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행복한 비유 읽기 - 하느님 나라: 밀밭의 가라지 (2) 인생의 들판에서 공동체를 통해 성장하기를 | |||
---|---|---|---|---|
이전글 | [구약] 구약 성경 다시 읽기: 회개와 구원을 선포한 구약의 복음사가 이사야 | |||
다음글 | [성경]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하느님의 이름 | |||
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9-03-19 | 조회수7,161 | 추천수0 | |
[전원 신부의 행복한 비유 읽기 - 하느님 나라] 밀밭의 가라지 (2) 인생의 들판에서 공동체를 통해 성장하기를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들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 ‘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하고 묻자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하고 집주인이 말하였다. 종들이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 하고 묻자, 그는 이렇게 일렀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마태 13,24-30)
밀밭을 바라봅니다. 밀이 풍성하게 자라나서 파도처럼 바람에 일렁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 아름다운 밀밭에 가라지가 섞여 있다는 것이 눈에 거슬립니다. 윗사람에게 아첨을 하듯 유독 바람에 팔랑이고 있는 것이 가라지일지, 아니면 제 잘난 맛에 살아가듯, 불쑥 홀로 키가 솟아오른 것이 가라지일지 알 수는 없지만 시원하게 뽑아버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가라지는 다른 밀들과 뿌리들이 엮여 있어서 그러다가 건강한 밀까지 뽑을지 모른다며 그대로 두라고 하십니다. 가라지를 뽑아 없애는 것은 나의 일이 아니라 추수 때 주인이 하실 일이라고 일러주십니다.
가라지가 있는 밀밭을 바라보듯, 내 인생의 들판을 바라보며 나는 왜 언제까지 이렇게 함께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마주하며 살아야 하는지 원망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관계를 맺는 것 같지만 정서적 유대를 맺고 사는 사람들은 승합차 한 대에 탈 수 있는 인원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 안에서 인생의 모든 희노애락喜怒哀樂을 경험하며 살게 됩니다.
내가 선택을 했든 아니면 운명처럼 주어졌든, 우리는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신 후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셔서 하와를 짝으로 주셨듯이(창세 2,18 참조)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태어나서부터 죽는 순간까지 공동체 속으로 우리를 밀어 넣으시고 그 안에서 살도록 이끄십니다.
예수님도 가정 공동체에서 탄생하셨고 나자렛 가정에서 이웃과 공동체를 이루며 자라셨습니다. 또한 공생활 시작부터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고 당신과 함께 할 공동체를 만드셨습니다. 그냥 예수님 홀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고통받는 이들을 치유하면서 메시아로서의 삶을 사셔도 되지 않았겠습니까? 어떻게 보면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을 제자로 불러 공동체를 만들고, 바람 잘 날 없는 제자단을 가르치고 타이르며 마지막 순간까지 공동체와 함께 사셨던 이유가 궁금해집니다.
신학자들의 해석처럼, 예수님께서 제자단을 만드신 것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대표하는 열두 사도를 뽑아 세우시고 흩어진 하느님의 백성을 불러 모아 무너진 이스라엘을 재건하고 종말론적 하느님 나라를 성취하고자 하시는 그분의 의도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미래에 완성될 하느님 나라만이 아니라, 당신의 공동체 안에서 이미 그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고자 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분께서 선포하신 하늘나라는 추상적인 교리나 가르침, 또는 상징이 아니었습니다. 공동체 관계 속에서 구체적인 삶으로 표현되는 사건이고 태도이며 과정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부여된 하느님의 모상은 하느님 위격들의 일치를 닮은 사람들의 친교관계 안에서 더욱 뚜렷하게 드러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702조 참조). 즉 성부 성자 성령의 성삼위의 관계 속에서 창조된 인간은 고립된 개인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타적인 사랑의 관계를 통해 표현되고 가시화됨으로써 하느님 나라를 드러냅니다. 따라서 인간은 용서와 사랑의 관계를 이루는 공동체를 통하여 하늘나라의 신비를 살 수 있고 인간 본래의 온전함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인성을 지니신 예수님께서도 단순히 생애 마지막 순간의 십자가 사건으로 한 인간으로서의 완전함에 이른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일흔일곱 번’만이 아니라 그야말로 헤아릴 수 없는 용서, 당신을 배신하고 달아날 제자들, 치명적인 배신을 안기고 사라질 ‘유다’마저 끝까지 품으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공동체 안에서 이런 온전한 사랑을 통하여 인간의 완전성을 드러내셨고 하느님 나라를 이루었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그분 사랑의 절정인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공동체는 인간의 나약함이나 외로움을 피하는 수단도, 이해관계를 위해 모인 집단도 아닙니다. 공동체의 삶은 우리가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하느님으로부터 소여된 삶이고 전인적 성장을 위한 필연적인 과정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현대 신앙인에게 중요하게 요청되는 영성은 통합적인 영성(integral spirituality)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통합(integral)이란 이것저것 모든 것을 합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필수불가결한 그 무엇을 삶의 중심(core)에 두고 전체를 하나로 아우르는 것을 말합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죄인들과 어울리고 ‘먹보요 술꾼’이라는 별칭을 가질 정도로 사람들의 삶 속에 뒹굴면서도 그분의 중심에는 항상 하느님 아버지와 일치하며 그분 뜻을 삶 속에서 실천하셨습니다.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율법 규정을 온전하게 지키는 것도, 아무런 흠도 티도 없는 무결점의 사람이 되라는 뜻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당시 바리사이들을 호되게 꾸짖는 것은 그들의 이중적이고 위선적 행동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 ‘바리사이’라는 어원이 뜻하는 바와 같이 자신들을 대중들과 ‘구분된 사람’ 또는 ‘분리된 사람’으로 인식하여 스스로를 흠 없고 거룩한 사람이라고 자처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창녀와 세리는 상종해서는 안 될 죄인이었고, 안식일을 어기는 예수님까지도 배척의 대상이었습니다.
칼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은 “나는 착한 사람이 되기보다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 했지요. 불완전을 살아야 하는 피조물인 인간은 누구나 자신 안에 결핍을 안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죄스럽고 수치스런 그림자가 항상 우리 곁에 따라다닙니다. 우리는 이 그림자를 탓하고 자책하면서 오히려 자신의 그림자 속에 갇혀 살기도 하고, 반대로 자신의 그림자를 타인에게 투사하여 자신의 눈에 ‘들보’는 보지 못하고 형제의 눈에 ‘티끌’을 빼주지 못해 안달하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해간다는 것은 밀밭에 가라지를 뽑아내듯 그야말로 흠도 티도 없는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그림자를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화해하며 하느님 안에서 한 인간으로서의 전일성(wholeness)을 회복해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홀로 거룩하게 살아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에 얽혀 살아야 하는 공동체를 통해서만이 가능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 눈에는 당장이라도 뽑아버리고 분리하고 싶은 가라지 같은 사람이라도 그들을 공동체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끊임없는 사랑과 용서로 품어낼 때 우리는 온전한 자신이 되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목표로 하는 영성은 설령 사람들의 눈에는 ‘먹보요 술꾼’처럼 보일지라도 그리스도를 우리 삶의 중심에 두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밀밭으로 나가 가라지가 있는 밀밭을 바라봅니다. 그런데 이제는 가라지가 있고 없고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가라지가 섞여 있는 밀밭을 바라보며 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공동체로 불러 모으고 그들을 끝까지 품으며 제자들과 함께 사셨는지, 예수님이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고 오히려 세리와 창녀들을 두둔하셨는지, 그리고 우리가 왜 우리 인생에 주어진 공동체를 기꺼이 살기를 바라시는지 그 이유를 깨닫게 됩니다. 가라지가 있는 인생의 들판에서, 우리가 자유롭게 사랑하며 전인적(whole)으로 성장하기를, 그리하여 마침내 천상에서만이 아니라 지상에서부터 이미 하느님 나라를 이루며 온전히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마음을 만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가라지의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 전원 - 서울대교구 소속 사제로서 캐나다 토론토대학교에서 영성을 공부하였으며 현재 도봉산성당 주임 신부로 사목하고 있다. 저서로 『말씀으로 아침을 열다 1ㆍ2』 『그래, 사는 거다!』가 있다.
[생활성서, 2019년 3월호, 전원 신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