난 대통령 탄핵 정국을 보자. 촛불 시민에게는 적폐 청산이 시대적 요청이었을지 몰라도 태극기를 든 어르신들은 촛불만큼이나 뜨겁게 상기되어 촛불을 저주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른바 정의사회를 구현하겠다는 사제들과 대한민국을 수호하겠다는 평신도들의 대립은 하나의 신앙, 하나의 예수를 놓고 수없이 갈라지고 으르렁댄다. 양비론으로 옳고 그름에 대한 식별을 포기하자는 게 아니다. 올바른 식별을 위해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에 대한 투명하고 담백한 답을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요한 복음은 여전히 필요하다. 공관복음과 달리 요한 복음은 역사의 예수님을 설명하거나 이해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는다. 그래서 요한 복음을 영적인 복음이라 말하고, 그 영성의 깊이가 진정한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말하고 있다. 요한 복음은 예수님을 말씀, 빵, 목자, 생명, 가시관 쓰신 이스라엘의 임금까지 다양하게 소개한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이런 서술은 예수님 자신에게 집중되지 않는다. 예수님을 받아들이려는 군중과 제자, 나아가 예수님을 적대시한 유다인들에 이르기까지 ‘믿음의 사람’을 형성하는 데 예수님에 대한 서술이 소용된다. 말하자면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이 누구인가’라는 문제는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로 환치되어야 한다. 하여, 요한 복음은 예수님을 알려고 애쓰는 이의 ‘자세’를 생각하게 한다.
요한 복음을 읽으면서 우린 두 단어와 자주 만났다. ‘믿음’과 ‘사랑’이다. 복음 전반부에서 예수님은 믿는 사람이 되기를 요청했고, 후반부에서는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쳤다. 믿음은 예수님에게로 나아가는 여정이기 전에, 자기 자신으로부터 해방되는 길이기도 했다. 나타나엘이 그랬고, 사마리아 여인이 그랬다. 나자렛을 폄훼했던 나타나엘은 나자렛 출신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고백했고 그리짐 산을 중심으로 제 신앙과 신념을 지켜 왔던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참된 메시아로 고백했다.
그러나 저 자신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건,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아무리 아는 것이 많다 해도 해방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니코데모를 보라. 그는 산헤드린의 회원이었고 율법의 전문가며 실천가였다. 그가 예수님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은 앎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너무 많이 알아서다. 다시 태어나는 건, 지금의 자기 모습이 전부가 아님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한다. 예수님은 마르타와의 대화에서 분명히 말한다. 바로 ‘지금’이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마르타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였지만, 그 메시아는 ‘내일’의 메시아였다. 지금 오빠가 죽은 건 어찌할 수 없다고 했다. 마지막 날, 다시 살아날 수 있어도 지금은 아니라고 예수님에게 말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라 강변했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마르타와 마리아, 그리고 유다인들을 두고 서글퍼하며 산란한 마음을 눈물로 표현했다.
믿으려면 믿음의 객관적 대상에 나아가기에 앞서, 제 모습과 제 신념과 제 신앙을 여유롭게 사색하는 게 필요하다. 자기가 바라고 갈망하는 일에 몰두하다가 제 꼴이 어떠한지도 모르는 무지함에 갇히는 경우가 다반사인 게 오늘날 교회다. 초라한 구유를 선택한 예수님을 위해 화려한 성당 건축에 열을 올리고, 가난한 이들의 벗인 예수님을 따른다면서 사회적 주류의 입맛에 맞는 행사와 신심 활동을 하는 모습은 어떠한가.
요한 복음은 물론이거니와 요한계 문헌 전체는 유다인들에 대해 아주 강한 비판을 쏟아 놓는다. 요한 묵시록은 유다인들을 아예 “사탄의 무리”(묵시 2,9)라 칭한다. 유다인들이 사탄인 이유는 하느님을 믿지 않아서가 아니다. 오히려 하느님을 너무 잘 믿는다면서 사람들을 갈라 세우고, 단죄하고, 자기들끼리 거룩하다는 것에 집착하여, 세상에 오신 하느님인 예수님을 철저히 소외시켰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는 매우 단순한 종교다. 신이 인간이 된 것, 하느님이 인간의 살덩이를 취한 것, 이것만 기억하면 되는 종교다. 자기보다 낮고 추하고 비루한 곳에 함께 머무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교의 핵심 가치다. 별 볼일 없던 제자를 부를 때도, 죄인이요 이방인 취급받았던 사마리아인들과 만날 때도, 무엇보다 죽이려 덤벼드는 유다인들에게 자신의 생명을 내놓는 십자가 사건 때도 예수님은 함께 머물렀다. 예수님은 ‘함께’ 살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울었다. 그게 그리스도교의 핵심 사상이자 실천의 궁극적 목표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에게 필요한 건, 믿음을 통한 사랑이다. 세족례를 떠올려 보라.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은 세족례를 보여 주었다. 대개 세족례를 희생과 겸손의 상징으로 찬송하지만, 예수님은 희생과 겸손보다는 ‘함께’ 몫을 나누려는 사랑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긴다. 서로 사랑하는 건, 누가 더 많이 희생하고 더 겸손한지를 따지는 봉사와 희생의 경연장이 아니다. 형제로 ‘함께’ 머무는 자리다. 사랑은 자신으로부터 해방되어 타자에게 나아가는 믿음의 행위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는 것을 요한 복음이 영광이라 말하는 것도 사랑 때문이다. 십자가를 고통이나 희생으로 부각시키는 공관복음과 달리, 요한 복음은 십자가를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파견된 아들 예수님이 끝까지 아버지의 뜻을 지켜 내는 눈물겨운 사랑으로 인식한다. 그래서 십자가는 영광이다.
요한 복음을 읽으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곧 사랑임을 인식하는 건 꽤나 중요하다. 그 사랑의 바탕은 어떤 처지에서도 함께 머물겠다는 연민과 공감의 여유다. ‘여유…’, 다시 말하지만, 여유여야 한다. 믿음의 순간, 사랑의 순간은 뜨겁고 뜨거운 만큼 급히 식는 게 우리의 경험칙이다. 요한 복음의 믿음과 사랑의 끈은 여유를 기반으로 해야 한다. 끝없이 믿고 끝없이 사랑하기 위해선 지금의 삶 전체를 온전히 봉헌해야 한다. 삶의 한 구석에서 믿었다, 사랑했다 끝날 일이 아니라, 삶 전체에 대한 사색과 반성, 그리고 해방을 꾸준히 실천하는 ‘여유’가 무엇보다 필요하다.
예수님은 태초부터 하느님이고, 태초부터 인간을 사랑했으며, 그 태초를 인류 역사 곳곳에 심으려 직접 인간의 살을 취했다. 그리고 가시관을 자신의 왕관으로 쓰고, 채찍을 자신의 왕홀로 삼으며 이 세상의 참된 임금으로 십자가를 졌다. 그런 예수님을 두고 희노애락의 순간에만 믿음과 사랑을 스치듯 쏟아내는 건 야속하고 무지하며 버릇없는 일이다.
천천히 우리의 삶이 무엇인지부터 되물어 보자. 나는 누구와도 함께할 수 있는가를 물어 보자. 그 물음 안에 예수님은 여전히 우리의 살덩이를 함께 짊어지고 우리와 함께 머물며, 우리에게 여전히 물을 것이다. “너, 나를 사랑하느냐?” “네! 주님”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제 인생이 뭔지 묻고 또 묻는 이들이 지닌 특권이다.
* 박병규 신부는 대구대교구 소속으로 2001년 서품된 후 프랑스 리옹 가톨릭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성서신학). 현재 대구대교구 성서사도직담당으로 성서 사목 중이며, 《말씀 흔적》 등 여러 책을 쓰고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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