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인물] 신약 성경의 인물: 되찾은 아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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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06-18 | 조회수9,495 | 추천수0 | |
[신약 성경의 인물] 되찾은 아들
루카 복음에서만 언급되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신자분들이라면 한 번쯤 들어 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서 하신 말씀 속에 등장하는 인물로 실존 인물은 아닙니다. 공관 복음 가운데 가장 긴 내용의 비유이기도 합니다. 그 내용만큼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이 이야기의 배경부터 시작해 봅니다.
되찾은 양, 은전 그리고 아들
유다인들은 죄가 있는 곳에 가까이 간다거나 죄인들과 함께하기를 꺼렸습니다. 죄인들로부터 전염되어 자신도 그 죄에 물들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정한 바에 따라 부정한 것을 피하고 엄격한 삶의 실천 또한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유다인들은 그러한 이유로 삶에서 유혹이나 죄의 기회 자체를 피하는 것도 누누이 강조합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기존의 율법보다도 더 많은 조항이 생겨났고, 그 세세한 규율 자체가 율법의 정신보다 중요하게 여겨지는 경향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많은 이가 예수님의 가르침과 말씀을 듣고자 모여듭니다. 그 안에는 부정한 이들이라 낙인찍혀 멀리해야 할 세리들과 죄인들도 있었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오는 것을 막지 않으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과 가까이하며 함께 음식도 드십니다.
그런 예수님의 모습을 지켜보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투덜거립니다.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루카 15,2).
지금도 그렇지만 당대에 음식을 함께 먹는다는 것, 곧 식구가 된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공동체 구성원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의미였습니다. 따라서 규율을 지키지 않고 부정한 이들과 음식을 나누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좋게 보일 리 없습니다.
이들의 지적에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지요. 루카 복음 15장은 세 개의 ‘되찾은 비유’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되찾은 양’(4-7절)과 ‘되찾은 은전’(8-10절)에 이어 ‘되찾은 아들’(11-32절)의 비유가 그것입니다. 이 비유가 연이어 나오면서 ‘되찾음’을 강조하고 있지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이를 통하여 무엇을 말씀하시려고 하셨을까요?
불효막심한 작은아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중 작은아들이 아버지에게 재산 가운데 자신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사 청합니다.
참고로 율법에서도 유산 상속은 피상속인이 세상을 떠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상속할 때에는 장자권을 가진 맏아들에게는 특별히 모든 재산에서 두 몫(신명 21,17 참조)을 주고, 딸들에게도 유산 상속의 권리(민수 27,7 참조)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멀쩡히 살아계신데 유산을 청한다는 것은 분명 불효막심한 일이지요.
그러나 아버지는 두말없이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줍니다. 자기 몫을 챙긴 작은아들은 집을 떠나 먼 고장으로 갑니다.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이내 물려받은 재산을 모두 탕진해 버리지요. 기가 찰 노릇입니다. 그 고장에 심한 기근마저 들어 끼니를 걱정하며 곤궁에 허덕이게 되자 어쩔 수 없이 그 고장의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리게 되지요.
그 주인은 그런 그를 자신의 들로 보내 돼지를 치게 합니다. 율법에 따르면 돼지는 부정한 것이어서 유다인들은 돼지를 기르지도 먹지도 않았습니다. 이는 작은아들이 유다 지역에서 벗어나 멀리 이방인 지역까지 갔으며, 또한 유다인으로서의 삶을 이어가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 망나니 같은 아들은 돼지들이 먹는 음식조차 먹지 못하고 배곯아 죽을 지경에 이르자 그제야 조금 정신을 차립니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15,17). 그는 일어나 자신을 품팔이꾼으로라도 삼아 주기를 청하리라 결심하며 아버지에게로 갑니다. 그가 진정으로 회개한 것일까요, 아니면 단순히 극심한 배고픔 때문에 집으로 돌아가는 것일까요?
용서와 회개
작은아들은 스스로 아버지와의 연을 끊었기에 집으로 돌아간다 해도 아버지가 자신을 아들로 받아줄 리 만무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몫을 챙기며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려 했던 당당함은 사라지고, 이제 굶어죽지 않으려 아버지의 품팔이꾼이라도 되기를 바라는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자존심은 물론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하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인 절박한 상황이었지요.
루카 복음에서는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15,20)고 밝힙니다. 멀리서도 알아본다는 것은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아들을 생각하며 한없이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 아무리 부족하고 모자란 아들이라도 포기할 수 없는 아버지의 마음이었겠지요.
아버지는 단숨에 달려가 돌아온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춥니다. 호된 질책과 따끔한 훈계부터 할 법한데 아들이 정신을 차린 것인지, 어떤 마음으로 돌아왔는지 확인하지도 않은 채 아버지는 단숨에 달려가 이 철없는 아들을 반갑게 맞이합니다.
여기에 아버지의 마음을 보여 주는 흥미로운 단어가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 ‘가엾은’(σπλαγχνίζομαι)에 대한 그리스어의 어원은 지난 본지 4월 호에서 알려드린 바처럼 ‘예수님의 자비’와 같습니다. 곧 ‘몹시 슬퍼서 창자가 끊어질 듯하다.’라는 우리말 ‘애끊다’의 의미와 가깝습니다.
이 표현은 성경에서 가엾은 이들을 바라보시며 함께 아파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나타낼 때 자주 사용됩니다. 단순히 연민을 뛰어넘어 함께 아파하시고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적극적으로 구해 주시려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바로 아버지의 사랑이자 예수님의 자비겠지요.
작은아들은 고백합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15,21). 그는 자신의 회개와 통회의 마음을 담아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고백합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고해성사의 은총은 지은 죄에 대해 얼마나 회개하고 통회하느냐에 달려 있다.’라는 말도 있듯이 회개와 통회는 용서와 화해의 기본 전제일 것입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릅니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15,22). 좋은 옷과 반지, 신발은 아들로서 다시금 받아들인다는 의미이며 관계의 회복을 뜻합니다.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자신이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았다며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서 회개하는 죄인들에 대한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을 드러내십니다.
큰아들의 분노
그런데 이 즐거운 잔치를 무척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큰아들이지요. 그는 화가 나서 그곳으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큰아들은 여러 해 동안 충실히 아버지를 섬겼고,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었습니다.
종처럼 아버지를 섬긴 자신에게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준 적이 없는데, 상속받은 가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동생을 위한 잔치에는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었으니 큰아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이를 불합리하다고 여긴 그는 분노에 차 아버지에게 항변합니다.
큰아들은 아버지에게 동생을 일컬어 “저 아들”(15,30)이라고 표현합니다. 그가 얼마나 분노에 사로잡혀 있는지 잘 드러내 주는 대목입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큰아들을 타이릅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15,31-32).
사실 아버지의 말이 호소력이 있지도 위로로 들리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매우 서운하게 들립니다. 올바른 길을 걷는 이들이 오히려 손해를 보고 반칙과 부정을 일삼는 이들이 아무렇지 않게 더 큰 몫을 받는 상황입니다. 이는 사랑이나 자비가 아니라 정의의 문제로 여겨집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아버지의 말이 틀린 것은 없습니다. 아버지는 이미 재산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따라서 아버지의 것은 모두 큰아들의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동생보다 적어도 두 배나 많은 몫을 받은 셈입니다. 그가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자주 종처럼 느꼈다면, 그 시선과 마음의 변화가 필요하겠지요.
이미 서두에서 이야기했듯이 이 비유는 불평에 대한 답변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그것을 연결해 보면 큰아들의 마음은 바리사이와 율법학자의 마음이고, 세리와 죄인의 모습은 작은아들의 모습이 됩니다.
율법에 따라 구원의 가능성이 없는 이들을 두고 율법에 따른 정의를 주장했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사랑과 자비를 이야기하십니다. 그 누구도 구원의 가능성에서 배제될 수 없음을, 회개를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이 당신의 마음이심을 상기시키십니다.
교회의 구성원들은 그 회개를 시기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마음처럼 그 회개를 통한 기쁨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공동체의 모습이겠지요. 그러고 보면 아버지 안에 머무르는 것, 아버지와 함께한다는 것은 사실 가장 큰 축복입니다.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큰아들은 바로 그 몫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고 행복임을 깨달을 수 있다면 우리는 그 기쁨의 축제에 동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애타는 마음으로 바라보시며 누구보다도 소중히 여기시는 당신의 마음, 그 자비와 사랑의 시선에 공감하고 머물 수 있다면 우리의 삶도 내적 평화가 잔잔히 흐르는 순간들이 될 수 있겠지요.
당신과 함께하는 그 위로와 평화의 여정을 겸손한 마음으로 청해 봅니다.
* 최광희 마태오 - 서울대교구 신부. 가톨릭 청년성서모임을 담당하고 있다. 교황청립 그레고리오대학교 대학원에서 성서신학을 전공하였다.
[경향잡지, 2018년 6월호, 최광희 마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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