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경]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하느님의 이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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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9-03-19 | 조회수8,488 | 추천수0 | |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하느님의 이름(Der Name Gottes)
사순 제3주일(다)의 제1독서는 탈출기 2-15장 가운데 한 부분입니다. ‘종살이하던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이 탈출하는 과정을 그린 탈출기 2-15장은 구약성경에서 가장 긴 이야기 가운데 하나지요. 매우 인상적인 해방의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혁명적인 신학사상이 담겨 있습니다. 이 거대한 이야기는 온갖 구조적인 불의가 깊이 뿌리내린 이집트라는 신정국가에서 탈출하는 이스라엘의 해방의 역사입니다. 하지만 종살이에서의 해방이라는 주제만이 아니라 또 다른 주제가 여기서 펼쳐지고 있습니다. 이 주제를 가리켜 ‘참하느님의 자기 계시’라고 부를 수 있는데, 탈출기 2-15장에는 이 두 주제가 서로 긴밀하게 얽혀 있습니다.
이름을 거절하시다
하느님의 ‘자기 계시’는 그분께서 모세를 파라오에게 보내시는 부분에서 시작됩니다. 파라오는 신으로 숭배받는 이집트의 임금이었지요. 모세의 파견 사명은, 파라오로 하여금 이스라엘에게 자유를 주어 이스라엘이 떠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세는 머뭇거립니다. 그는 자신이 파라오 앞에 감히 나설 처지가 아니라고 여깁니다. 더구나 자신이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낼만 한 역량을 지닌 것도 아니라고 여깁니다. 간단히 말해, 모세에게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를 마음이 없습니다. 그에게는 거절할 이유와 근거가 줄줄이 넘쳐납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의 뜻에서 빠져나가고 싶을 때면, 온갖 가능한 이유를 들이대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모세는 자신이 말솜씨도 없고, 입도 무디고 혀도 무디어서 도대체 말을 제대로 못한다고 하느님께 항변합니다(탈출 4,10 참조). 그러면서도 그는 하느님 앞에서 아주 놀라울 정도로 이런저런 근거를 잘도 둘러대며 나름의 논리를 설파합니다. 예를 들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을 거부할 것이며 하느님께서 자신을 보내셨다는 사실을 결코 인정하지 않으려 할 게 뻔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모세를 향해, 그에게 말씀을 건네시고 그를 보내셨다고 주장하는 그 하느님이 도대체 누구냐고 물을 것이라 말합니다. 아무나 나서서, 자신이 하느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 하느님이 도대체 누구시오?’ ‘그분이 대체 어떤 분이시오?’ 하고 말한다면, 그들에게 무엇이라 대답해야 하느냐고 모세는 묻습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하느님께 그분의 이름을 물은 것입니다(탈출 3,13 참조).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아주 특이한 답변을 주십니다. 얼마나 특이한지, 수수께끼 같은 이 답변을 해석하기 위해 오늘날까지도 학자들이 무진 애를 쓰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답변은 사실 이름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있을 나로 있을 나다.’라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서 ‘나는 있을 나로 있을 나다.’께서 너희에게 나를 보내셨다고 말하라고 이르십니다(탈출 3,14 참조).
오늘날 성경 주석이나 해설은 ‘나는 있을 나로 있을 나다.’라는 이 말을 자주 ‘나는 있는 자 나다.’라고 옮깁니다. 물론 이러한 번역이 아주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말씀이 겨냥하는 방향에는 제대로 부합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은 사실 이름이 아니라, 이름을 말씀하시는 것에 대한 거절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의 의미는 대략 이렇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너희가 나와 이야기할 수 없다. 내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 너희는 결코 내 이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너희에게 필요한 것은 단 하나이다. 곧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정확히 보는 것이다. 이제 너희와 이집트에 일어날 일이 내가 누구인지를 보여줄 것이다. 그 일들이 참으로 내가 누구인지를 증명할 것이다. 이름이 아니라 일어날 사건이 바로 그것을 밝혀줄 것이다. 나는 내 행동을 통해, 그렇게 있을 나로 있을 나다. 그러니 너희는 나에게서 그 어떤 이름도 받지 못한다.
행위를 통해 밝히시다
모세에게 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대략 그런 의미로 옮겨볼 수 있습니다. 이로써 탈출기의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에 대해 두 가지 본질적인 사실을 드러냅니다.
곧 첫째, 여러 민족의 신들이 각기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하느님께는 이름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방 민족의 신들은 아문, 이시스, 이슈타르, 마르두크, 제우스, 헤라와 같은 이름으로 불립니다. 고대 세계에는 수많은 신들마다 각기 이름이 있었고 더 나아가 신들의 왕국이 있었습니다. 곧 삶의 모든 영역마다 고유하게 남신이나 여신이 존재했습니다. 오늘날 종교학자들에 따르면 이를 ‘관할 신’이라는 개념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집트에는 태양의 신 레Re가 있었습니다. 달의 신 콘수Chonsu도 있었지요. 풍요의 신 하피Hapi도 있었는데, 그는 생명에 아주 중요한 나일강의 범람을 관장하는 신이었습니다. 사랑과 춤과 미의 여신 하토르Hathor, 정의와 진리의 여신 마아트Maat, 무서운 전쟁의 여신 네이트Neith, 악령들에게서 지켜주는 여신 바스테트Bastet, 습기의 여신 테프누트Tefnut, 폭풍과 악과 파멸의 신 세트Seth도 있었습니다. 이밖에도 계속 신들의 이름과 그 관할 영역을 나열하는 게 가능합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어떤 신에게 무엇인가를 청하려면 그 이름을 올바르게 불러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신은 귀머거리가 되어 들을 수가 없었지요. 반드시 신의 정확한 이름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만 각각 그에 ‘해당하는’ 신들에게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신의 이름이 제대로 불려야만, 그 신은 사람들이 개별적으로 자신을 두고 말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이름을 알아야만 그 신과 접촉할 수 있었고, 그 신에게 무엇인가 영향을 미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이스라엘의 하느님께는 더 이상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구약성경의 신학이 높은 수준으로 발달한 단계에서는 아무튼 그러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사람들이 더 이상 그 이름을 알 필요가 없는 분이었습니다. 그분에게는 특별한 이름이나 비밀스런 이름이 필요 없었습니다.
두 번째로,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에 대해 어떤 이름을 계시하는 것을 거절하신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를 앞서 이미 언급했지만, 이 이유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곧 하느님이 누구신지는 그분의 구원 행위를 통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의 고통을 더 이상 참지 못하실 때, 그분의 가장 내밀한 본질이 밝혀집니다.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구원하시고, 해방하시고, 압제에서 자유를 찾아주시고, 종살이와 착취의 땅에서 “좋고 넓은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탈출 3,8)으로 이끄실 때,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가 드러납니다.
이렇듯 하느님의 본질은 그분의 구원 행위에서 밝혀집니다. 그분이 누구신지에 대해 정의를 내리려면, ‘그분은 우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신 분이시다.’ 하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좀 더 뒤에는, ‘그분은 우리를 민족들 사이에서 불러 모으신 분이시다.’ 그리고 좀 더 뒤에는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시키신 분이시다.’ 하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에 대한 성경의 정의입니다.
이처럼 탈출기의 이 거대한 이야기는 놀라운 신학 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압제에서 풀려난 이스라엘의 해방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하느님의 자기 계시를 보여줍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행동을 통해 당신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그분이 하실 행동이, 당신 백성 이스라엘을 향한 그분 자비의 행위가 그분의 이름입니다. 결코 지치지 않으실 그분 권능의 행위가 바로 그분의 이름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묘사?
이런 점에서 보면, 유다인들과 또 그와 더불어 교회가 예부터 YHWH라는 말을 발음하지 않은 것은 신학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일입니다. 우리는 ‘야훼’ 또는 이른바 ‘여호와’라 하지 않고 ‘주님’이라 부릅니다. 이 거룩한 네 글자(YHWH)를 어떤 한 단어로 발음한다면, 이는 이름을, 곧 제우스나 주피터처럼 하느님에게 이름을 부여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탈출기 3장 14절은 하느님의 이름에 대한 말씀이 아니었는데도 말입니다.
때문에 하느님을 그림이나 조각으로 묘사하는 것은 저에게는 옳지 않은 일로 보입니다. 미켈란젤로가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에 그린 하느님의 모습이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중세 시대에 책 삽화가가 종이 위쪽 가장자리에 그린 하느님의 손가락이 더 낫습니다. 이방 민족의 신들과는 달리 하느님에게 이름이 없다면, 그분을 묘사할 수 있는 어떤 모습도 그분에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기서 지금 제가 말하는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에 대해서는 다만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분이 어떻게 하셨는지, 여전히 어떻게 하고 계신지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런 맥락 가운데 신학자들은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설명을 시도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하느님 아버지를 그림으로 묘사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교 미술이 수없이 그렇게 했지만, 이는 잘못된 길이었습니다. 이 점에서 유다인들은 늘 올바른 감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성경이 괜스레, 하느님은 “홀로 불사불멸하시며 다가갈 수 없는 빛 속에 사시는 분 어떠한 인간도 뵌 일이 없고 뵐 수도 없는 분”(1티모 6,16)이시라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물론 성경은 요한복음서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생각할 여지를 줍니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
무슨 말씀일까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 하고, 그분에 대해 무엇인가 표상을 만들고자 한다면,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참하느님의 모상이십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이콘이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봅니다.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을 부를 수 있습니다.
*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 세계적인 성서학자이자 사제로, 독일 튀빙엔대학교에서 신약성서 주석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현재 가톨릭통합공동체(katholische Intergrierte)에서 복음 정신에 따라 살며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국내 출간된 저서로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예수마음코칭』 『주님의 기도 바로 알기』외 다수가 있다.
* 번역 : 김혁태 - 전주교구 소속 사제로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광주가톨릭대학교 총장을 맡고 있다.
*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Bible Insight) : 이 칼럼은 저명한 성서신학자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가 매월 『생활성서』 독자들을 위해 보내오는 글로, 성경 안에서 길어낸 신앙과 삶에 대한 아름다운 통찰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편집자 주)
[생활성서, 2019년 3월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 김혁태 신부 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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